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창세기 제33장의 주제, 인간이란 무엇인가? 야곱을 보라(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1. 29. 23:52

제목; “창세기 제33장의 주제, 인간이란 무엇인가? 야곱을 보라”(33:1-20)

설교일; 주후 202424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30일 화요일 작성)

 

이튿날 해가 뜨자 야곱은 다리를 쩔뚝거리면서 에서를 마중하기 위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33:1). 그런데 야곱은 숙적 에서를 만나기 전에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  본문의 바로 앞에 있는 제32장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그 이야기는 그 앞서 있는 제31장 말미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말씀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앞선 내용을 먼저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벧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서 그에게 강력하게 경고하심으로 말미암아 야반도주한 야곱을 잡아서 문초하고 그의 재산을 모조리 회수하고자 시도한 라반의 계획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31:24, 29). 그 옛날 그랄 평야에 이주한 아브라함의 경우에 비추어보면, 야곱을 잡아서 시시비비를 가리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라반에게 진노하시고 그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등 엄청난 재앙을 내리겠다고 경고하신 것으로 보입니다(20:7, 18).

그에 따라 라반은 두려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향후 자신과 후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도록 길르앗 산에서 야곱과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체결하고자 노력합니다(31:44-53). 야곱이 부친 이삭이 경외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 조약의 체결에 동의하자 라반은 그것에 만족하고서 일행과 함께 하란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31:54-55).   

둘째, 추격자 라반 일행이 사라지자 한숨을 돌린 야곱은 다음 순간 자신이 세상적으로 참으로 부요한 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란에서 얻은 엄청난 재물이 고스란히 자신의 소유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32:5, 10). 또한 그는 22첩으로부터 11아들과 딸 디나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31:43, 30:20-25);

그동안 10일 이상 강행군에 지친 가축 떼를 돌보기 위하여 야곱은 물이 풍부하여 목초가 잘 자라고 있는 얍복 시냇가 들판에서 한동안 머물고 있습니다(32:22-23). 그 다음에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먼저 벧엘로 찾아가서 20년전에 여호와께 서원한 맹세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28:18-22). 그리고 가나안 남부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쌍둥이 형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28:5, 21).

셋째,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서 그와 화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먼저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야곱은 정탐꾼을 멀리 가나안 남부 부친의 집으로 보내어 에서의 행방을 은밀하게 탐지하여 오도록 조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인이며 무장인 에서는 부친의 집을 떠나 처가 동네인 세일산 에돔들에 가서 호위대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탐꾼들이 파악하여 주인 야곱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사해남부에서 지내고 있는 형 에서에게 사자를 보냅니다. 자신이 부자가 되어 있음을 알리고 남행하여 형에게 문안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32:3-5).

넷째, 그러나 사신이 급히 되돌아와서 보고하는 내용을 듣고서 야곱이 경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장인 에서가 4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말을 달려 북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2:6). 야곱은 20년전의 원한을 갚고자 형 에서가 자신을 잡아서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32:7, 11, 27:41).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라반과 헤어지고 이제는 세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야곱은 일순간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재산과 세상적인 꾀를 아무리 동원하여 대비를 철저하게 해보아도 도저히 무인인 형 에서의 군대를 물리치거나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확실한 방책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현실을 깨닫게 된 야곱이 밤새 여호와의 사자가 현신한 그 사람에게 매어 달리면서 부디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을 구원하여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습니다(32:24-26). 그의 간구가 얼마나 절실하였는지 모세는 그 사람과 씨름하여 야곱이 이기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32:25);

야곱은 그날 밤에 천사가 전하여 주는 여호와의 말씀 두가지를 얻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적인 꾀로 살아가는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제는 여호와의 은혜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라는 좋은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32:28). 또 하나는, 여호와의 축복의 말씀을 천사를 통하여 전달받은 것입니다(32:29).

