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9강(사5:18-1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7월 10일(금)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들의 죄질의 심각성 (사5:18-19)
피조세계에서 무엇이 선한 행위이고 무엇이 악한 행위일까요? 그 구분의 방법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릅니다. 그 이유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피조물을 한꺼번에 관찰할 수 있는 하나님의 광대한 입장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그 환경만을 볼 수 있는 인간의 좁은 안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만든 생물들이 모두 생명의 복을 누리고 자연이 창조의 질서에 맞게 운행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절대자 하나님의 선입니다(막10: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은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선은 상대적입니다. 자신의 편은 생명과 복을 누려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에는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으므로 이른바 ‘제로섬 게임’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편이 많이 차지하자면 자연히 재화의 분배에 있어서 타인과 타 집단에게 불이익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하고 있는 집단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 타 집단에게 불이익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도 일종의 선한 행위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요11:50). 즉, 비록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악행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이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피력이 되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5:18-19). 그 깊은 의미에 대하여 이제부터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끄는 것’과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것’은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하나님 보시기에 분명히 잘못된 거짓인데 자신들만의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워서 타인과 타 집단에게 버젓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에게 좋은 것이면 그것이 설혹 상대방이나 상대편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정의이며 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요11:48-50). 차이점은 전자가 개인이 행하고 있는 행위인데 비해서 후자는 집단이 행하고 있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개개인이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의 입장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끈이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레에는 끄는 줄이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집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는 동일합니다.
둘째로,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큰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5:19)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감히 자신들의 일을 무조건 옹호해주는 우상의 하나로 격하시키고 있는 행위입니다. 참을 수 없는 하나님 모독행위이므로 반드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사44:9-11). 자신들이 더 잘 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반대자들을 해치며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상대방을 처치하려고 하는 것이 악행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범죄는 그 일을 속히 그리고 양심에 거리끼지 아니하게 이루기 위하여 신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이 행하고 있는 행위가 선한 행위인지 아니면 악한 행위인지를 분별하여 줄 수 있는 신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자신들의 행위가 옳고 선하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마저도 자신들의 입장과 명분을 옹호해주어야만 한다는 관념입니다. 그들이 여기서 상정하고 있는 신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잘못과 거짓을 행하더라도 무조건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이 옳다고 하는 소위 ‘눈먼 신’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신이 바로 선민 유대인들이 원하고 있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에 더 이상 응답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잘못된 제사장나라 선민들의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좀더 알기 쉽게 이사야가 나중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6-9).
넷째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고 있는 아브라함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므로 역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의인의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가 보는 것이 한정이 되어 있으며 자기 본위로 선과 악을 구별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세기에서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시공간에 갇혀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야만 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해서는 안됩니다. 창조주의 눈으로 구별해주시기를 기도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입고서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기에 그 당하고 있는 고통과 아픔이 보통사람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세상구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의 약한 육체를 가지고 어떻게 그 극한의 고통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달리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도를 알려달라고 매일같이 아버지 하나님께 호소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눅22:39).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을 항상 같습니다. 그 방법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하고자 결심합니다(눅22:42).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서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눈을 항상 의식을 해야만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람의 눈만 의식하는 행동을 해서는 완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눈속임이 되기가 쉬우며 체면치레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소위 ‘외식적인 율법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마23:5-33). 더 확실한 방법은 행위를 하기 전에 매일같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묻고 또 물어야만 합니다. 솔직하게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도저히 저의 약한 의지와 육체로써는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을 선택해주십시오. 아니면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십시오”. 그와 같은 자세가 올바른 신앙태도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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