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사야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등장하는 공의로운 메시아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들을 미리 보고서 여호와를 찬양하다”(사11:1-12:6)
설교일; 주후 2026년 6월 2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5년 7월 3일 목요일 작성)
흔히들 주전 8세기에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고 있는 대선지서는 선지서 중의 선지서이며 그 구성이 참으로 신비롭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총 6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선지서 이사야의 전반부인 제1-39장은 구약적인 모습으로 서술되어 있고 후반부인 제40-66장은 신약적인 모습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읽고 있는 성경 66권 가운데 구약이 39권이고 신약이 27권인 것과 흡사합니다. 게다가 이사야 제39장 말미에서는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제13대왕인 히스기야의 너무나 이기적이고 현세주의적인 진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수명연장 15년의 은혜와 백척간두에 서있는 유대왕국을 구원하여 주는 여호와의 은혜를 체험한 히스기야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신앙을 회복하거나 그 옛날 여호와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대왕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와 유대왕국의 군사력으로 강대국 앗수르를 물리쳤다는 터무니 없는 자랑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더구나 히스기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윗왕조의 국왕인 히스기야 자신이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면 그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는 그러한 가벼운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독하게 이기적이며 현세적인 탐욕을 너무나 손쉽게 이루고자 하는 일종의 우상 문화인 것입니다.
이사야 제39장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 그 대목의 글을 읽다가 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마침내 조국 다윗왕조 유대왕국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고 오로지 창조주 여호와께서 신위적인 능력으로 베푸시는 대속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이사야의 뒤를 잇고 있는 유대왕국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의 선지서에서 ‘새 언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렘31:33). 그런데 오늘의 본문 이사야 제11장과 제12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벌써 ‘새 언약의 시대’를 감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깨달음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지난 주에 강해 설교한 이사야 제10장과 오늘의 본문 이사야 제11-12장의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이사야 제10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선민의 나라이거나 이방인의 나라이거나 상관없이 권력자들이 입법, 사법, 행정과정에서 정의가 아니라 부정을 제도적으로 행하고 약자의 권리를 짓밟고 고아와 과부의 재산을 약탈하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율법의 취지에 따라 그 나라를 없애 버리신다는 것입니다(사10:1-4, 출22:22-24).
2) 둘, 여호와의 진노는 자신의 백성으로 삼은 선민의 나라에 먼저 임하게 됩니다. 그 결과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왕국이 앗수르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주전 586년에는 그 뒤를 이어 남조 다윗왕조 유대왕국마저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사라지고 맙니다(사10:5-6, 20, 28-32).
3) 셋, 그런데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은 선민의 나라를 멸망하는데 도구로 사용한 앗수르와 신바벨론에게 향하게 됩니다.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기며 제국의 영광과 군사력에 의한 지배체제의 강화만을 추구하게 되면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사10:7-19, 24-27). 그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땅끝까지 이르게 됩니다(사10:23, 33-34, 렘25:29).
4) 넷, 여호와는 강대국으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며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출애굽 해방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들 가운데 여호와신앙을 파수하는 남은 자들이 고토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사10:20-22). 그 수가 포로로 끌려간 백성의 수에 비하여 1할이 채 되지 못할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가 명심하여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사6:13);
(2) 둘째, 그런데 훗날의 역사를 참조하면 예루살렘 제2성전이 주후 70년에 로마 원정군의 공격으로 모조리 불타고 허물어지고 맙니다. 일찍이 주전 538년경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고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다시 타락하였기에 그러한 결과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들 유대인들이 다윗왕조를 재건하지 못하고 제국의 속국의 백성으로 오래 살아가다가 마침내 로마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유민들이 가나안 땅에서 다시 축출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이사야가 소망하고 있는 그리스도 메시아의 오심과 성령님의 강림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성도들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짊어진 죄와 사망의 멍에를 완전히 벗고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요?(사10:27). 그에 대한 대답이 사실은 이사야 제11-12장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3) 셋째, 오늘의 본문 이사야 제11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주 그리스도가 이새의 줄기에서 나타난 싹이며 그 뿌리에서 가지가 뻗어서 결실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사11:1). 다윗대왕의 부친인 이새의 집안은 그 족보가 특이합니다. 이방여인 3명이 그들의 조상으로 등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마1:3-5). 그러므로 이새의 줄기라고 하는 의미는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모두 소망하고 있는 구원주 메시아가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새의 족보의 뿌리는 의사 누가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그 근원적인 조상이 아담이요 그 위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눅3:38).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구원주 그리스도가 보냄을 받고 오신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사11:2).
2) 둘, 창조주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선민과 이방인 구별하지 아니하고(사11:3) 만민을 구원하도록 복음사역을 하시는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구현할 것입니다(사11:4-5). 서로가 정의의 전쟁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소위 집단과 집단사이의 투쟁과 분쟁을 종식시키며 모두를 살리는 대안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선을 보인 이른바 자기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으로 제시하십니다(사11:6-8). 그것이 바로 영생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하는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구원의 방법론이며(사11:9)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사11:10).
