역사자료들

진평왕(출처; 인물한국사)

손진길 2021. 12. 2. 02:45

진평왕(출처; 인물한국사)

 

신라가 삼국의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주춧돌을 놓다

[ 眞平王 ]

출생 - 사망 ? ~ 632

 

고구려의 장수왕 비견될 만큼진평왕 5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커가는 신라를 튼튼히 앉혀 놓은 장본인이다. 태자였지만 일찍 죽은 아버지 때문에 자신조차 자칫 왕위에 오르지 못할 했는데, 할아버지 진흥왕신라 키우기 진평왕이 아니었다면 열매 맺지 못하였을 것이다. 삼국의 다툼 속에 마침내 신라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거니와, 경기 속의 리베로는 진평왕이었다.

신라의 국운을 펼쳤던 왕

진평왕은 신라 26 왕이고,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54년을 재임한, 신라 천년 역사의 가장 오래 노릇을 이이다. 고구려로 치면 오랜 노릇이나 업적이 마치 장수왕 같다.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이 바야흐로 피운 것은 진평왕에게 이르러서이다. 그의 뒤를 이어 선덕 진덕 여왕이 왕위에 오르나, 그것은 중간 과정일 , 그가 키운 여러 인재들은 여왕의 시대를 보필했고, 끝내 김춘추라는 불세출의 명군으로 이어져 삼한 통일의 위업을 이루게 되었다. 모든 것이 진평왕으로부터 시작했다 해서 지나치지 않다.

진평왕의 아버지는 개에 물려 죽었다. 진흥왕의 큰아들이요 이미 태자에 책봉된 동륜이 그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를 잃었을 진평왕의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다. 이는 [화랑세기] 나오는 이야기이다. 책을 아직 전적으로 신뢰할 없으므로, 진평왕의 기구한 운명에 불행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굳이 끌어들일 필요가 없겠다.

동륜의 죽음을 전하는 기록은 [삼국사기] [화랑세기] 나란하다. 다만 [삼국사기] 진흥왕 33(572), “3월에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라고만 간단히 적은 비해, [화랑세기] 세세한 과정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동륜이 보명궁의 담을 넘다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것이다. 보명궁주는 진흥왕의 후궁, 아버지의 여자를 사랑한 불륜의 끝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진평왕에게 가지 짐을 지웠다. 불명예스럽게 죽은 아비의 자식이라는 짐이 첫째요, 사고가 없었던들 순조롭게 이어졌을 왕위가 순간 건너 것처럼 바뀌었음이 둘째이다. 진평은 가지 역경을 헤치고 자신이 자리를 찾아간 왕이었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을 바로 돌린 일이기도 하였다.

진평이 왕에 오르기까지의 과정

 

진평왕 전후의 왕위 계승.

동륜의 죽음으로 왕이 그의 아우 진지왕 행실이 밝지 못했다. 진평에게 삼촌이 되는 진지왕은 자리에 오른 4 만에 폐위되고, 20 후반의 아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이것이 진평왕에게 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삼촌의 죽음으로 왕위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행이었지만, 비운의 왕을 다시 두지 않으려는 주변의 눈길은 날카롭기만 했으니, 쉽게 받아 넘길 부담이 아니었으리라.

사실 진지왕에게도 어린 아들이 있었다. 용춘 또는 용수라 하는 아들은 나중에 진평의  천명공주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았다. 그러나 왕위는 아들에게 이어지지 않고 진평왕에게 돌아왔다. 삼촌의 집안에 왕위를 빼앗기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사촌을 물리치고 무난히 왕위에 올랐다. 사실 진흥왕 이후 박차를 가하는 신라의 발전 속도로 보아, 신라 왕가에서는 보다 정치적이지 못한 진지왕을 그대로 없었을 것이다. 음탕하다는 이유로 왕의 자리에서 급거 끌어 내리고, 진흥왕과 여러모로 닮은 진평을 서둘러 왕위에 올렸다고 보인다.

놓칠 하다 다시 찾은 왕위, 진평왕에게는 그런 우여곡절이 있다. 열세 때인 579년의 일이다. 왕의 나이가 어리자 할머니인 사도부인 수렴청정 했다.

열세 진평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동생들을 활용했다. 백반(伯飯) 진정갈문왕으로, 국반(國飯) 진안갈문왕으로 삼은 것이다. 흔히 갈문왕 왕이 되지 못한 왕의 아버지를 이르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대원군 같은 존재이다. 이들이 갈문왕이 데는 사도부인의 허락이 떨어진 다음이었겠지만, 둘은 형의 좌우에서 형의 말을 충실히 듣는 심복으로 자라갔고, 자연스레 사도부인 같은 기존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하였다. 비록 나이 어렸지만, 진평은 결코 호락호락한 왕이 아니었다.

