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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출처; 위키백과)

손진길 2021. 12. 5. 19:50

무왕 (백제)(출처; 위키백과)

무왕(武王580 ~ 641, 재위 : 600 ~ 641 음력 3)  백제 30 국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 아명은 서동(薯童) 혹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출생지는 전라도 익산이다법왕 아들이라는 설과 위덕왕 서자라는 설이 존재한다.[1] 재위 기간 신라에 공세를 취하는 한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중립 외교를 펼쳤다.

왕권 강화를 위해 대규모 역사(役事) 단행하였다. 630년에 백성을 징발하여 사비궁을 중수하였으며 익산에 별도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또한 정실 왕후인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지원으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백제 최대 규모의 미륵사 창건했다.

 

목차

o    1.1출생

o    1.2정세

§  1.2.1신라와의 전쟁

§  1.2.2기타 정책

o    1.3최후

생애[편집]

출생[편집]

무왕의 출생 배경과 가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가계는 사서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는 무왕을 법왕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고 있다.[2] 《삼국유사》는 무왕을 못가에 사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전하며, 무왕의 어머니는 못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못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라도 익산에는 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중국의 구당서 당나라로 끌려간 남부여 유민들의 묘비석에는 부여관 아들이라 하며, 일본의 신찬성씨록이나 도요타씨, 오우치씨의 족보에는 진이왕으로 나타난다. 진이왕 부여관이 위덕왕혜왕법왕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깎아 내다 팔고, 신라로 넘어가 서동요를 만들어 선화 공주 모함하는 가사로 선화 공주 유배될 같이 가서 결혼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세[편집]

신라와의 전쟁[편집]

600 법왕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 자주 충돌하였다602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611 10 가잠성(椵岑城) 공격하여 100여일만에 빼앗고616에는 모산성(母山城)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623 가을에는 늑노현(勒弩縣) 침범하였다633 음력 8 서곡성(西谷城) 점령636 5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독산성(獨山城) 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한편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 조공을 바치고 여러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624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고조로부터 대방군공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627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태종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하여 이를 포기하였다.

602 관륵(觀勒) 왜에 파견하여 천문 · 책력 · 지리 · 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3][4]

기타 정책[편집]

630 사비궁을 화려하게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중지되었다634 왕흥사 창건하고[5] 궁남지 건설하였으며, 막대한 인력을 징발하여 전라도 익산에 미륵사 조성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시도했다. 비록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관산성 패배 이후 약화된 왕권이 무왕 다소 회복되었다. 이는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최후[편집]

무왕은 641 음력 3월에 사망하였다 태종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으며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고 광록대부 추증하였다고 한다.[6]

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굴된 적이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무왕의 능을 통해 그가 익산 태생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익산을 중시했던 점을 고려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