3) 셋,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온 그리스도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을 외치게 되면 선민은 물론 이방인까지 메시아의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달려오게 됩니다(사11:10-14). 그것을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들이 이해하기 쉽게 출애굽 해방과 출바벨론 해방에 이어서 발생하고 있는 여호와의 영생의 부르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사11:15-16).
(4) 넷째, 선지자 이사야는 출애굽 해방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자손들이나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놓임을 받고 고토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제2성전을 짓고 율법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나 모두 여호와신앙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1) 그 이유는 애초에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지혜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는 율법을 준수하는 척 꾸밀 수가 있지만(마23:13-28) 그 중심인 내면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영적인 눈을 피조물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사29:13, 창4:7-12, 삼상16:7, 히4:13).
2) 그러므로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신 능력이 함께하여야 합니다(창17:1). 그 방법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에 스스로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성도는 누구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3) 그에 따라 성도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고(눅24:49, 행1:8, 2:1-4, 10:44-4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해방하는 영적인 충만함을 체험하게 됩니다(롬8:1-2).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여호와의 종인 성도들이 거듭난 인생 가운데 얻고 있는 영적인 삶입니다(롬8:3-4). 그와 같은 놀라운 새로운 창조를 허락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지자 이사야가 우리 성도들을 대신하여 제12장에서 힘껏 찬양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하여 구절풀이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차제에 아울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이새의 줄기라고 하는 의미는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모두 소망하고 있는 구원주 메시아가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임, 마1:3-5. 그리고 이새의 족보의 뿌리는 의사 누가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그 근원적인 조상이 아담이요 그 위는 여호와 하나님이심(눅3:38).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구원주 그리스도가 보냄을 받고 오신다는 의미라고 하겠음, 사11:2), 2. 그(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요1:14a)의 위에 여호와의 영(비둘기 모양으로 그리스도에게 강림하여 임재하시는 성령님, 요1:14b, 32. 또는 성도들에게 임하게 되는 보혜사 성령님을 말함, 요14:16)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영적인 총명함을 말함, 요1:14c),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이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의 경륜을 말함, 요5:19),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비록 여호와의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지만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있으므로 인자 곧 여호와의 종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 사52:13-53:11, 요1:16-18, 29, 3:13-17), 3. 그가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창22:12-14),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이기적이며 편파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정의(justice)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4.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여호와 앞에 서는, 창17:1)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여호와의 말씀으로, 마4:4-11)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여호와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십자가로 이 세상의 임금을 심판할 것임, 마12:28, 28:18-20, 요12:31-32),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자기를 부인하며, 마16:24a),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자기 십자가를 지고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감, 마16:24b, 요21:18). 6. 그 때(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때)에 (가축을 공격하여 잡아 먹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먹잇감인) 송아지와 (사냥꾼인)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들이 여호와의 뜻에 따라 그들을 주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다스리며, 창1:26-27, 31),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그 옛날 노아의 방주를 다시 보는 것과 같음, 창6:18-22, 7:7-16),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막16:18).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모든 생명을 살리고 영생으로 돌보고자 하는 창조주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그리스도가 건설하는 그 나라에서 성도들이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임, 마28:18-20, 눅22:28-30)”(사11:1-9); 그리스도의 사명과 역할을 먼저 말한 다음에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이새의 줄기라고 하는 의미는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모두 소망하고 있는 구원주 메시아가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임, 마1:3-5. 그리고 이새의 족보의 뿌리는 의사 누가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그 근원적인 조상이 아담이요 그 위는 여호와 하나님이심(눅3:38).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구원주 그리스도가 보냄을 받고 오신다는 의미라고 하겠음, 사11:2), 2. 그(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요1:14a)의 위에 여호와의 영(비둘기 모양으로 그리스도에게 강림하여 임재하시는 성령님, 요1:14b, 32. 또는 성도들에게 임하게 되는 보혜사 성령님을 말함, 요14:16)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영적인 총명함을 말함, 요1:14c),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이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의 경륜을 말함, 요5:19),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비록 여호와의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지만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있으므로 인자 곧 여호와의 종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 사52:13-53:11, 요1:16-18, 29, 3:13-17), 3. 그가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창22:12-14),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이기적이며 편파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정의(justice)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4.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여호와 앞에 서는, 창17:1)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여호와의 말씀으로, 마4:4-11)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여호와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십자가로 이 세상의 임금을 심판할 것임, 마12:28, 28:18-20, 요12:31-32),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자기를 부인하며, 마16:24a),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자기 십자가를 지고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감, 마16:24b, 요21:18)”(사11:1-5);
1)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 제6장에서 웃시야 왕이 죽던 해 곧 주전 739년경에 자신이 여호와에 의하여 동족인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사6:1-8). 그때 그는 자신이 동족들인 선민 유대인들에게 전달하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의 뜻을 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사6:9-12).
