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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석을 남긴 이상근 목사 생애 및 저서 소개

손진길 2024. 5. 13. 04:57

성경주석을 남긴 정류 이상근 목사 생애 약사(略史) 및 주요 저서

 

<생애약사>

1920

3 5(음력) 이상근 목사의 생가인 대구시 중구 인교동 98번지(본관 경주 이씨) 부친 이연우(李淵雨)와 모친 서부잡(徐扶雜, 도울 부, 섞일 잡) 3 2녀의 막내로 태어남

△다섯 살 때 달성동으로 이사

△수창보통학교(초등학교) 입학( 6): 1932년 수창보통학교 졸업

 

1926 5 1일부터 일기 씀

1934 9 18(수요일밤) 15세 때 계성중학교 다니는 친구의 인도로 대구중앙교회에 첫 출석하여 처음 신앙생활 시작함

 

1935

△교회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 기도를 시작 30분 정도 들길을 걸어가서 언덕 위의 나무 아래서 기도(처음 40일 작정 기도 후 60일을 연장하여 100일 기도, 100일 정도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발이 아프기 시작하였으나, 억지로 100일을 채우고 병상에 쓰러짐)

△대구서문교회 출석: 투병생활(17세 무렵) 하면서부터 어머니 따라 신정교회(현 합동측 대구서문교회: 이상근 목사의 모교회) 출석

△평리교회: 병이 나은 후부터 평리동에 초가집을 구하여 어머니와 함께 이사한 후 평리교회 개척에 동참하고 예배에 출석함(담임: 강신창 목사), 이상근 목사는 강신창 목사의 조사(助事) 격으로 일함

 

1940 △대구 동산에 있는 성경학교(대구고등성경학교: 현재 동산성서신학원) 수학

1942 4월 평양신학교(장로회신학대학교 전신) 입학: 평양신학교 입학 후 전검 시험(대학입학 검정고시) 합격

1944

1 3일 설두상(薛抖祥) 2 2녀 중 차녀 설귀연(薛貴蓮)과 혼인

12 20일 평양신학교 졸업

 

1945 4 11일 목사 안수(평양노회에서 동창생 8명과 함께) - 평양신학교 강사(1945) 평양신학교 종교교육 목사겸, 장대현교회 주일학교담당 부목사(김화식 목사와의 만남, 그에게서 일생 깊이 간직될 감화 받음)

1945~1946 △평양능라도교회에서 목회 - 이후 월남

1946~1948 △칠곡옥계교회(현재 구미옥계교회로 개명: 합동 측)에서 월남 후 목회 2년 반 동안 목회

1948 △대구고등성경학교(현재 동산성서신학원)에서 사역

1948 6~1957 △대구대봉교회 개척하여 목회- 대구 남산교회의 전도 목사로 대봉교회 개척함

 

1955

△대구고등성경학교 교장 취임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수학

5월 미국 뉴욕신학교 대학원 졸업(신학석사 취득)

 

1955~1957 △대구 고등성경학교장 역임

1956 3월 경북노회에서 영남신학교 이사장 피선됨, 그 후 이사회에서 영남신학교 교장 선임됨(1953 12 18일 영남신학교 설립[현 영남신학대학교: 초대 교장 김광수 목사]: 1954 4 12일 영남신학교 개교) 영남신학교 1회 졸업식 후 교장 사임

 

1957 4 3~1991 2 17 △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 (34년간 목회)

1959

5월 미국 달라스신학교 대학원 졸업(신학박사학위 취득)

△경북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

 

1959 10 11~1976 2(17년간△교장 겸 교수로 봉직(그 전후 기간 합하면 영남신학교 이사장 및 교장[30여 년])

1960~1964 △서울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사

1965 3 9일 제 76회 경북노회(대구제일교회)-1966 3 8 78회 노회(남산교회) 경북 노회장으로 봉사

1966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수학

1974 9월 제 5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서울영락교회) 총회장 피선되어 총회장 역임

 

1975 △봄 신약성경 주석 12권 완간(팔공산 산장에서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탈고)

1987 11월 원로원 부지 구입

1993 3 5일 구약성경 주석 15권 완간

1994 3월 경산 원로원 준공예배, 원로원 개원

1999 6 1 80세로 영면(永眠)

 

 

<주요저서>

●신약성서 주해서 12권 완간, 구약성경 주해서 15권 완간

●요한복음강해 등 강해서 및 설교집

●작은복음, 만남의 신앙, 등대가 있는 외딴 섬: 이상근 목사 자서전 외 다수

 

배재욱 교수<영남신학대학교>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의 이상근 목사

내게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난 서슴없이 내 아버지인 이상근 목사라고 답한다.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는 것이 우리의 전통 관념에서는 좀 어긋날지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내가 목사가 되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고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준 분이시기 때문이다.