여섯째, 천사는 야곱을 떠나기 전에 그의 환도뼈를 쳐서 절뚝발이로 만들고 있습니다(32:25, 31). 그 의미는 이튿날 아침에 에서가 쳐들어오더라도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망을 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서를 상대하는 일은 전적으로 벧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야곱의 꾀와 재산은 자신과 처자식의 생명을 구원하는 문제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제33장에 들어오게 되면, 야곱은 이튿날 아침에 쩔뚝거리며 얍복 시냇가에 도착한 형 에서를 맞이하게 됩니다(33:1-3). 그러자 여호와의 역사로 놀라운 사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갑자기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맞이하여 엉엉 울면서 그를 포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3:4). 도저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새로운 역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야곱과 그의 처자식의 목숨을 구원하여 주기 위하여 에서의 마음을 신위적으로 돌려 세운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목숨구원의 은혜를 입었으면 그때부터 야곱은 오로지 벧엘에서 서원한 그대로 신실한 여호와신앙인으로 거듭난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를 하고 얍복 시냇가에서 그와 헤어진 야곱의 그 다음 행보는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33:16-20). 그는 여호와의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 있습니다. 물이 풍부하고 목초가 풍성한 얍복 시냇가의 들판에서 오래 가축을 치고자 합니다. 아예 사람이 거처할 을 짓고 가축을 위한 우릿간을 짓고 있기에 그 들판의 이름이 숙곳입니다(33:17).

그 다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벧엘을 향하여 남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가나안의 대도시 세겜을 향하여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33:18). 그 성읍 앞에 오래 살면서 자신의 많은 재물을 사용하여 대도시 세겜의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자 합니다.

따라서 야곱은 거처를 마련하고자 큰 돈을 주고서 추장 세겜의 부친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큰 밭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33:19, 34:2).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벧엘로 찾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서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야곱은 편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만을 위한 편리한 제단을 세겜 앞에 있는 그의 거처에 마련한 것입니다. 그 이름이 야곱만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는 제단이라는 의미의 엘엘로헤이스라엘입니다(33:20);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벧엘의 하나님을 모시는 제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야곱이 서원을 이행하기 위하여 벧엘로 찾아오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35:6-7).

그러므로 여호와의 은혜로 극적으로 형 에서와 화해를 하고 그와 헤어진 야곱의 그 다음 행보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목숨구원을 받았으면 여호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남은 인생을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는 종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창50:20, 출13:1-3, 19:4-6).

그런데 야곱은 자신이 가진 재물을 사용하여 세상의 쾌락과 향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여 그만 세겜으로 달려가고 맙니다. 그것은 그 옛날 이 여호와신앙인 백부 아브라함 부부를 가나안 땅에 남겨둔 채 혼자서 인생의 쾌락을 누리고자 많은 가축을 이끌고 대도시 소돔을 선택하여 훌쩍 떠나버린 것과 같습니다(13:10-13).

그 옛날의 과 마찬가지로 야곱 역시 배은망덕한 행보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 역시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감히 야곱 자신만을 위하여 역사하는 하나의 도구적인 신 곧 우상으로 삼고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램프 속의 거인 지니와 같습니다. 능력이 많은 요정 지니는 자신을 불러서 램프에서 나오게 한 그 사람의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는 종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을 섬기는 잘못된 신앙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때문에 창세기 제34장에서는 이른바 치욕스러운 세겜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마침내 야곱이 다시 살려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 남행하여 벧엘로 가서 제단을 쌓고 애초의 서원을 이행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고 야곱일행이 남행하는 길에 원주민들의 추격을 막아주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35:1-5).