2) 그 이유는 선민 유대인들이 창조주 여호와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세적인 소원성취를 위하여 도움을 주는 수호신이나 우상의 하나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사39:8). 그러므로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창12:1-5)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고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 살아가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혀 실천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출19:4-6).
3) 그에 따라 선민 유대인들이 비록 육체의 할례를 받으며 절기를 쫓아 예루살렘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고 그들의 속마음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탐욕과 정욕으로 꿈틀거리고 있을 따름입니다(사29:13). 그러한 모습은 그 옛날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원주민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창15:16, 왕하21:11). 그에 따라 타락한 선민 유대인들의 다윗왕조마저 그 땅에서 멸망을 당하고 유민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4) 그렇다면 언제 적군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 땅에서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통하여 1할이 채 못되는 남은 자들이 고토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선민에게 바라시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의무 이행 곧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의 실천은 요원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사6:13).
5) 그와 같은 측면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10지파의 북조 이스라엘왕국이 먼저 앗수르제국의 침입으로 주전 722년에 멸망을 당하고 유민들이 앗수르 변방으로 끌려가서 선민의 자취가 사라질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왕국을 닮아가고 있는 다윗왕조의 유대왕국의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군대를 불러서 주전 586년에 멸망을 당하고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맙니다.
6) 그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동일한 죄악을 범하고 있는 이방나라들을 모조리 심판하십니다. 그러한 내용을 선지자 이사야는 제10장에서 거듭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이 세상이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온전한 여호와신앙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여호와로부터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만민구원과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7) 그 해답을 선지자 이사야가 제11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속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함께 영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사야의 뒤를 잇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훗날 그의 선지서에서 그것을 ‘새 언약’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렘31:33). 그와 같은 새 언약의 시대를 허락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 제12장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8) 본문 제1절에서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조상 가운데는 이방인 출신 여인이 3명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새의 자손은 선민과 이방인을 모두 조상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치에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는 선민과 이방인 모두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구원주이십니다. 그리고 ‘이새의 뿌리’는 누가복음 제3장에 수록되어 있는 족보를 참조하면 그 시조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눅3:38).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와서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하나님나라로 인도할 구원주인 것입니다.
9)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와서 공생애를 통하여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마침내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십니다. 그것이 만민을 영생으로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에 따라 무덤에서 그리스도가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승천하십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은 동일한 부활과 영생의 상급을 얻게 될 것입니다(창15:1, 요8:56, 눅22:28-30, 히11:16, 26, 고전15:23).
10) 그와 같은 진리를 보혜사 성령님이 성도들의 심령속에 임재하여 깨닫고 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동행하십니다(요14:16-20). 그러한 측면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정체와 복음사역의 특징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습니다; ①하나, 그리스도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고 있으며(2a)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지혜와 경륜이 있습니다(2b). 그러나 그는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의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스스로 인자(人子, son of man)라고 부르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종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2c).
11) ②둘, 그리스도는 육신에 깃들어 있는 이기적인 사랑과 집단 이기적인 정의의 구현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모든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하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합니다(3절). 아버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합치되는 진리를 선포하다가(요1:17-18)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그리스도이기에 그가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천하의 권세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4절, 마28:18-20).
12) ③셋, 인자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처럼 그의 제자인 성도들도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며 신실하게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5절, 마16:24). ④넷,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 옛날 노아의 시대에 방주 구원을 얻게 되는 피조물처럼 여호와가 창조하는 새로운 세상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6-9a, 눅22:28-30). ⑤다섯, 그와 같은 천국이 도래할 것이며 그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성도들의 마음을 지배할 것입니다(9절, 사65:17-18).
(2) “6. 그때(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때)에 (가축을 공격하여 잡아 먹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먹잇감인) 송아지와 (사냥꾼인)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들이 여호와의 뜻에 따라 그들을 주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다스리며, 창1:26-27, 31),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그 옛날 노아의 방주를 다시 보는 것과 같음, 창6:18-22, 7:7-16),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막16:18).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모든 생명을 살리고 영생으로 돌보고자 하는 창조주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그리스도가 건설하는 그 나라에서 성도들이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임, 마28:18-20, 눅22:28-30)”(사11:6-9);
1) 선지자 이사야가 두가지를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거듭난 인생 가운데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간 후 마침내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적인 삶이나 약육강식의 법칙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만민과 만물이 평화 공존할 수 있는 그러한 전혀 새로운 세상입니다(6-9a). 그 점을 선지자 이사야가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제65장 제17-25절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또 하나는, 동물과 사람이 평화공존하고 힘이 세고 무서운 짐승들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지 아니하는 그러한 이상세계는 노아 홍수 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죄 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룩할 수가 없습니다(창9:1-7, 10:8-12, 11:4-9). 그러므로 그러한 이상적인 세상은 오로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새로운 창조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창17:1). 그와 같은 전능하신 여호와의 능력이 모든 짐승의 야생적인 본능을 제어하고 있는 모습을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제7장 노아의 방주에서 한시적으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창7:7-16).
