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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미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하와이 일본인들이 미국 본토 수용소에 강제수용되고 재산을 몰수 당하다(프랭크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행정명령 9066호)

손진길 2022. 8. 31. 20:32

1942년 미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하와이 일본인들이 미국 본토 수용소에 강제수용되고 재산을 몰수 당하다(***그러므로 일본인 농장주들이 조선인에게 일단 매매형식으로 소유권을 넘겨주는 편법으로 당시 재산몰수를 피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도 되찾지를 못하게 되다. 그와 같은 현상은 1945년 8월 조선이 해방되자 그곳에서도 다시 발생하고 있다)

 

이하 글의 출처는 나무위키의 프랭크린 루즈벨트 행정명령 9066에 대한 기사에서 발췌한 것임

 

특히 당시 일본계 미국인 1 명이 일본 군인연맹에 소속되어 일본 육군에게 기부금을 보내고 있었으며, 5 명이 제국 동지회에 가입하여 미군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기로 결의한 상태였다. 또한 전시 일본군 입대한 일본계 미국인은 최소 1648명에 달했다. 미국으로서는 당연히 일본인들의 이적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합중국 대통령 1942 2 19,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했다. 이로서 미국은 적성국민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지에서 내쫓아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당시 미국의 교전국은 일본 외에도 독일 이탈리아 있었지만 타겟이 일본계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독일계 이탈리아계들을 일본계와 동일하게 수용하려면 애로사항이 많았을 것이다독일계 미국인들을 일본계처럼 수용소에 수용하려면 당시 미국 인구의 20~30% 가량이 수용소에 들어가야 하고, 태평양 전쟁의 5 지휘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 5 지휘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미국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 일가 주요 장성들과 재계 인사들도 줄줄이 수용소에 가야 하며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마피아 비율이 높아 만약 이탈리아계를 전부 수용소에 수용하려면 마피아들과 한바탕 크게 싸워야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독일계/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당시 조국을 점거한 파시즘 정권에 대한 충성이 매우 얕거나 적었다. 독일계 미국인들의 기원은 대다수가 1848 혁명에서 출발한 '48 세대'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100년이 되어가는 독일계 가문 출신들은 당시 나치와 반대로 미국에서도 굉장히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몇몇 독일계 미국인 부모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독일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신들의 자식들을 독일군에 입대시키는 경우도 있었다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나온 오리건주 출신 독일군 포로가 예시.

또한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같은 지역 출신 친구나 가족 등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가장 컸지, 미국 남북전쟁 때에만 해도 샤르데냐 왕국 통일이 아직 이뤄지던 중이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한 정부에 대한 충성은 매우 얕았다. 게다가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남부 출신이 많았는데, 파시즘 정권의 지도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 지역감정으로 사이가 나쁜 북부출신이었고, 집권중에 마피아의 본진인 남부지역을 신나게 털었었다.

4. 시행[편집]

행정명령 9066호에 따라 주로 미국 서부지역과 애리조나 남부에서 12 명의 일본계 미국인이 그저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아이다호, 유타, 아칸소 등에 건설된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야말로 일본 출신이라면 무조건 끌고 갔다고 있으며 강제 수용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들도 몰수했다. 되는 예외가 바로 일본계 미국인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서 전부 수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하와이에 살던 사람들과 백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계 여성.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경제적, 정치적으로 모두 미국의 식민지나 다를바 없던 쿠바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다만, 여긴 미국과 달리공평하게 일본계 이민자 말고도 이탈리아계 독일계 이민자 수천여 명까지 임시 수용소에 수감했고 1 정도 있다가 모두 석방되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 재산도 찾을 있었기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일처리가 상당히 개념있게 진행되어서 이제는 현지인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이외에도 남미에 있던 일본계들도 모두 추려서 미국으로 보냈다. 다만 브라질에서는 일본계의 숫자가 수십만이 넘었기에 그들은 보내지지 않았으나, 해안에서 가까운 곳의 거주는 금지되었다.

5. 수용소 생활[편집]

강제 수감된 이들은 빈약한 시설 속에서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일본계 미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조국 미국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기 위해 새로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 생필품 외에도 군이 요구하는 전시물자 생산에도 적극 협력했으며, 미국 역시 이들을 써먹으면서 어느정도 자유로운 영내 행동을 보장하거나 학업 문제가 있다면 외박은 되더라도 외출을 허용해주거나 의료 시설을 갖추는 기본적인 의식주 정도의 지원을 해주었다. 그러나 수용소에 따라 마굿간 등에서 살아야했던 곳도 있었다.

물론 엄연히 강제 수용소이다 보니 주변에 철조망이 쳐지고 무장병력이 경계를 서고, 탈출 시도를 하다가 사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물론 국운을  총력전 펼치던 유럽 국가에서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정도 조치는 일반적이었다.

영국에 거주하던 6 여명의 독일계 주민들도 나치 인사를 제외하고는 수용소 생활을 하거나 거주지 제한조치를 당했고, 7,500 이상의 주민이 추방되었다. 당시 시설이 베리리버풀 건설되었고 지금도 일부 시설이 남아있다. 소련도 독소전이 발발하자 볼가 하류에 거주하던 볼가 독일인들을 잠재적인 부역자로 간주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하지만 당시에 본토가 전장이 적이 아예 없는 미국과는 사정이 다르기에 같은 조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미국은 국가의 존폐를 걸고 타국과 전쟁을 적이 없고,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일본조차 미국이 전선을 확대하는 것을 꺼려 자신들과 협상할 것이라고 생각해 벌인 일이지 미국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은 적이 없다. 애초부터 그러기엔 양국간 덩치 차이도 너무 크다.

게다가 격리 수용소임에도 노동 수용소마냥 전시물자 생산 등에 동원했던 또한 전후 이들이 비판받는 이유 하나다. 그러나 소련 굴라크 같은 강제 노동 수용소는 아니었고나치스 같은 절멸수용소는 더더욱 아니었으니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개전 이전에 일본계 사진작가들은 미국 사진계에서 주목받던 이들도 있어서 수용된 후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갈 없었으므로 수용소 안에서 구할 있는 물품들로 사제카메라를 만들어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리하여 안셀 애덤스, 도로테아 유명 사진작가들도 이곳에 찾아와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그들의 수용 생활에 대한 자료는 많다.

6. 전후[편집]

전쟁이 끝을 보기 시작하던 1944부터 수용소가 하나둘 폐쇄되기 시작하였고, 종전 수용되어 있던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두 풀려나서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전쟁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들은 대부분 이미 몰수되었거나 전쟁으로 파괴된 상태였고 잃어버린 기반을 되찾으려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간신히 일구어 두었던 미국에서의 기반을 거의 잃고 말았다. 실제로 잃은 재산을 되찾은 사람은 별로 없다.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대부분은 미국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짧게는 3, 길게는 4년간 강제 수용을 당하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고 다시 되찾지도 못했다.

종전 이후 미국 정부는 이러한 과거에 대해 간헐적으로 사과하기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는 1988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건에 대하여 사과하면서 1인당 20,000 달러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보상금은 80년대 후반 당시 생존자에게만 지급된 것으로, 부분은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사과를 이끌어낸 인물 하나가 위안부 문제를 알린 것으로 유명한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이다# 이렇게 사과가 이루어진 것은 미국이 냉전으로 공산주의 진영과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적국에서 동맹국이 일본, 독일 등의 협조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