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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1, AD37-44)(출처; blessing U)

손진길 2024. 5. 21. 16:11

헤롯 아그립바 1(Herod Agrippa 1, AD37-44)(출처; blessing U)

 

1.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다. 헤롯대왕과 하스몬가의 마리암네 사이에 태어난 아들 아리스도볼루스의 아들로서 헤로디아의 동생이다. 그는 키프로스(Cypros) 결혼하여 4남매를 낳았다. 버니게, 마리암네, 드루실라. 아그립바 II세가 그들인데, 두루실라는 유대 총독 벨릭스의 아내가 되었고(24:24), 버니게는 남편이 죽자 오빠인 헤롯 아그립바 II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부인처럼 살았다(25:13).

 

2.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자였다. 그는 헤롯가의 왕자로서 로마에 유학하였으며 돈을 낭비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마침내 그는 많은 빚을 지고 채무자들에게 쫓겨 낙향하였다. 매형인 헤롯 안디바가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 주었으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는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에서 그는 칼리굴라와 교제했는데, 어느 디베료 황제가 물러나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지각없는 말을 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6개월 디베료 황제가 죽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그는 즉시 아그립바를 석방하고 그에게 빌립의 영토를 주고 왕의 칭호를 수여하였다.(AD37), 그가 영토를 돌아보러 팔레스타인에 돌아오자 시기심에 불탄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는 자기도 분봉왕의 칭호를 떼어버리고 왕의 칭호를 얻기위해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재빨리 사자를 로마로 보내 헤롯 안디바를 고발하였으며 결과 안디바는 분봉왕 자리마저 빼앗기고 추방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아그립바는 이렇게 해서 매형과 누나를 몰아내고 마침내 안디바의 영토까지 차지하게 되었다.(AD39)

 

그의 행운은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2 AD41 그가 잠깐 로마에 체류하고 있을 칼리굴라 황제가 암살당하고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가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복잡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현명한 충고 덕분에 두려움을 이기고 원로원을 제압하여 권력을 얻은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에게 총독이 다스리던 유대와 사마리아까지도 영토로 주었다. 이렇게 해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명실상부하게 할아버지 헤롯대왕의 영토를 다시 한번 통일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3. 사도행전 12장에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초기 교회를 핍박한 왕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세베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으며 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자 베드로를 잡아 투옥하고 유월절 후에 죽이려했다. 그날 기적 적으로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 구출되자 진노한 왕은 파수꾼들을 잡아 죽였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AD44년에 가이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는데 누가복음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축제의 번째 날에, 아그립바 왕은 순은으로 침으로 멋진 의복을 입고 새벽에 원형극장으로 들어갔다. 태양 광선이 찬란하게 비치자 옷은 신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반짝임을 바라본 사람들은 기묘한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다. 아첨꾼들은 아그립바 왕을 신이라고 부르면서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왕은 갑자기 엄습한 강한 고통으로 인하여 복부를 움켜잡았다. 왕은 54, 즉위한지 7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xix 8.1) 그가 죽었을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II세는 겨우 17세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에 다시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F. 헤롯 아그립바 II (AD 50-100)

 

1.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갑작스럽게 죽었을 그의 어린 아들 아그립바 2세는 로마에 있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와 친한 글라우디오 황제는 즉시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싶었지만 아직 어려서(17) 영토를 다스리기에는 무리라는 반대를 없이 수용하여 다시 쿠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후에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글라우디오 황제에게 빌립의 영토를 물려받았다. AD 54 황제가 네로는 아그립바 2 에게 갈릴리 주변의 땅을 추가해 주었다.

 

아그립바 2세는 유대에 파견된 총독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종교 문제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총독 베스도는 헤롯 아그립바 2세에게 바울문제를 상의하였다(25:26). AD 70 유대 전쟁시 아그립바 2세는 로마를 지지하였으며 로마 황제가 네로(AD54-68), 갈바(Galba, 68),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 티투스(Titus.97-81) 바뀌는 동안 충성을 맹세하여 계속 좋은 관계를 맺고 영토를 보전하였다. 그는 AD 100년경에 죽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헤롯 왕조도 막을 내렸다.

 

2. 헤롯 아그립바 2세의 사생활은 건전하지 못한 같다. 그에게는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지만 확실치 않고 여동생 버니게는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았다.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도 그는 버니게와 함께 있었다(25:23)

 

3. AD 60년경 어느 아그립바는 세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을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가서 여러 날을 묵었다(25:12,13).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자문을 구하자 아그립바 왕은 바울을 보고 싶어 했다. 바울은 헤롯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앞에 섰다. 바울은 아그립바 2세가 유대인의 모든 풍습과 문제들을 알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그런 앞에 변명하게 것을 다행히 여긴다고 말한다(26:2,3). 바울의 논리정연한 말에 당황한 아그립바 2세는 네가 적은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6:28). 라고 말하였다. 아그립바는 그의 호기심은 채웠으나 구원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방탕하게 살았던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알아야 포인트

신약에 나오는 헤롯은 같은 인물이 아니다. 신약에 나오는 헤롯이란 이름은 무려 7명에 달한다. 그러므로 헤롯이란 이름을 구분치 않으면 헤롯이란 이름 때문에 성경 해석에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수의 탄생 당시에는 헤롯 대왕이 왕이었고 후에 그의 아들 3명과(아켈라오, 안디바, 빌립) 그의 손자 1(헤롯 아그립바 1) 그리고 증손자 1(헤롯 아그립바 2) 등장하여 다른 역할들을 수행하였다. 이제 성경을 볼때 구분하여 혼란이 없기를 바란다.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닌왕을 인정하지않고 항상 말성을 부렸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원하는 성전을 복구함으로 정통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옛날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했던 하나님의 성전을 주전 20년경에 시작하여 64년경에 이르러 새롭게 완성시켰다. 예수님이 출입하셨던 성전은 바로 헤롯이 건설 중에 있었던 성전이었으며 예수님은 성전의 완공을 보지 못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 짓는 성전을보고 "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 우리는 말씀하심을 기억해야한다.

 

우리가 세우는 예수님의 성전을 누가 만들고 있는지를 바로알기를 바란다.겉만 번듯한 성전이냐? 주님이 인정하는 성전이냐? 고전 5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가 성전이니라.] 주후 70년경 성전은 돌위에 돌이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