3) 그리고 영구적인 그러한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과 어린양 그리스도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접 통치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성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계21:1-8, 26-27, 22:1-5). 요컨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새로운 세상이 바로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구원하여 영생으로 맞아들이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9b, 요5:24-29).
둘째로,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눅3:38) 한 싹이 나서(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요1:14-15) 만민의(만민구원의) 기치(깃발)로 설 것이요(요1:16-18),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만민구원이 성취될 것이므로), 그가 거한 곳이(주님이 성령님과 함께 거하는 성도들의 나라가) 영화로우리라(단7:14, 18, 27). 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구원의) 손을 (선민과 이방인 모든 백성들에게) 펴사(사65:1-2), 그의 (끝까지 여호와신앙을 지키려는) 남은 백성을 (포로로 끌려간) 앗수르와 (피난을 간) 애굽과 (온세상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 곧) 바드로스(상이집트이며 유대인들의 마지막 피난처임, 렘44:15)와 구스(이디오피아, 왕하19:9)와 엘람(창10:22, 바사로 지명이 바뀜, 페르시아의 발상지)과 시날(창10:10,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이며 갈대아인의 우르로 지명이 바뀜, 창11:31)과 하맛(페니키아와 시리아의 접경지역에 있는 큰 성읍)과 바다 섬들(지중해에 흩어져 있는 먼 나라들을 말함)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2.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라는) 기치를 세우시고 (열방의 이방인들을 불러모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북조 이스라엘왕국의 멸망으로 앗수르 변방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들을) 모으시며 (멸망한 신바벨론제국의)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13. 에브라임의(남조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향한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신바벨론제국은 멸망하였으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유대왕국의 유민들 역시 이스라엘왕국의 유민들을 더 이상 괄시하지 아니할 것임, 눅9:52-55, 요4:9), 14.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선민 출신들이 블레셋 사람과 제휴하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언뜻 보면, 이스라엘제국의 회복으로 보임, 그러나 주님의 역사로 메시아의 나라가 온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새겨볼 수 있음). 15.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홍해)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애굽과 앗수르를 기업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세상에 펴져 나갈 것임, 사19:21-25).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출애굽 해방에 이어 주님께서 모든 백성을 제국의 압제에서 구원하며 영생구원의 새 시대를 여실 것임, 사65:17-18, 19:21-25)”(사11:10-16); 선지자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루게 되는 신앙공동체의 특징을 각각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눅3:38) 한 싹이 나서(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요1:14-15) 만민의(만민구원의) 기치(깃발)로 설 것이요(요1:16-18),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만민구원이 성취될 것이므로), 그가 거한 곳이(주님이 성령님과 함께 거하는 성도들의 나라가) 영화로우리라(단7:14, 18, 27). 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구원의) 손을 (선민과 이방인 모든 백성들에게) 펴사(사65:1-2), 그의 (끝까지 여호와신앙을 지키려는) 남은 백성을 (포로로 끌려간) 앗수르와 (피난을 간) 애굽과 (온세상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 곧) 바드로스(상이집트이며 유대인들의 마지막 피난처임, 렘44:15)와 구스(이디오피아, 왕하19:9)와 엘람(창10:22, 바사로 지명이 바뀜, 페르시아의 발상지)과 시날(창10:10,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이며 갈대아인의 우르로 지명이 바뀜, 창11:31)과 하맛(페니키아와 시리아의 접경지역에 있는 큰 성읍)과 바다 섬들(지중해에 흩어져 있는 먼 나라들을 말함)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2.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라는) 기치를 세우시고 (열방의 이방인들을 불러모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북조 이스라엘왕국의 멸망으로 앗수르 변방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들을) 모으시며 (멸망한 신바벨론제국의)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사11:10-12); 그리스도의 복음이 메시아의 나라를 건설하는 방법이 된다는 사실을 선지자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사11:1, 10-12);
1) 첫째, 가장 먼저 이사야는 메시아의 삶의 뿌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11:1b)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메시아가 자신의 삶의 뿌리를 하나님 아버지에게 뻗어서 그 영적인 자양분을 빨아올림으로 말미암아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눅3:38).