‘멘토(Mentor)’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오디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나갈 때 그의 사랑하는 아들 텔레마코스를 가장 믿을 만한 친구 멘토에게 맡기고 떠났다. 10년 만에 돌아온 오디세이는 멘토가 왕자의 선생으로, 친구로, 상담자로, 때로는 아버지로 아들을 훌륭한 인재로 성장시킨 것을 발견했다. 멘토가 아버지이며, 스승이며, 친구이며, 상담자라는 뜻이라면 선친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조금도 손색 없는 분이셨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목사님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버틴 적도 없었다. 우리 집은 항상 교회 안뜰에 있는 목사 사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고, 목사가 됐다. 나의 아버지는 평생 한결같이 사신 분이다. 우리 집은 저녁 9시가 한밤중이었다. 아버지가 잠자리에 드신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도 저녁 9시 이후에 집에 들어간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평생 새벽 3시에 일어나셨다. 새벽기도회 시간까지 잠시 글을 쓰신 후 교회에 가셨다가 돌아와 다시 글을 쓰셨다. 아침식사 후 다시 교회에 가셔서 오전 내내 교회에 계셨다. 점심시간에 다시 들어와 식사를 하신 뒤 심방이나 일을 보셨다. 오후에도 특별한 심방이나 일이 없으면 다시 글을 쓰셨다. 이런 아버지의 삶이 내 삶의 규범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으레 사람은 저녁 9시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것인 줄 알았다.

1959년 박사학위를 받고 오신 아버지는 그 해부터 끈기있게 주석집필에 몰두하셨다. 어느 해 여름, 조용한 대구 팔공산 기슭의 여관에서 한 주간의 휴가를 얻으셨다. 우리 형제가 아버지를 만나러 그곳에 갔을 때 아버지는 한 방 가득 책을 펼쳐놓고 글을 쓰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날 가장 많은 양의 작업을 했다며 기분 좋아 하셨다. “오늘 내 평생 글을 제일 많이 썼다. 그런데 원고지 몇 장이나 썼는지 맞춰봐라.” 우리는 맞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오늘 15장을 썼다”고 했다. 종일 책과 씨름하여 쓰는 양이 200자 원고지 15장이 못 됐다. 아버지는 그렇게 매일 쓴 적은 양의 글을 모아 구약과 신약 그리고 외경의 주석을 마치셨다. 오래 전 미국의 어느 신학자에게 물었을 때 세계적으로 신구약과 외경 주석을 다 쓴 분은 내 아버지밖에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오신 뒤 잠시도 목회 현장을 떠나지 않으셨다. 신학교 교수, 학장을 지냈지만 목회를 놓으신 적이 없으셨다. 목회를 해야 신학이 실재적이고 힘이 있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 곁에서 본 아버지는 늘 공부하듯 목회를 하시고 목회하듯 공부를 하셨다. 그래서 나도 늘 “목회는 공부하는 심정으로, 공부는 목회하는 심정으로” 한다. 이런 목회와 학습의 조화를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나는 교회를 섬기면서 겸임교수로 가르치고 글을 쓰기도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게 ‘공부해라’ ‘기도해라’ 같은 잔소리를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나의 목회, 특히 설교와 인격에 대한 충고를 자주 하셨다. “너무 우스개를 많이 하면 사고의 깊이가 없어진다” “설교시간에는 절대로 가족이야기나 다른 목사에 대한 이야기나 정치이야기는 하지 말아라” 등의 충고였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설교를 하고 나면 꼭 설교에 대한 평을 해주셨다.

아버지가 생애 마지막으로 ‘신약성서개론’을 탈고하신 다음 원고를 나에게 주시며 “이 책은 네가 출판해라”라고 하셨다. 며칠 후 아버지는 자리에 누우셨고, 1년여를 투병하셨다. 아버지께서 병상에 계신 1년은 나에게 은혜의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고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 곁을 떠난 후 한 번도 아버지 곁에 있지 못했던 나를 곁에서 지키며 효를 다하게 해주셨다. 병원에서 아버지와 함께 밤을 지내기도 하고, 목욕도 시켜드리고, 온갖 수발을 하는 즐거움을 주신 것이다. 이때 아버지는 “내가 방금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내가 죽기 전에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고 당부하셨다. 아버지는 학습과 기도를 통해 영성을 얻으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일을 멈추시자 대신 신령한 환상으로 영성을 얻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어언 8, 지금도 아버지는 나의 변함없는 멘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