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성령님의 교통하심에 대한 히브리서저자와 사도 바울의 증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14. 10:08

제목; “성령님의 교통하심에 대한 히브리서저자와 사도 바울의 증언”(13:20-21, 4:6, 참조구절; 고후13:13)

설교일; 주후 2023319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314일 화요일 작성)

 

교회에서 공적인 예배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는 회중(congregation)에 대한 목사님의 축도입니다. 축도(benediction)의 내용은 주후 1세기의 바울서신에서부터 유래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여기서 오늘날 익숙하게 알고 있는 용어는 은혜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인자(人子, son of man)로 보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요한복음 제3장에서 웅변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영원한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고 자신이 죄인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의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은혜를 믿고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자주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후 1세기 초대교회의 시대에 있어서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율법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인생 가운데 성도들이 이제는 율법의 의를 완전히 이루어야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유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요? 그것이 잘못된 사상이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에서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차제에 중요한 대목만 살펴보더라도 다음과 같습니다;

(1)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2-25).

(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1-4);

  

(3)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9-12).

(4)  간략하게 위의 말씀에 대하여 풀이를 해봅니다;

1)    첫째, 위의 로마서의 글은 사도 바울이 쓴 글입니다. 그는 옛날에는 랍비 사울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만난 이후 큰 깨달음을 얻어서 기독교인이 되고 지금은 이방인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남은 인생 가운데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육신 가운데 죄의 소욕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가 육신의 욕심을 이기고 거룩한 성도로 남은 인생을 끝까지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일까요?

2)    둘째, 그 해답이 그의 로마서에서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자 육신적으로 애를 쓰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어 주신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때에 이 세상의 욕심을 이기고 육신적인 탐욕을 이길 수가 있다는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입니다.

3)    셋째,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에서 한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고후13:13);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익명의 히브리서저자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도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는 디모데와 친한 선교일꾼이기 때문입니다(13:23). 그리고 히브리서저자는 서방선교에 전념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디모데와 함께 수년동안 체계적으로 배운 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18:11, 19:8-10).

그와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저자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3:20-21).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가지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속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키신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20). 또 하나는,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21).

그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의 글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31하나님의 존재양식과 활동양식을 다음과 같이 간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의 바깥에서 이 세상을 엄밀하게 살피고 계십니다(1:2). 따라서 사도 바울이 헬라어 전치사 에피’( π , 영어로는 on)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시고(성육신, 成肉身, incarnation)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복음으로 밝혀서 전파하시는 공생애를 사셨으며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공로로 말미암아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마침내 천국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헬라어 전치사 디아’(δι , 영어로는 through)를 사용하여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셋째, 성도들에게 강림하여 내주 역사하고 계시는 진리의 성령님에 대해서는 헬라어 전치사 ’(ν, 영어로는 i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을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6-20).  

요컨대, ‘성령님의 교통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들의 인생길에 항상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지적한 사실을 금방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옥중에 갇혀 있을지라도 성령님이 교통하시면 그는 갇힌 자가 아니고 참된 자유인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기억하면서 이제 본문의 구절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본문의 요지는 한마디로, 주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시고 천국으로 불러 주시기를 히브리서의 저자가 축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3:20-21).

  그와 같은 측면에서, 본문은 히브리서저자의 성도들에 대한 축도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의 하나님만이 언급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축도문으로서 그 원형이 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글,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와 비교하면 명문으로는 성령님의 교통하심에 대한 은혜가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의 글 제9장 제14절의 내용을 참조하여 본문의 말씀을 다시 음미해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히브리서 저자의 글 속에 담겨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서 제9장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님의 역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4).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약 2천년 전의 인물입니다. 공간적으로는 고대사회 가나안 땅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활동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도 그때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살아서 온 세상 모든 성도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 행실을 살려서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만들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비밀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오늘날 성도들의 인생 가운데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그것이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릴 수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교통하심입니다.

구체적으로 성령님은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심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주님의 제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13:20);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13:20a);

1)    흔히 예수님을 모든 목자들의 목자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와 다르게 큰 목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3:20a). 그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주님을 큰 대제사장’(5:14)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    보통큰 스승이라고 하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많은 스승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스승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이 그냥 그 자리가 얻어진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역을 한 결과 가장 뛰어난 성적을 보였으므로 그 자리를 얻게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3)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영적인 목자의 일을 하셨습니다. 무리들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시고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헌신하셨습니다. 그 결과 큰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과 큰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탄생부터가 그러합니다. 에델 망대가 있는 들판에서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사용하는 양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물로 선택이 된 건강한 양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북쪽으로 목자들과 함께 이동을 합니다. 그들이 중간에 머무는 곳이 베들레헴의 마구간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그곳에서 태어나 양들의 냄새가 무성한 그 구유에 누워 계시는 것입니다(2:7);

5)    그 양들이 예루살렘성전에서 백성들의 속죄를 위한 제물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생애의 끝에 스스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십니다. 가축인 양들을 사용한 속죄의 제사는 그 효력이 일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린 제사는 그 속죄의 효력이 영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7:27-28).