그와 같이 잘못된 길로 가는 배은망덕한 성도를 그래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회개의 마당으로 불러 세우시는 여호와의 용서와 은혜를 야곱의 인생역정에서 뚜렷하게 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야곱이 눈을 들어 (멀리)보니, 에서가 400명의 장정(사병)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라헬두 여종에게 맡기고(여기서는 서열이 분명함),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그런데 막상 에서 일행 앞에 배치하는데 있어서는 야곱이 22첩과 그들의 소생을 어떻게 차별하고 있는지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음. 희생제물로 내놓는 그 순서가 ①여종과 그들의 소생들, ②별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본처 레아와 그녀의 소생들, ③마지막이 애지중지하는 애처 라헬과 그녀의 소생인 요셉인 것임),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7번 땅에 굽히며(그 모습은 항복하는 자의 태도와 같은 것임. 그와 같이 처자식의 목숨이라도 구원하기 위하여 야곱이 필사적임),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 (벧엘의 여호와께서 에서의 마음을 주장하여)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이 대목은 훗날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이복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장면과 같은 것임, 45:1-12).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 그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에서 앞에 세운 순서대로임), 그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그런데 애처 라헬보다 애지중지하는 아들 요셉의 이름을 앞세운 것이 특이함. 그 이유는 라헬보다는 여호와신앙에 있어서 요셉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임)”(33:1-7);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야곱이 눈을 들어 (멀리)보니, 에서가 400명의 장정(사병)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라헬두 여종에게 맡기고(여기서는 서열이 분명함),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그런데 막상 에서 일행 앞에 배치하는데 있어서는 야곱이 22첩과 그들의 소생을 어떻게 차별하고 있는지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음. 희생제물로 내놓는 그 순서가 ①여종과 그들의 소생들, ②별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본처 레아와 그녀의 소생들, ③마지막이 애지중지하는 애처 라헬과 그녀의 소생인 요셉인 것임),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7번 땅에 굽히며(그 모습은 항복하는 자의 태도와 같은 것임. 그와 같이 처자식의 목숨이라도 구원하기 위하여 야곱이 필사적임),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33:1-3);

1)    밤새 홀로 벧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부디 에서의 공격으로부터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을 구원하여 달라고 처절하게 기도한 인물이 야곱입니다(32:24). 그는 여호와의 사자인 천사의 현신의 입을 통하여 기어코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되는 은혜와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축복의 약속을 받아내고 있습니다(32:26-29). 그렇지만 인간적으로는 야곱이 도저히 400명이나 되는 에서의 군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고(32:6-7) 스스로 도망할 수도 없도록 밤사이에 환도뼈를 다쳐서 쩔뚝발이가 되고 있습니다(32:25, 31).

2)    날이 밝아오자 야곱은 재빨리 얍복 시내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처자식과 합류합니다. 눈을 들어 보니 멀리서 400명의 군마가 달려오고 있는지 먼지가 피어 오르고 있습니다(1a). 그때 야곱이 2처 레아와 라헬, 그리고 2첩 빌하와 실바에게 무조건 그들 소생의 자식들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라고 명령합니다(1b). 그 다음에 야곱은 처자식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3무리로 배치합니다(2). 그 배치의 순서가 처자식을 차별하고 있는 야곱의 애정관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3)    한마디로, 전방에 배치할 수록 숙적 에서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희생을 먼저 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배치가 처자식에 대한 야곱의 애정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제1선이 야곱의 애정이 가장 적은 2종과 그녀들의 소생들입니다(2a). ②제2선이 비록 제1부인이지만 야곱의 애정이 적은 레아와 그녀의 소생들입니다(2b). ③제3선 곧 제일 마지막에 배치가 되고 있는 자들이 야곱이 사랑하고 있는 애처 라헬과 그녀의 소생인 요셉입니다(2c). 요컨대, 참으로 사람차별이 심하고 편애가 극심한 미성숙한 인간 야곱이라고 하겠습니다.

4)    그렇지만 처자식을 전부 살리고자 하는 야곱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가장 선봉에 서고 있습니다(3a). 무조건 말을 달려오고 있는 형 에서의 앞에 나아가서 7번이나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무조건 항복하고 적장을 맞이하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행동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무조건 인정하면서 정직하게 그 처벌을 모두 달게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2)  4. (벧엘의 여호와께서 에서의 마음을 주장하여)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이 대목은 훗날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이복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장면과 같은 것임, 45:1-12).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 그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에서 앞에 세운 순서대로임), 그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그런데 애처 라헬보다 애지중지하는 아들 요셉의 이름을 앞세운 것이 특이함. 그 이유는 라헬보다는 여호와신앙에 있어서 요셉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임)”(33:4-7);

1)    7번이나 오체투지를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드디어 에서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3b). 그때 너무나 놀라운 광경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밤새 가슴을 졸이면서 고뇌의 바다를 헤매고 있던 야곱의 절망과 체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2)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은밀하고도 확실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숙적인 에서의 마음과 행동이 180도로 달라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그 옛날의 묵은 원한을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뿐인 형제인 야곱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반기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33:4);

 

3)    야곱이 너무나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 자신을 안고 키스를 하면서 엉엉 울 때에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샘솟고 울음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인생을 97년이나 살면서 이제는 노년의 삶입니다. 77세에 숙적으로 헤어진 그들이 20년이나 지나서 형제상봉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시자 그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져서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를 용납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서로가 이성을 회복합니다. 그때 형 에서가 야곱에게 질문합니다;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33:5a). 그에 대한 야곱의 대답이 인상적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된 처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5b).