장수왕에 버금가는 진평왕의 업적

진평왕은 재위 6 되던 해에 건복(建福)이라는 연호를 썼다. 할아버지 진흥왕이 그랬던 것처럼, 신라만의 독자적인 역사 만들기에 또한 당당했다. 13년에는 남산성을 쌓고 이어서 명활성을 고쳐 쌓았다. 수도의 주변 경계를 확실히 하자는 뜻이었다. 이는 나아가 이웃인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하여 한판 벌릴 준비이기도 하였다.

특히 백제와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삼국사기] 기록만으로 보자면, 24 아막성, 33 가잠성, 38 모산성, 40 가잠성에서 전투가 벌어지더니, 45 늑노현을 시작으로 절정에 달해, 46년에는 속함ㆍ앵잠 무려 6성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로도 백제와의 싸움은 그치질 않았다. 신라가 팽창해 가는 만큼 주변의 대항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내부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재위 53, 칠숙과 석품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다행히 초기에 발각되어 칠숙을 잡아 처형시켰는데, 석품은 백제 국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석품은 가족이 그리웠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돌아와 총산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나무꾼을 만나 옷을 바꿔 입고 땔나무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름대로 치밀히 변장을 했지만 집을 감시하던 군사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54년을 왕위에 있었으니 어찌 내우외환이 적었을까. 그러나 진평왕은 바야흐로 성장해 가는 신라를 수성(守成)하는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것이 고구려의 장수왕과 비견되는 대목이다.

성골집단을 더욱 공고히 하여, 왕위 계승은 비록 딸이라 할지라도 안에서 이루리라 각오한 진평왕의 집념도 대단하다. 그는 사촌 동생 용춘을 사위로 삼았는데, 이는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동생 집안의 모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진평왕의 집념은 이루어졌다. 딸인 덕만으로 왕위를 이었다. 선덕여왕이다.

제왕의 길에 빛나는 한 가지

진평왕의 54년은 성장하는 신라의 발걸음과 같이 하였다. 54 재위의 의의를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삼국유사] 그리는 진평왕에게 눈길을 돌리게 된다. 일연은 오직 가지 이야기로 이를 요약한다. 기이 편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조이다.

왕의 키가 무려 11, 제석궁(帝釋宮) 갔을 돌계단을 밟는데, 개가 쪼개지는 것이었다. 진평왕은 주변의 신하들에게, “ 돌을 움직이지 말고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 하였다. 그가 얼마나 거구이며 얼마나 힘이 셌는지 보여주는 삽화이다. 이야기 다음에 하늘이 내려준 옥대가 나온다.

왕위에 오른 해였다. 하늘의 사신이 궁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상황께서 옥대를 내리라 하였다 전하였다. 왕이 몸소 무릎 꿇고 받자 사신은 하늘로 올라갔다. 왕은 교외나 종묘의 제사 모두 옥대를 찼다.

이런 이야기는 진평왕과 주변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열세 어린 왕의 등극 후에 하늘로부터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징표가 필요했을 것이다. 집권의 정당성이다. 신라는 나라가 커가는 만큼 내부의 권력구조도 복잡해지고 있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왕이 진평으로서는 자신이 왕이 정당성 위에 튼튼한 권력의 구축이 필요했다. 이에 맞춤하는 도구가 하늘이 내려준 옥대이다.

이와 닮은 이야기가 신문왕 옥대이다. 왕은 감포 바닷가 문무왕의 수중릉 부근에서 만파식적을 받아 나왔다. 이때 함께 받은 것이 옥대이다. 왕은 감은사에서 하룻 자고 궁으로 돌아오는데, 지림사에 이르러 서쪽 시냇가에서 머무르며 점심을 먹었다. 태자 효소왕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경하하였다. 서서히 살펴보더니 왕에게, “ 옥대의 여러 구멍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험 삼아 옥대의 왼쪽 번째 구멍을 시냇물에 담갔더니,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고구려의 왕이 신라를 치려다 신라의 가지 보물 때문에 중단한다. 황룡사 장륙존상 구층탑그리고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옥대가 가지이다. 앞의 가지가 불교의 힘을 말한다면, 옥대는 신라 스스로 자랑해마지 않던 신국(神國) 상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평왕 [眞平王] - 신라가 삼국의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주춧돌을 놓다 (인물한국사, 고운기, 장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