6)    그러므로 여기서 큰 목자가 되기 위한 두가지 조건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양들과 함께 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마구간에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계십니다. 또 하나는 자신에게 보내어진 양과 같은 성도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들의 영원한 속죄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셨다는 것입니다(6:39, 10:11).

(2)  영원한 언약의 피로”(13:20b);

1)    가축을 제물로 사용하는 제사에 있어서는 그 효과가 제한적입니다. 대제사장이 대 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가축을 사용하여 그 피로 속죄의 제사를 지성소에 들어가서 정성껏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일년 동안의 죄 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16:29-34). 그러므로 다음해 대 속죄일이 되면 똑 같은 제사를 여호와 앞에서 반복해야 합니다;

2)    그와 같은 불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없애고 하나님 앞에 영원한 속죄가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에 구속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시고 그 피를 흘려 주십니다. 그 피에는 하나님 아들의 영원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보혈이 하나님 아들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영원한 죄 사함의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3)    출애굽기 제24장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언약식을 거행하고 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를 잡아서 그 피로써 율법을 지키겠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굳게 맹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의 피는 영원한 구속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피로 맹세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내심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피로 세운 새 언약은 영원한 속성과 구속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발동시키고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3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후에 승천하셨으니 백성들이 이 땅에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다시 언약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가운데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대속의 십자가를 믿고서 회개한 그것이 마지막 구원의 기회입니다. 더 이상의 언약의 변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서약한 그대로 실천하는 성도로서의 삶만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3)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13:20c); 인생의 모든 괴로움이 언제 끝나고 영원한 안식과 평강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경우에는 무덤속에서 3일만에 아버지 하나님의 영생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때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환난을 당하고 고난 가운데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통 가운데 영원한 구원을 아버지 하나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때가 바로 우리 성도들이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닮은 목자로 그리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끝까지 살아간 결과 평강의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 내시는 그때입니다;

둘째로,21. 모든 선한 일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즐거운 것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3:21);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21. 모든 선한 일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13:21a); 여기서 모든 선한 일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온전히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육신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자신부터 먼저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인 공의의 정신을 행하며 그 청지기로서 온전히 피조세계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이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의 역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성령님께서 내주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일깨워 주시고 또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일생을 본 받도록 만들어 주시는 입니다.

(2)  그 앞즐거운 것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13:21b); 히브리서의 저자가 축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가지의 대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첫째그 앞즐거운 것”(13:21ba)입니다; 구체적으로 누구 앞에 즐거운 것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즐거운 것일까요? 아니면 성도들이 보기에 즐거운 것일까요? 정답은 영원히 즐거울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보기에만 즐거운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즐거운 것을 성도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실행하고 있을 때에 그것이 영원히 즐거운 것입니다. 요컨대,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일깨워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답게 실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원한 주님의 즐거움과 평강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영적인 삶을 온전히 살아가면서 그러한 즐거움을 누리고 또한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그 즐거움을 기쁨으로 누리라는 것입니다(3:29).

2)    둘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3:21bb)입니다;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는 독자적으로 다른 사역을 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애를 성도들에게 재조명해주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말씀해석과 그 역사하심이 성경의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에서 어긋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혹자는 성령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전제하면서 성경에서 벗어나고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에서 이탈하고 있는 말씀을 함부로 주장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3:21bb)라고 하는 기준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삼위(三位)로 보이지만 그 의사결정과 말씀의 뜻에 있어서는 항상 동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에게 육신을 입고서 완전하게 계시하신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 생애를 기준으로 삼아서 말씀을 해석해주시고 또한 적용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셋째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13:21bc)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우리 성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온전히 행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여 달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축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3:21c); 언뜻 보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영광이 하나님께가 아니고 영광이 에게라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상한 대목에 대하여 깊이 묵상해보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삼위의 하나님을 각각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일부러 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역사로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 한가지 인상적인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론을 사도 바울이 헬라어 전치사 3개로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헬라어 성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6. ες θες κα πατρ πάντων,  π πάντων κα δι πάντων κα ν πσιν”(에이스 세오스 카이 파테르 판톤 오 에피 판톤 카이 디아 판톤 카이  파신; 4:6).

