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43강(창42:37-3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24. 01:03

창세기 강해 제243(42:37-3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25()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물로 세우고 있는 르우벤은 어떠한 사람인가?(42:37)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고 있는 자가 아브라함입니다(4:16). 그런데 창세기에서 그의 가계에 대하여 살펴보면,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마엘 다음에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21:12-13). 그와 같은 특성은 그의 상속자인 이삭의 대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장자인 에서 다음에 하나님의 언약을 승계하게 되는 야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25:23-26). 그 성격이 이스라엘 곧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르우벤이 장남이기는 하지만 그는 영적인 장자가 되지를 못하고 지차인 유다와 요셉에게 이스라엘의 왕권과 목자권이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49:3-4, 10, 24).

그와 같은 의인의 가계의 특징은 일찍이 하나님을 아는 가정의 시작이 되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2:20-25).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자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이 태어납니다(4:1-2). 두 아들이 장성하여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장남인 카인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를 못하고 차남인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집니다(4:3-5).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전통과 혈통을 따라서 카인, 이스마엘, 에서, 르우벤 등이 모두 장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장자는 다릅니다.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안목이 문제가 아닙니다(1:12-13).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가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삼상2:30, 7:21). 따라서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에 영적인 맏이 곧 하나님의 자녀는 달리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창세기의 가르침을 가지고 본문을 들여다 보면, 비로서 장남인 르우벤이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첫째로, 르우벤은 아버지에게 동생 베냐민을 내달라고 하면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42:37). 르우벤에게는 모두 4명의 아들이 있습니다(대상5:3). 그 가운데 2명을 아버지 야곱에게 담보로 맡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굉장한 희생이며 큰 결단으로 보입니다. 온 집안 식구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애굽에 양식을 사러 다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만 양식을 사올 수가 있습니다(42:34). 그러므로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맡기고서라도 베냐민을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결단과 용기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실제 내용이 과연 그러할까요?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 그 실상이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삼상16:7).

둘째로, 르우벤의 마음의 중심은 그 옛날 롯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롯은 자신의 집에 맞아들인 하나님의 사자 곧 두 천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두 딸을 소돔 성의 불량배들에게 던져주려고 한 사람입니다(19:8); “롯은 가부장 고대사회에서 무언가 잘못 배우고 있습니다. 두 딸을 족장인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두 딸의 인권을 무시하고서 그저 물건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혹시 딸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들과 비교하면 하찮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고 있습니다(1:26). 남자와 여자를 모두 그렇게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동일한 복을 주시고 있습니다(1:27-30). 그런데 불행하게도 롯이 고대 족장사회의 관습에 물이 들고 특히 소돔과 고모라에서 성행하고 있는 물질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을 물건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세상을 보다 못하여 훗날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본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0-31). 그 뜻을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창조주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창조물인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본주의가 반드시 인본주의와 하나로 연결이 되어야만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자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처자식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르우벤도 두 아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만 합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그러하지를 않습니다. 두 아들을 자신의 소유물인 물건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먹고 살 양식을 구해오기 위해서는 희생의 담보물로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고하면서 행동을 하고 있는 이상 르우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인 가문에 있어서 결코 장자로 자리매김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35:22, 49:3-4).

 

야곱의 목숨과 베냐민의 목숨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과(42:38, 44:30), 그 복음적 의미에 대한 해석(1:1-4, 10:30)

 

르우벤은 두 아들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과 사랑의 끈으로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결코 생각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어 놓지를 않으며 다른 생명체인 두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맡기고자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아들은 과연 담보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 대답은 ‘NO’입니다. 자신의 희생과 헌신이 전적으로 담겨 있지 아니하다면 그것은 담보물로서의 가치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ZERO’라고 하겠습니다. 설혹 르우벤의 두 아들이 상대적인 관점에서 담보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손자를 사랑하는 야곱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담보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베냐민이 집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책임을 물어서 르우벤의 말처럼 그의 두 아들을 대신 죽여야만 합니다(42:37). 그렇게 된다면, 과연 누구의 가슴이 아플까요? 르우벤의 가슴이 아니라 오히려 야곱의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먹고 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두 아들의 목숨을 아낌없이 담보로 맡기고 있는 르우벤의 심성으로 보아서는 그의 마음이 아플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인 이스라엘의 마음은 아플 것입니다. 아들 베냐민을 잃어버리고 다시 손자 둘을 해친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들 베냐민을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고 있는 야곱인데 그의 마음 속에 어찌 손자에 대한 사랑인들 없겠습니까? 만약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끔직하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마치 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들의 생명이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모세가 유다의 입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44:30-31). 그 말은 진작에 이스라엘이 아들들에게 선포한 말씀입니다;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42:38).

어째서 모세는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그 대목을 그토록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이 사랑의 끈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 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1-4).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대인 청중들에게 명쾌하게 선언하시고 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그러나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는 유대교인들은 나사렛 예수의 그 선언으로 말미암아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가 자칭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신사상을 이신론’(二神論, two gods theory)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이단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인 예수가 스스로 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신이 되고 창조주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유물론자이며 범신론자입니다. 그래서 훗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자신의 목숨을 버리게 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그 한마디를 꼭 선언해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실 때에 그 심령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10:38, 14:9-10).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의 핵심입니다(14:11).

창조주가 피조물의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셨기에 이제 피조물들은 그 어떠한 변명도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창조자(1:3)가 피조물을 잘못 만든 책임을 스스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사죄하고 말았는데 이제 피조물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허물을 누구에게 돌릴 것입니까? 도대체 누구를 붙들고 어디에 가서 그 허물과 책임을 따질 것입니까?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오로지 피조물인 사람들 자신의 책임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셨기에 이제는 피조물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공고한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시대보다 신약의 시대에 있어서 피조물의 책임이 영적으로 한층 더 무거워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