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44강(창43: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25. 02:23

창세기 강해 제244(43:1-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25()

 

자신의 목숨과 영생을 담보로 내걸고서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고 있는 유다(43:9)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합니다(43:1). 두 해째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야곱은 아들 열명을 애굽에 보내어서 양식을 사오게 했습니다. 그 양식을 아껴서 먹으면서 그래도 흉년 가운데 적은 소출이라도 얻어서 연명을 해보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결코 막내 아들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기를 원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노인네의 고집과 버티기 작전입니다. 그렇게 계속 고집을 부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애굽에 인질로 잡혀있는 차남 시므온을 구해와야만 합니다. 둘째, 생각보다 소출이 없어서 온 가나안 땅에 기근이 더 심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연명책은 빨리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는 것입니다. 야곱이 뻔한 그 사실을 진작부터 인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원하는 일이 아니지만 어찌할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열 명의 아들을 전부 불러모았습니다(43:2a). 그 자리에서 다시 애굽에 가서 양식을 조금 사오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습니다(43:2b). 그러자 열명의 아들 가운데 4남인 유다가 나서서 대표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에게 두 차례나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아니하면 자신을 만나지도 못할 것이며 양식도 살 수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를 했습니다(42:16, 20). 그러므로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해주셔야 저희들이 양식을 사올 수가 있습니다(43:3-4). 같이 가지 아니하면 헛수고이므로 저희들도 애굽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43:5)”.

그 말을 듣자 늙은 야곱의 넋두리가 마치 원망처럼 다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하여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43:6). 아들들은 그들이 그렇게 답변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에 대하여 다시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라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43:7). 그와 같은 야곱의 넋두리와 아들들이 소명은 그 동안 그 집안에서 여러 번 반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질문과 답변은 한 마디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진척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공방을 하면서 야곱이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가고 있습니다.

양식이 떨어져서 마지막 위기가 찾아왔을 때에 마침내 유다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고 있습니다. 이제는 머뭇거릴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집안의 모든 식솔의 목숨을 살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있습니다;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제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43:8-9).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아들들로부터 무슨 말을 듣고 싶어했을까요? 지금 유다가 하고 있는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찍이 맏이인 르우벤은 자신의 네 아들 가운데 절반인 두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삼고서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이기적인 모습의 신앙입니다. 자식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목숨을 구원 받으면 된다고 하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제안에 결코 동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담보물이 됨으로 말미암아 모두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의인이 자신의 가문에서는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요? 양식이 다 떨어지는 지경에 와서야 비로서 한 사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유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값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 바로 유다라는 이름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29:35).

그런데 유다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43:9)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죄를 진다는 의미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 담보로 걸겠다는 뜻입니다. 그와 같이 자신의 영생까지 걸고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고자 애쓴 인물이 후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모두 멸절시켜버리시고 모세의 자손만으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을 때(32:8-10) 다음과 같이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을 시킨 후에 광야에서 모두 죽여버린다고 하면 세상사람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그들을 광야에서 죽이기 위하여 출애굽을 시켰다고 하나님을 비웃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리하지 아니하신다면 차라리 저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십시오”(32:12, 32).

초대교회시대에 또 한 사람이 자신의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과 영생까지 걸고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 그러므로 자신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복음을 전하고 양육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를 이방인 사도로 주님께서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바울은 동족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지상명령을 따라야만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방인 사도로 목숨을 걸고 사역을 하는 만큼 저의 친척과 동족을 구원해주십시오”. 그의 기도가 훌륭하게 응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저술한 로마서 제16장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실명으로 바울의 선교에 동참한34명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그의 친척이 적어도 6명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무려 17%이상의 동역자가 자신의 친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기도를 긍정적으로 들어주셨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를 많이 내어 보내는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많이 구원해주신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