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OBS교재(손진길 작성)

로마서 제35과(손진길 작성)

손진길 2021. 2. 15. 04:49

로마서 제 35(15:27-33) <OBS4-35>(손진길 작성)

 

[Q1] 초대교회 사도들의 선교여행과 활약상 가운데 유독 베드로, 요한, 바울 등의 행적만이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아서 우리에게 오늘 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         사도들의 선교여행과 활약상을 담은 성경기록은 사도행전과 일부 서신서들인데 공교롭게도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요한의 경우는 요한계시록이 남아 있기에 말년의 그의 생애를 짐작하게 하고 있음. 그밖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가(12:2) 남아 있을 뿐 기타 9사도들(예수님 직계제자)의 선교기록은 성경상으로는 찾아보기 힘듦.

·         그 이유를 좋게 생각해보면, 마치 요셉의 형제 11명 가운데 특별히 유다의 행적만을 창세기 제38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임. 대표사례로서 유다의 경우만 다루어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나타날 때까지 나머지 형제들의 생활상이 모두 그와 비슷하였다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므로 구태여 모든 사람의 행적을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임. 그리고 이왕 상징성을 띨 것 같으면 그 중 가장 나은 형제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 낫다는 사고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으며 조금 더 생각을 발전시켜보면, 의인의 행적에 특별히 충실한 구약기록인지라, 당시 11형제 특히 요셉의 이복 형들 10명 가운데 의인의 행적을 발견할 수 있는 자는 유다이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음.

·         다음으로 그 이유를 좋지 아니한 방향, 곧 인간의 집단이기심 혹은 남은 자들의 자신의 문화와 문명 중심주의 사고의 반영에서 찾아 볼 수도 있을 것임. 그것은 12지파 가운데 정통왕가를 이룬 유다 지파가 자신의 가문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과 같음.

 

[Q2] 만약 인간의 집단이기심, 특히 유일하게 살아남은 문명권이 자신의 문화에 충실한 기록만을 의도적으로 취사선택하여 남기고 있다고 한다면 그 가능성은 역사 가운데 어떻게 찾아 볼 수 있는가?

·         로마의 문명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파괴되었지만 그 가운데 로마교황청만은 고트족 왕실의 친 기독교성향 때문에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음. 참고로,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AD 476년임. 로마제국의 수도에 입성한 고트족의 왕실이 이미 기독교화되어 있었기에 그 일이 가능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서방선교의 주역이었던 베드로, 요한, 바울 이외에 동방선교나 아프리카 선교에 나섰던 기타 9사도들의 존재와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임.

·         후일 로마교황청 중심의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이단시 되거나 소수파로서 배척을 받았던 이집트의 아리안주의(Arianism) 및 콥틱파(Coptic Mission), 시리아의 네스토리안 일파(Nestorians)가 있었고 그 밖에도 로마교황청과 한 때 병존했던 3개의 교황청(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이 있어 기타 9사도들의 뒤를 잇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음.

 

[Q3] 아리안 및 콥틱, 네스토리안, 기타 3개 교황청의 역사의 대략은 어떠한가?

·         첫째로, 아리안 및 콥틱의 동북방 선교는 게르만 족속 가운데 고트족 왕실 일부를 기독교화할 정도로 성공적인 것이었으며 그 덕분에 로마교황청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음. 둘째로, 네스토리우스는 AD 450년경에 이단으로 쫓겨서 죽었지만(당시 Syrian bishop이었던 Nestorius) 그의 추종자들은 로마식 기독교와 대립하였던 페르시아 문명권에서 살아남았음. 그래서 AD 489년에 네스토리안 조직을 정비하고서 인도, 중국에까지 이르는 실크로드 및 인도양 선교(이른 바 동남방 선교)에 주력하였으며 그 흔적이 중국에 경교비석으로 남아 있을 정도임.