2) 사실 “1. 이새의 줄기에서”(사11:1a) 메시아가 나타나는 것은 선민 유대인들이 동의하고 있는 평범한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이새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 중의 하나가 다윗의 왕가를 이루기 때문에 굉장히 훌륭한 족보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계인 7명의 형들과 2명 이상의 누나들의 가계를 보면 그렇게 위대한 족보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3) 더구나 이새와 다윗의 시대는 주전 11세기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천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주전 6세기에 이미 다윗의 왕조는 끝장이 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아가 오신다고 하여 여전히 살아있는 왕가의 후계자라거나 다윗 대왕의 뒤를 이어 당연히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무리이며 현실감이 상당히 떨어지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4)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대목은 메시아가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방법론을 전부 하나님 아버지에게 묻고서 그 답을 얻어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뻗어 있기에 메시아의 믿음이 성장하고 이른 바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들도 메시아처럼 믿음의 뿌리를 아버지 하나님께 뻗어서 성장하게 되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5) 둘째, 이사야는 메시아가 만민을 하나님께로 끌어 모으는 깃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10.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할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10). 선민우월주의에 젖어 있는 유대인 사회에서 그와 어울리지 아니하게 메시아는 만민구원사상을 복음으로 전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문에 유대교의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십자가의 제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6) 그러나 그의 부활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은 만민과 열방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과 재창조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오게 됨으로 이사야는 메시아가 걸어가는 인생길이 영화로운 것이라고 여기서 예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7) 셋째, 이어서 이사야는 “11. 그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사11:11)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이 상당히 특이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 메시아의 사역과 다른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사역과 달리 하나님께서 다시 손을 펴시고 남은 백성들을 온 세상에서 끌어 모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맡아서 집행하고 있는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8) 둘, 하나님의 영이 메시아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큰 일을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손을 펴셔서 이제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메시아의 승리의 소식을 이방세계 땅끝까지 전하며 하나님신앙으로 돌아오는 자들을 끌어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것입니다. 그에 따라 선민들만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을 독점하던 시대는 완전히 끝나고 맙니다.
9) 셋, 이제는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희생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훗날의 역사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승천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사역은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받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초대교회의 시대를 이사야가 미리 내다보고서 추상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10) 넷째, 먼 훗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방 땅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천국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민 유대인들은 장차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선지자 이사야의 관심이 이제는 동족들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사라진 북조 이스라엘왕국에 참여한 이스라엘 10지파에 대한 관심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훗날 이방인 사도로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사도 바울의 마음 속 소원을 미리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롬9:1-5).
11) 그 대목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12.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사11:12). 한 마디로, 메시아를 통하여 만민과 열방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그때에 마지막으로 선민들의 구원을 추진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은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유민이 된 10지파의 후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2) 그리고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멸망과 더불어 유대인들 역시 온 세상에 흩어질 것입니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끌어 모으시겠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훗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사6:9-13).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사59:19-21)”(롬11:25-26a).
(2) “13. 에브라임의(남조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향한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신바벨론제국은 멸망하였으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유대왕국의 유민들 역시 이스라엘왕국의 유민들을 더 이상 괄시하지 아니할 것임, 눅9:52-55, 요4:9), 14.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선민 출신들이 블레셋 사람과 제휴하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언뜻 보면, 이스라엘제국의 회복으로 보임, 그러나 주님의 역사로 메시아의 나라가 온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새겨볼 수 있음). 15.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홍해)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애굽과 앗수르를 기업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세상에 펴져 나갈 것임, 사19:21-25).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출애굽 해방에 이어 주님께서 모든 백성을 제국의 압제에서 구원하며 영생구원의 새 시대를 여실 것임, 사65:17-18, 19:21-25)”(사11:13-16);
1)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 곧 ‘마5:43-48절’ 말씀과 깊이 관련되고 있는 대목입니다. 동시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발생 및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방향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의 나라라고 자부하고 있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과 남조 유다 왕국이 차례대로 망하고 그 백성들이 이방세계에 유민이 되어 오랜 세월 떠돌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사9:8-10:4).
2) 그리고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 만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하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사11:10-11). 그 마지막에 선민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또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사11:12). 그 다음에 이제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하나, 먼저 새로 형성되는 선민들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사11:13).
3) ②둘,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따르고 있는 백성들이 주변의 이방인들을 어떻게 복속하여 나갈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사11:14). ③셋, 이사야는 선민들을 괴롭힌 그 옛날 애굽과 당장의 앗수르를 징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장차 그들의 선례를 따르고 있는 나라들에게 다시 임할 것이라고 종말론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사11:15-16). 그러한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함께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4) 첫째, “13.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사11:13); 이사야는 ‘질투’와 ‘괴롭게 함’이라고 하는 두 가지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가 서로 질투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서로를 괴롭히는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사11:13a).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성경적으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5) ‘질투’라고 하는 것이 형제의 살인사건을 일으키고 있는 주범입니다. 카인이 범한 인류최초의 살인사건의 동기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에 대하여 창세기가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정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카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카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4:3-8).