5)    그 다음에 야곱이 형 에서에게 가까이 있는 순서대로 처자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차례로 에서에게 나아와서 인사하고 있는 순서가 앞서 배치한 순서 그대로입니다; 첫째가 2여종과 그녀들의 소생들입니다(6). 둘째가 레아와 그녀의 소생들입니다(7a). 그런데 셋째가 라헬과 그녀의 아들인 요셉인데 묘하게도 요셉과 라헬의 이름이 도치가 되어 있습니다(7b).

6)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점은 아무래도 요셉을 자신의 후계자감으로 여기고 있는 야곱의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훗날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37:3)라는 야곱의 지독한 요셉 편애사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32:20,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에서가 일찍 부친 이삭의 재산을 차지하여 벌써 부자 족장임을 드러내고 있는 대목임).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감히 피조물인 인간 형제를 만난 것이 생명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인 여호와를 만난 것과 같다고 하는 아첨이며 망언인 것임. 그와 같이 야곱은 아직도 여호와신앙에 있어서 갈 길이 먼 잔꾀가 많은 소인배 인간인 것임),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에서가 마침내) 받으니라(야곱이 억지로 형 에서에게 뇌물 성격의 예물을 드리는 이유는 그것으로 그 옛날의 잘못을 속해버리고자 하는 속셈임). 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에서는 야곱이 일찍이 사자를 보내어 형을 만나고자 세일산으로 남행하겠다고 말하였으므로 그가 야곱일행과 그 재산을 호위하여 함께 세일산으로 가고자 하는 것임). 13. 야곱이 그(에서)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나의)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그것은 과장된 표현임. 왜냐하면, 지난 10일 동안 야곱은 전속력으로 가축 떼를 몰고서 하란에서 멀리 길르앗 산까지 강행군을 한 경험이 있음. 그러나 그의 가축 떼가 크게 상한 것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임), 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분명히 세일산으로 형 에서를 찾아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대목임. 그러나 야곱은 살아 생전 세일산을 방문한 적이 없음). 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한사코 야곱은 빨리 에서 일행과 완전히 헤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임. 그는 라반의 경우와 같이 형 에서를 생전 다시 대면하지 아니하면 좋겠다는 심보임. 그것은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형 에서보다 야곱이 못난 인간성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임), 16. 이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33:8-16);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32:20,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에서가 일찍 부친 이삭의 재산을 차지하여 벌써 부자 족장임을 드러내고 있는 대목임).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감히 피조물인 인간 형제를 만난 것이 생명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인 여호와를 만난 것과 같다고 하는 아첨이며 망언인 것임. 그와 같이 야곱은 아직도 여호와신앙에 있어서 갈 길이 먼 잔꾀가 많은 소인배 인간인 것임),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에서가 마침내) 받으니라(야곱이 억지로 형 에서에게 뇌물 성격의 예물을 드리는 이유는 그것으로 그 옛날의 잘못을 속해버리고자 하는 속셈임)”(33:8-11);

1)    에서가 야곱의 처자식이 순서대로 나아와서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전부 22첩에 아들 11명과 딸 하나입니다. 참으로 하란에서 동생 야곱이 일가를 이룬 것입니다. 형 에서는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 다음에 비로서 에서가 궁금하여 야곱에게 질문합니다;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33:8a).

2)    차제에 야곱이 솔직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8b). 그의 대답은 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32:20b).

3)    20년 전에 형 에서에게 주어지는 장자에 대한 축복을 부친 이삭을 속여서 가로챈 야곱입니다. 그것 때문에 형 에서가 야곱에 대하여 살의를 품고 있습니다(27:41). 에서는 그 원한을 잊어버리고 편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야곱은 편히 발을 뻗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4)    그러나 야곱의 성급한 판단대로 그 다음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따지고 보면, 벌써 장자인 에서가 노쇠한 부친 이삭의 재산을 거의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33:9).