·         반달족의 침입으로 이집트의 기독교문명은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탁월한 기독교의 사상과 학문은 성 어거스틴에 의하여 집대성된 바 있음. 페르샤와 사라센 문명에 의하여 초토화된 예루살렘의 교황청은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아니함. 다만 15세기 투르크 족의 침입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던 동로마제국의 비잔틴문화와 콘스탄티노플 교황청의 전통은 제국의 멸망 후에 러시아가 그 전통을 종교적으로 계승하였음. 그래서 러시아에서 살아 남아 오늘날도 희랍정교회로 불리어지고 있음.

·         이상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사실은, ①로마교황청은 사도들의 서방선교를 중심으로 초대교회사를 편찬하였으며, ②기타 동방선교와 남방선교 등의 역사는 제외하였으며, ③유일한 교황청으로 살아남기 위하여 나머지 교황청의 흔적을 역사적으로 또 성경 기록적으로 지웠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임.

 

[Q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선교여행을 초대교회 이방선교의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로마교황청 중심의 서구 기독교의 역사를 오늘날 교회역사의 정통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하나님의 말씀(God's talk)을 이해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2가지 시각이 있기 때문임; 첫 번째 시각은 역사적, 종교적 시각으로서 어떤 문화 속에서 어떤 말씀이 어떻게 존재하였으며 어떻게 백성들의 행동양식을 종교적, 사상적으로 규제하였으며 결국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되어오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따지는 방법임. 그것은 말씀과 인간과의 상호작용인 것 같으나 문화의 틀이 이미 짜여 있으며 주도세력인 인간들의 흥망성쇠 속에서 말씀 또한 그 운명을 같이 해오고 있는 것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상부구조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는 시각임.

·         그것에 비해 두 번째 시각은 인간의 문화와 상황 또는 역사적 제한성(이상은 ‘Context’를 말함)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로서 존재하며 스스로 진리로서 살아남아 역사를 이끌어 가는 운동력을 지니고 있다는 시각임. 그 경우 ①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의도를 표명한 계시이며, ②역사의 발전은 하나님의 섭리를 반영하고 있으며, ③인류의 문제해결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신앙고백이 그 중심사상이 되고 있음.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text)이 인생의 문제, 사회적 문제, 민족의 문제, 나아가서 모든 인류의 문제까지 해결할 뿐만 아니라 말씀 자체가 피조물의 피곤한 일생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열쇠(Key of salvation)가 되고 있다는 관점인 것임.

·         따라서 Context가 아니고 Text에 시각을 맞추어 나가면 바울의 서방 선교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서구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됨. 그리고 그것은 시공간적 제한과 인위적 축소 및 왜곡을 뛰어넘어 오늘날도 그 진리성을 입증하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임.

 

[Q5] 그와 같은 시각에서 바울의 설교(15:27), 바울의 여행계획(15:28), 축복의 나눔과(15:29), 기도의 요청(15:30-33) 등을 음미해보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하나님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듯이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것은 실로 당연하다는 것임(15:27).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도이거나 이방인이거나 구별할 이유가 없는 것임. 그리고 서방선교에 나선 바울이 서쪽의 끝 서바나(스페인)까지 가겠다고 하는 계획은(15:28)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영역 내에서 구체화시킨 것이므로 그 뜻은 그것이 동쪽 아시아의 끝이 되었든, 남쪽 대륙의 끝이 되었든 간에 동일한 것임.

·         바울이 땅끝까지 가고자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울의 사상을 편지로 만나는 것보다 직접 저자인 바울을 만나서 성도들이 인격적인 믿음의 나눔을 가지는 것이 축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임(15:29). 말씀은 Audio로 듣는 것보다 직접 대면하여 듣는 Live가 최고이며 Live의 생생함은 가장 좋은 Audio 20배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음.

·         기도의 요청내용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기도와 성령의 기도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듯이 여러분과 나의 기도가 하나되어 힘을 발휘해 달라는 것임(15:30). 둘째로, 목숨을 걸고 가는 예루살렘 입성에 구원함이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임(15:31). 셋째로, 로마에 가서 여러분들을 무사히 만날 수 있도록 끝까지 기도해 달라는 내용임. 그러나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①하나님의 뜻을 쫓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15:32), ②평강의 하나님이 늘 함께 계시도록 하는 것임을(15:33) 바울이 잊지 아니하고 기술하고 있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