6) 시기와 질투 때문에 형제간 죽이고자 하는 일은 야곱의 집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아들들 사이가 그러합니다. 열명의 이복 형들이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합니다. 도중에 마음을 바꾸어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상단에 노예로 팔아버립니다(창37:4, 11, 20, 28). 그 일이 집단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 사이의 반목과 전쟁의 역사입니다. 특히 아하스 왕의 시대가 되면 북조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이방민족인 아람과 연합하여 형제국가인 남조 유다 왕국을 침입하게 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습니다(왕하16:5, 사7:1).
7) 둘째, 선민간에 서로 질투하고 전쟁을 벌이는 역사가 언제 끝나게 될까요? 이사야는 당장 북조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멸망 당하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100년 남짓 지나서 남조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 미래 역시 예지하고 있습니다. 형제국가 사이에 서로 질시하고 골육상쟁의 역사를 전개하였기에 그 결과가 모두 멸망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사11:13b).
8) 풀이를 해보자면,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진 제사장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유민들은 이방 땅에 흩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손들은 더 이상 서로를 질투하거나 전쟁을 벌이지 아니합니다. 메시아의 나라에서 함께 사랑하며 한 마음이 되어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혈통적인 의미의 선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요1:12-13). 진정한 민족의 통일과 화목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롬5:10-11).
9) 셋째, “14.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사11:14); 질시와 전쟁의 역사를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어 만민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이 가는 그 앞길을 막아 서고 있는 세력들이 그 옛날처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세력을 이사야는 익숙한 용어 “블레셋,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 등”(사11:14)이라고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하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역사섭리에 의하여 철저하게 굴욕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마28:18, 엡1:21-23).
10) 넷째, “15.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사11:15-16); 출애굽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바깥으로 내보내라는 메시지를 모세를 통하여 전했지만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끝까지 거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이 임합니다.
11) 마침내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마지막 고비가 하나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오고 있는데 그 앞을 홍해바다가 막고 있는 것입니다(출14:9-10). 그러자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동풍으로 그 바닥을 말리십니다(출14:21). 그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출14:22). 물론 바다 속까지 추격을 해오던 애굽의 군대는 전부 수장을 당하고 맙니다(출14:23-28). 그러한 구원의 역사가 약간 다른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재현이 될 것이라고 본문에서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12) 이제는 더 이상 바다를 갈라 길을 만들고 다시 물이 흘러 바다가 되도록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말은 한번의 역사로 끝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아예 더 이상 바다가 복음사역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지 아니하도록 완전히 조치하실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뜨거운 바람으로 장애가 되는 바다와 강을 말려 버리시는 것입니다(계21:1). 그러면 복음사역자가 신을 신고 바다와 강을 편히 건너갈 수 있게 됩니다. 장애물을 극복하고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이 충분하게 여러 가지로 제시가 된다는 뜻으로 이사야가 ‘일곱 갈래’라는 용어까지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사11:15).
13) 다음으로 이사야는 ‘구원의 대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사11:16). 언뜻 보면, 그 옛날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비롯한 많은 족속들이 애굽을 떠나서 행진해 나오고 있는 그 큰 길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출12:37-38). 그 큰 길에 합류하는 자는 모두 애굽의 지배를 벗어나서 자유민이 됩니다. 그런데 같은 이사야의 글 제19장 말미를 참조하게 되면 또 다른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23. 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 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19:23-25).
14) 풀이를 해보자면, 제사장나라가 멸망을 당할 때에 그 백성들이 도망을 치거나 또는 끌려가서 여러 이방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끝까지 하나님신앙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소위 ‘남은 자’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백성들이 이방세계에서 오랜 세월 하나님신앙을 지키며 살게 됨에 따라 그 선한 영향력이 앗수르나 애굽 땅에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신앙을 얻게 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까지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 여기서 ‘남은 자 사상’이라고 하겠습니다.