5)    동생 야곱은 장자에게 주는 축복의 기도만 가로채어 갔지 실제로 부친의 재산을 상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형 에서에게 있어서는 과거 부친의 축복의 기도를 야곱이 가로채어간 일은 세월이 흐르고 보니 아무 소용이 없고 하나의 해퍼닝에 불과한 것입니다.

6)    그렇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뇌물 성격의 예물을 형에게 많이 주고서 오래된 원한을 모조리 해소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형 에서에게 온갖 아첨의 말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뇌물을 받도록 만들고 있습니다(10-11). 더구나 성도의 입장에서는 삼가해야 하는 표현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10b);

7)    일단 형 에서가 야곱의 예물을 모두 받아들이자 그것으로 야곱은 만사형통이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는 외삼촌 라반의 경우와 같이 형 에서를 완전히 떠나가게 만들면 됩니다. 형 에서는 진심으로 동생 야곱과 동행하면서 형제 간에 좋은 시간을 보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필사적으로 형 에서와 헤어지고자 합니다. 그 일이 과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요?...

(2)  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에서는 야곱이 일찍이 사자를 보내어 형을 만나고자 세일산으로 남행하겠다고 말하였으므로 그가 야곱일행과 그 재산을 호위하여 함께 세일산으로 가고자 하는 것임). 13. 야곱이 그(에서)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나의)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그것은 과장된 표현임. 왜냐하면, 지난 10일 동안 야곱은 전속력으로 가축 떼를 몰고서 하란에서 멀리 길르앗 산까지 강행군을 한 경험이 있음. 그러나 그의 가축 떼가 크게 상한 것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임), 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분명히 세일산으로 형 에서를 찾아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대목임. 그러나 야곱은 살아 생전 세일산을 방문한 적이 없음). 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한사코 야곱은 빨리 에서 일행과 완전히 헤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임. 그는 라반의 경우와 같이 형 에서를 생전 다시 대면하지 아니하면 좋겠다는 심보임. 그것은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형 에서보다 야곱이 못난 인간성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임), 16. 이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33:12-16);

1)    야곱과 비교하면 형 에서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무인입니다. 그리고 에서는 포용력이 있으며 형제 간에 우애가 있는 사나이입니다. 따라서 에서는 동생 야곱이 세일산으로 함께 가는 줄 알고서(32:5, 33:14) 호의를 계속 베풀고자 하는 것입니다(12, 15).

2)    사실 요단강 동편 길르앗 땅에서 남하하여 사해 남부 에돔 땅으로 들어가는 길은 광야이며 약탈자들의 습격이 많습니다. 그 점을 알고 있는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의 처자식을 보호해주고자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이 불편합니다.

3)    그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얼른 형 에서의 군대를 떠나 보내고 싶습니다. 그들이 변심하면 힘이 약한 야곱은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는 에서가 거주하고 있는 세일산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혼자서 편하게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4)    그에 따라 야곱이 필사적으로 다음과 같이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형 에서를 떼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13. 야곱이 그(에서)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나의)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그것은 과장된 표현임. 왜냐하면, 지난 10일 동안 야곱은 전속력으로 가축 떼를 몰고서 하란에서 멀리 길르앗 산까지 강행군을 한 경험이 있음. 그러나 그의 가축 떼가 크게 상한 것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임), 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분명히 세일산으로 형 에서를 찾아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대목임. 그러나 야곱은 살아 생전 세일산을 방문한 적이 없음).

5)    따라서 형 에서가 단지 자신의 군사 일부를 야곱에게 호위무사로 붙여주고자 하지만 그 역시 야곱이 간곡하게 물리치고 마는 것입니다(15). 마침내 에서 일행이 완전히 남쪽으로 사라지자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크게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제단을 쌓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결코 부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21:33). 그것이 아직 미숙한 여호와신앙인 야곱의 모습인 것입니다.   