우선 그 문장의 뜻을 간단하게 살펴봅니다첫째, 성부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바깥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피조세계인 우주를 초월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성자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시다가 다시 성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만유를 하나님의 뜻에 통일시키기 위한 것입니다(5:1-2).

셋째, 성령 하나님께서는 만유 안에 임재하셔서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역사입니다(14:16-17).

  그 가운데 오늘 특별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특이하게도 창조주 여호와 성부 하나님의 역사방법에 대하여 헬라어 전치사에피’(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상정할 때에 주로 사용하는 전치사위페르’(ϋπερ)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 창세기 제1장 제2절을 참조하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두운 세력의 팽창을 제어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성경에서는וְר֣וּחַ אֱלֹהִ֔ים מְרַחֶ֖פֶת עַל־פְּנֵ֥י הַמָּֽיִם׃”(베루아흐 엘로힘 메라헤페트 알 페네 함마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그 대목을 주전 3세기에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πνεμα θεο πεφρετο πνω το δατος”(프뉴마 세우 에페페레토 에파노 토우 위다토스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활동하고 계셨다)라고 정확하게 70인역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2)    그렇게 번역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이 수면에 역사하여 빈틈없이 어두움의 세력의 팽창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수면에 전이가 되어 역사하고 있는 것이기에 비록 창조주께서 우주 바깥 초월적인 위치에 보좌를 가지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물의 막과 함께 움직이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3)    그래서 성경학자들이 하나님의 영 또는 여호와의 바람이 능력의 물과 함께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삼아 그와 같은 견해를 하나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2에서’<루악흐>’<마임> 위에 작용하는 상호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영이 움직이면 그 움직임에 따라 물이 움직인다는 뜻이다”(이영재 목사).

(2) 둘째, 히브리어성경과 헬라어 성경에서는 창세기 제1장 제2절에서 전치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어번역에서 두가지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가over이고 또 하나는upon입니다. 여기서over가 헬라어위페르’(ϋπερ)에 해당하고upon이 헬라어에피’(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3) 셋째,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의 이방인선교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동행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16:6-7). 따라서위페르하나님보다에피하나님이 그에게 더욱 친숙하다고 하겠습니다.

1)   특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심령속에 보혜사 성령님이 임재하여 동행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고전6:19). 성령님께서 성도의 속사람속에 하나님의 전을 마련하고 계시기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마음속 성전에 함께 임재하시는 것입니다(8:2).

2)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말은 공생애 기간 중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4:16),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4) 넷째,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성을 설명할 때에는위페르하나님을 말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점을 욥기 제35장에서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5.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6.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35:5-8);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심판 가운데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결심하셨기에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위페르의 하나님보다에피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다섯째, 성도들은 에피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다음 두가지의 사실을 명심하고서 옷깃을 여미며 경건한 신앙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1)   하나는, 영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심령속에 모시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성도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것도 무익한 종에 불과합니다(17:10). 그러므로 매사를 주님께 여쭈어 보고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천지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55:9).

2)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세가지 팁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기뻐하시는 뜻 그리고 온전한 뜻입니다. 그 판별법을 성도들은 잘 숙지하여 활용해야 합니다. 조금 설명을 해봅니다; 먼저, 선한 뜻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3:4).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생명을 죽이게 되면 그것은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거짓 신앙입니다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 가운데 여호와께 산제사를 드리는 신앙생활입니다(12:1). 끝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하여 반드시 보상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현세적인 상급과 보상을 전부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저자의 축도는 다음과 같이 새겨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광이 아버지 하나님께,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놀랍게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영원히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영원히 맛보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그 은혜를 맛보자면 성도들은 남은 인생 가운데 시종 기복신앙과 현세적인 복락에 탐닉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위하여 천국에 부지런히 저축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6:20-21). 그리할 때에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며 성도들이 행복하게 천국에 입성할 수가 있습니다(25:40, 21:26-27). 

그와 같은 인생을 찾고 돌보기 위하여 에피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을 면밀하게 감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창조주의 눈은 언제나 성도들의 심령에 건설되어 있는 성령님의 성전안에서 번쩍거리고 있습니다.  

그 눈을 의식하면서 아무쪼록 그 옛날 요셉처럼(39:9) 경건하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4:13)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