15) 특히 메시아가 오신 이후에는 만민구원의 복음이 유다의 지경을 넘어서 조직적으로 이웃나라로 전파가 됩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이방선교의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 애굽과 앗수르의 땅이 대표적으로 선교의 기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애굽에 곱틱 교회가 성립이 되고 알렉산드리아가 신학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리고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가 이방선교의 가장 큰 기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행13:1-3). 따라서 이사야가 그와 같은 미래를 바라보고서 여기서 ‘구원의 대로’가 이스라엘, 애굽, 앗수르 땅(시리아)에 열릴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1. 그 날(대속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은 날)에 네(남은 자)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임마누엘의 은혜로 함께하시므로, 마28:18-20, 창12:3)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주께 감사하며 거듭난 삶을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임, 행1:8, 살전5:16-18) 할 것이니라.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나의 생명의 시작이며 내가 돌아갈 천성의 주인이심, 엡1:4, 히11:16). 내가 신뢰하고 (여호와의 임마누엘의 은혜로, 마28:20) 두려움이 없으리니(사41:10),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요4:1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수).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새 언약의 약속 그대로 대속자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렘31:33, 요3:13-17, 14:16-20, 눅24:49)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주님의 제자가 되어 지상명령을 실천하라는 것임, 마28:18-20).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보내어 주심)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사52:7, 구원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는 성도의 아름다운 발). 6. 시온의 주민아(세상의 포로에서 주님께 돌아온 성도들아, 롬8:1-2)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구원받은 성도들로부터 영원히 찬양을 받으시는 것을 말함, 계4:10-11) 할 것이니라”(사12:1-6);
1) 첫째,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을 부르고 있는 이유부터 살펴보겠습니다(사12:1-3, 엡2:1-10). 이사야는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이유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절을 살펴보면서 함께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하나, “1. 그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12:1);
2) 주전 739년경 유다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높은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뵙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사1:1, 6:1).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 받아 동족들에게 전하게 됩니다(사6:8-13).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조국과 이웃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가 깨달은 내용을 전하면서 그것을 후세를 위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이 ‘대선지서 이사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이사야가 선지자로서 세상에 전하고 있는 많은 내용들을 요약해보면 위의 글 곧 다음의 내용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①우리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진노의 자식들 곧 멸망의 대상들이었다(사12:1a). ②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회개와 용서의 기회를 주셨다(사12:1b). ③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안위(安慰, 안전하게 보호하고 위로)해주시니 그것을 감사할 따름이다(사12:1c). 요컨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멸망의 대상을 구원해주시고 오히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인도하시고 돌보아 주시니 그 은혜가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린다는 것입니다”.
4)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 내용은 한마디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해주고 새로운 선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 가운데에는 다음 사실이 미흡합니다; ①자신에 대한 구원의 성격이 강합니다. 따라서 온 세상에 대한 구원의 내용이 미흡합니다. ②이 세상에서의 안위에 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에까지 이르는 영원한 구원의 의미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③어떻게 용서하며 어떻게 구원해주실지, 특히 영생을 주시는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이 미흡합니다.
5)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을 보완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훗날 사도 바울의 다음 글을 차제에 함께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1. 그는(예수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10)
6) 둘,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12:2); 하나님께서 진노의 자식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셔서 우리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앞길에 큰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달라져 있는지 몰라도 세상은 별로 달라져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고 있기에 성도들이 하나님에게 계속 감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조금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7) 그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시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려움보다 항상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더 크고 강합니다(롬8:37-39). 성령님의 내주와 역사하심으로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안위하심을 받으며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자는 그와 같은 실제적인 구원의 은혜를 항상 찬송할 수 밖에 없습니다.
8) 훗날 사도 마태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강력하신 보호하심이 어떻게 작동이 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28:18-19), “22. 또 만물을 그의(그리스도 예수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2).
9) 풀이를 해보자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하나님께서 천하의 권세를 주시고 만물을 주관하게 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을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따라서 온 세상의 권세가 모두 그리스도에게 이미 귀속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고 세상을 나아갈 때에 성도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릴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10) 셋,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 선지자 이사야가 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만 하는지 세번째의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구원의 우물들에서 생수를 길어 올리는 기쁨을 주셨기에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 대목은 마치 메시아가 그 신앙의 뿌리를 아버지 하나님께 뻗어서 생명의 능력을 얻는 것과 흡사합니다(사11:1). 선민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한평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목마름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든든히 요기를 한다고 해도 그리고 많은 물을 마신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허기와 갈증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입니다(요4:13). 그러한 끊이지 아니하는 갈증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
11) 그 갈증이 육신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육신이 죽고 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갈증이 더 심하다고 하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영혼이 충만한 기쁨을 얻고 육신적으로도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을 어디서 얻을 수가 있을까요? 그 해답을 얻어야 진정한 감사를 창조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훗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한 대목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12)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가며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을 이기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계21:7). 사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생명수입니다(요4:14, 6:54-55). 그 생명수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기를 원했던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13) 하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복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복음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입니다. 조금 고급스럽게 말한다면, 예수님의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대속의 죽으심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14) 그 두 가지를 깊이 묵상하여 깨달음을 얻어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구원의 샘물을 기쁨으로 평생 동안 퍼 올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세번째의 감사의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의 본뜻을 복음으로 알려주시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인생을 보여주셨다는 그것입니다.
15)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만 하는 이유를 이사야가 더욱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사12:4-5) 특히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사12:6).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대언하고 있는 말씀 가운데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16) 그 지혜는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고 있으며 깊은 진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 지혜의 이치를 깊이 묵상하게 되면 현실을 보는 눈이 놀랍도록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방향성을 상당히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과연 그러한지 간단한 본문 세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 “4.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사12:4); 이 구절은 3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7) ①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를 올려 드려야만 하는(사12:1a) 첫번째 이유를 은연중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라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사12:4b). 피조물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의 이름을 높여 부르며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②여호와 하나님은 천하만물과 만민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들의 삶의 굴곡과 역사를 모두 섭리하고 계시는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그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이 그 이름을 칭송하며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도리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찬양을 올려드리는 감사에 불과합니다.