셋째로,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하란이 있는 북부 시리아를 말함)에서부터 평안히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 (12:5-6, 당시 가장 대도시인)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임시 거처인)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성의 젊은 추장인)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100크시타에 샀으며(1마리의 값을 1크시타로 보고 있으며 그것은 비싸야 60만원 정도임. 따라서 100크시타는 6천만원정도로 추산하고 있음. 그리고 그 밭에 훗날 요셉의 무덤이 생기고 있음, 24:32),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그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것임)이라 불렀더라”(17-20); 이 대목 역시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하란이 있는 북부 시리아를 말함)에서부터 평안히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 (12:5-6, 당시 가장 대도시인)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임시 거처인) 장막을 치고”(33:17-18);

1)    형 에서 일행이 모두 말을 타고서 바람과 같이 남쪽으로 사라지고 나자 야곱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습니다(16). 자신이 바란 그대로 숙적 에서가 부하 400명과 함께 마치 먼지와 같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 에서를 대면하는 동안에 야곱은 많은 재물을 뇌물로 사용하여 형 에서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데 성공한 것입니다(10-11). 그러므로 야곱의 양치기 일부가 주인 야곱으로부터 에서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가축 떼를 전부 몰고서 에서 일행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2)    그 많은 가축 떼를 양치기들이 무사히 몰고서 130km이상이나 남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해 남부의 세일산 에돔들로 가야만 합니다. 그 길은 험하고 도적들이 많은 위험한 지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축 떼가 무사히 에돔들에 도착할 수 있도록 형 에서가 데리고 온 사병의 일부가 그 무리를 철저하게 호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형 에서의 입장에서는 400명의 사병을 데리고 자신의 근무지인 세일산과 에돔들을 이탈하여 오래 길르앗 지역에 머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군대가 에돔들의 재산을 지키지 아니하면 외적의 침입을 받아 호리족속의 재물을 약탈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므로 에돔들 호리족장인 장인 아나의 호위대장 에서는 자신의 부하의 대부분을 세일산 에돔들에 남겨두고서 일부만 거느리고 북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다고 보면 호위대장인 에서가 현지에서 지휘하고 있는 군대는 그가 북진할 때에 거느리고 온 400명의 기마병보다는 몇 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이 군사력이 대단한 인물이 바로 에서입니다. 참고로, 에서는 그와 같은 엄청난 군사력으로 훗날 용맹한 아들들 및 손주들과 더불어 그 땅의 원주민 호리족속을 치고서 세일산과 에돔들의 주인이 됩니다(36:8-19).

4)    세월이 지나가자 에서의 자손들과 원주민 호리족속들은 함께 거주하면서 하나의 혼혈민족 에돔사람이 됩니다. 그에 따라 역사가운데 이스라엘보다 먼저 왕정국가인 에돔왕국이 형성되고 있습니다(36:19-31, 40-43).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주전 15세기의 인물 모세가 흥미진진하게 창세기 제36장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야곱이 형 에서의 일행이 자신이 준 가축 떼를 몰고서 전부 시야에서 사라져버리자 그때부터 그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5)    그것이 과연 자신과 처자식의 생명을 구원하여 준 벧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여호와신앙인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적인 욕심에 이끌리어 탐욕적으로 살아가는 삶일까요? 불행하게도 야곱의 경우에 있어서는 전자가 아니고 후자입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여 준 여호와의 은혜를 배신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가 선택하고 있는 인생살이는 첫째, 물이 풍부하고 목초가 잘 자라고 있는 얍복 시냇가 들판에서 오래 가축을 쳐서 그 수를 크게 번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6)    그는 아예 몇 년에 걸쳐서 그 일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가족들이 거주할 집도 짓고 가축들이 거처하는 우릿간도 짓고 있습니다(17a). 그 때문에 그 지역 이름이 숙곳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17b). 둘째, 야곱의 배신행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자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벧엘에서의 서약을 이행하지 아니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벧엘로 남행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북쪽에 있는 가나안 땅의 대도시 세겜으로 가고 맙니다(18);

7)    재산이 많은 그는 당시 가나안 땅에서 가장 큰 도시 세겜에서 세상이 주는 온갖 향락을 제마음대로 누리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그 옛날 의 잘못된 선택을 야곱이 여기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 경우에는 그가 살고 있는 소돔성의 타락상이 극심하기에 여호와로부터 불심판을 당하게 됩니다(19:24-25). 그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큰조카 의 가족을 천사를 보내어 구출하게 합니다(19:29). 그렇다고 하면 벧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타락한 도시 세겜을 징벌하시고 야곱일행을 구출하게 되시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기록이 사실은 창세기 제34장과 제35장의 내용입니다.  

(2)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성의 젊은 추장인)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100크시타에 샀으며(1마리의 값을 1크시타로 보고 있으며 그것은 비싸야 60만원 정도임. 따라서 100크시타는 6천만원정도로 추산하고 있음. 그리고 그 밭에 훗날 요셉의 무덤이 생기고 있음, 24:32),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그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것임)이라 불렀더라”(33:19-20);

1)    야곱은 남쪽에 있는 벧엘이나 부모님이 살고 있는 가나안 남부 브엘세바 또는 헤브론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세겜 주변에 오래 살기 위하여 아예 세겜성의 지배자인 젊은 추장 세겜의 형제들로부터 큰 돈을 주고서 넓은 밭을 사고 그 자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9). 물론 세겜 주변의 들판에서 야곱이 가축 떼를 치기 위해서는 별도로 원주민들에게 목초지 사용료를 지불할 것입니다. 그 지불료에는 들판의 우물에 대한 물사용권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2)    게다가 야곱은 오래 세겜성 주위에서 살고자 하인들에게 명령하여 그곳에 우물을 파게 합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사마리아 지역의 세겜성 가까이 수가마을을 방문하였을 때에 그곳 야곱의 우물가에서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4:5-7). 그와 같이 야곱은 세겜성 주위에서 오래 살고자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 양심에 한가지 찔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20여년전에 그가 벧엘에서 여호와께 서원하고 약속한 일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3)    어떻게 하면 그 양심의 소리를 이성적으로 무마할 수가 있을까요? 잔머리에 밝은 야곱이 그만 가장 영적으로 타락한 방책을 마련하고 맙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일종의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20b).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를 모시기 위하여 제단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지니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램프에서 빠져나오게 되고 그 자를 위하여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원성취를 원하는 인간은 램프의 요정 지니를 불러내어 자신의 일방적인 소원을 이루어 주는 능력 많은 종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만든 편리한 도구주의적인 우상의 존재입니다.

4)    벧엘에서의 서원을 지키는지 아니하는지 눈 따갑게 보고 계시는 엘벧엘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35:6-7) 야곱은 화려하고도 유혹적인 도시 세겜에 오래 살고 싶어서 그만 야곱 자신만을 무조건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벧엘의 여호와라고 제멋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마치 자신의 종과 같은 도구적인 우상의 하나로 여호와를 섬기고자 그 제단을 세겜 주변 자신의 거처에 마련하고 만 것입니다(20a);

과연 야곱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이 벧엘의 여호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야곱으로서는 당장 두가지의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하나는, 벧엘에서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하여 벧엘로 찾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여호와의 얼굴 엘벧엘을 우선적으로 찾아야만 합니다(35:6-7).

또 하나는, 벧엘에 제단을 쌓고서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때부터 인간적인 꾀로 살아가는 야곱이 아니라 주인이신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는 신실한 청지기 이스라엘로서의 거듭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35:9-10). 그 결과 비로소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이 세상을 이기는 영적인 거룩한 성도가 됩니다(35:11-13).

그런데 그와 같은 거룩한 성도의 삶을 야곱이 위험에서 벗어나자 완전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재산을 증식하고자 얍복 시냇가 들판에서 장기 체류합니다. 게다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벧엘로 남행하지 아니하고 그 반대로 대도시 세겜을 찾아 북행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세상적인 쾌락과 향락을 누리고자 획책하고 있는 야곱입니다. 그는 세겜 주위에 밭을 사서 집을 짓고 자신의 부를 지켜주는 편리한 도구로서 일종의 군대와 같은 존재로 여호와를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편리한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서 그 신을 모신다고 하는 제단까지 마련하고 있는 제멋대로인 배신자가 바로 야곱입니다;

자신을 살려 주신 여호와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종으로 삼아 이기적으로 부리려고 하는 못된 야곱의 버릇이 세상적인 누룩이 되어 그의 후손 이스라엘 자손들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도 그러한 편리한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자꾸만 야곱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본문의 말씀의 뜻을 자주 묵상하면서 끝까지 주님의 제자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로 한평생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