18) ③이사야를 통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그 다음 구절은 그와 같은 상투적인 감사와 찬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12:3c). 즉, 태초의 창조행위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행하시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한 차원 높은 감사의 조건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주신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12장 제1-3절에 대한 강해에서 이미 설명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19) 다시 한번 간략하게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여호와 하나님께서 멸망의 대상인 백성들을 그대로 심판하는 대신에 용서와 구원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②성령님을 보내어 주셔서 성도들이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③그리스도의 모범을 쫓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뜻을 복음으로 깨달아 기쁨으로 실천할 수 있게 해 주시며 장차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에 입성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셨으니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0) 삼위일체 하나님이 행하신 위와 같은 구원의 역사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사12:4c&d).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그 창조의 역사에 감사하여 찬양을 드리는 것이 당연한 하나님 백성들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주께서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선민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 대하여 구원과 영생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도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도들에게 영적인 삶을 허용해 주시니 그 은혜가 참으로 차고도 넘칩니다. 그러하니 그 크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하심과 덕을 온 세상에 전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21) 둘,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사12:5);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극히 아름다운 일은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 만민과 만물의 구원을 위하여 메시아와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사12:5a, 요3:16, 롬8:15-21). 그러므로 그와 같은 완벽한 구원의 장치를 발동시키신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온 세상이 알도록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2:5b).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 대목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제가 과거형으로 되어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22) 그가 이와 같은 예언을 하고 있는 때는 주전 8세기 후반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사12:5a)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제가 맞지 아니한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이사야가 왜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있을까요? 그 의미는 그 일이 비록 미래에 발생할 일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리고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이미 하나님의 뜻 안에서 확고하게 결정이 된 일이기에 실현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그와 유사한 표현을 훗날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에서도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23) 셋, “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사12:6); 선지자 이사야는 이 대목에서 특히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두가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선민들이 고대하고 있었던 메시아보다 더 크신 구원주를 보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사11:10-11). 또 하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선민구원사상을 고수하고자 만민구원을 부르짖는 메시아를 배척하고 죽였지만 훗날 그 일까지 용서를 해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11:12, 행2:36-42).
24) 장차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를 자신들 선민들만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어준 하나님의 선물로 제한하고자 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으로 크신 분이십니다. 온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그리스도야 말로 유대교인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10:30-39). 그와 같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선지자 이사야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습니다(사9:6, 12:6). 따라서 그의 선지서는 신약적인 복음의 메시지를 상당히 많이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메시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나라를 어떻게 건설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메시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능력을 얻어서 메시아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뿌리를 하나님께 깊이 내려서 무성한 나무로 자라고 그 열매를 얻을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둘째, 만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깃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훗날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사상을 반대하는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구원하는 부활의 아침이 밝아오게 됩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이사야가 의미심장하게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0.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10).
(3) 셋째, 하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할 것입니다(사11:11, 요14:16-20). 그리고 이방인을 구원하는 역사의 끝 무렵에 선민들을 구원하는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사11:12). 참고로, 그와 같이 이사야의 예언을 잘 풀이하고 있는 사도가 훗날의 바울이라고 하겠습니다(롬11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조국과 선민들의 현실을 바라보고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있는 제사장의 나라들 소위 북조 이스라엘과 조국 유다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차례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희망을 얻고 있습니다. 심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아가 나타나시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형제국가 사이에 더 이상 질투와 그로 인한 전쟁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미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가 사라져버린 상태이기에 그 예언은 더이상 혈통적인 선민의 역사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어 만민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는 성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 앞에 더 이상 장애가 되는 홍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다와 강을 말려 버리시고 복음의 대로를 여러 갈래로 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나라 애굽과 앗수르의 백성들 역시 복음을 받아들이며 복음전파의 큰길에 함께 동참할 것입니다(사19:21-25). 그와 같은 놀라운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 한마디로, 본문의 깊은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이사야는 세 가지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1) 첫째, 진노의 자식을 용서하시고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2) 둘째, 남은 인생 가운데 세상을 이길 힘을 계속 공급해주시기 때문입니다.
(3) 셋째,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사야의 표현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리지 아니할 도리가 있겠습니까?(사12:1)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피조물이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더 깊은 감사의 이유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을 통하여 영적인 능력을 부어 주시니 감사의 찬양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특히 동족인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관념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민만의 구원을 고대했던 그들의 아집과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만민구원의 기틀을 마련하신 크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그 옛날 다윗 대왕이나 모세와 같이 선민의 영광을 중동 땅에 드러내는 수준 정도의 정치적 메시아를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온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선민구원사상에 집착하여 메시아를 배척하게 되지만 그것마저도 훗날 용서하고 구원해주실 그리스도이십니다(마12:31-32).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깨닫게 된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4.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사12: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