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8강(사5:15-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7월 9일(목)
음주문화에 취한 자, 연회를 여는 존귀한 자, 하나님의 일보다 세상적으로 존귀한 자와의 사귐에 관심을 두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조치하시는가?(사5:15-17)
첫째로, 본문 첫 구절 제15절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결국에는 (1) 구부림을 당하는 자, (2) 낮아지는 자, (3) 눈이 낮추어지는 자 등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 가지의 경우를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어떠한 자들일까요? 그 단서를 앞부분 제11절과 제12절에서 찾아보자면 첫째, 음주문화에 취하는 자 둘째, 연회문화에 빠진 자 셋째, 하나님의 일보다 세상일에 더 관심을 두는 자 등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각각 왜 하나님의 역사에 의하여 그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술에 취하게 되면 주사가 나옵니다. 그 동안 이성에 억눌려 있던 본래의 성격이 자제력이 상실되자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술에 취하게 해보면 상대방의 본래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주사의 특징은 한 마디로, 그 동안 술좌석의 상대방에게 섭섭했던 점을 더 이상 참지 아니하고 강하게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사가 일단 터져 나오게 되면 일순간에 술좌석은 불편해집니다. 날카로운 송곳이 찌르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송곳을 구부려서 사람을 찌르지 못하게 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은 사람들이 술에 취하여 주사를 하는 행위를 엄금할 것입니다. 아예 술이라고 하면 천국혼인잔치에서 맛보는 포도주 외에는 삼가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2) 연회석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화려하고 성대한 파티에 초대를 받은 선택된 손님들이 실로 감격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연회를 베푼 주인에 대하여 칭송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면 주인은 또 온갖 외교적인 술사를 동원하여 별로 차린 것 없는 연회에 바쁘신 중에도 참석을 해주셔서 영광이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렇게 시작이 되는 연회입니다. 한 마디로 서로 높여주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 목적은 자신들만의 결속력을 다져나가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연대감의 형성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합니다. 마침내 자기들끼리 이익을 나누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특권계층이 대두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소외자가 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인위적인 이분법을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그렇게 인위적으로 높아진 부류에 대해서는 크게 낮추어버리십니다.
(3)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 피조물인가를 자연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영광과 존귀함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서 자신과 같이 미천한 존재를 하나님의 전으로 불러주시고 청지기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격합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을 창조주의 뜻을 따라 돌보고자 합니다. 요컨대, 남을 나만큼 대접하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지 아니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보다는 세상적인 일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이사야의 지적과 같이 소위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도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위적으로 높아져 있는 그들의 눈을 완전히 낮추어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들이 얼마나 형편이 없는 인간인가를 똑똑하게 볼 수 있도록 역사를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당장 앗수르의 침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100년 남짓 지나면 아예 마지막 제사장나라가 지상에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둘째로,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를 바라보면서 이사야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본받으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대목이 제16절에서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사5:16). 하나님의 성품을 정의와 공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1) 기본적으로 정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억울한 자가 없으며 복지가 시행이 잘 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만든 지도자가 칭송을 받듯이 하나님께서도 정의를 구현하시므로 크게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사5:16a).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의 안목으로 피조세계에 대하여 자신의 성품을 공의로 계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는 것은 시공간적으로 좁은 안목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제약성을 훌쩍 뛰어넘고 있는 개념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나와 너와 우리’라고 하는 이기적인 영역을 초월하여 창조주의 눈으로 ‘너희들’은 물론 모든 피조물을 동시에 통찰하고 있는 것입니다(마5:43-48, 요3:16, 롬8:18-23). 그러한 개념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사5:16b)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초월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제대로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당시 다윗 왕조의 유대 왕국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례를 따라야만 합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을 옷 입어야만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선민사상을 뛰어넘는 만민구원의 시대에 동참하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해나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이사야는 선민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조리를 온전히 시정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이상세계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어린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5:17).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린양들이 그 동안은 마음대로 좋은 풀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목초지는 전부 어른 양들의 차지였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은 어른들이 모두 차지하고 그들의 자녀들인 후세대들은 엄청난 부담 등 나쁜 것만 차지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부동산투기가 그러합니다.
(2) 구체적으로, 부동산 값이 치솟게 되면 두 가지로 부의 이동이 나타납니다; 첫째, 투자에 따른 이익이 커지므로 돈이 많은 부자가 더욱 부동산 투기를 통하여 축재를 하게 됩니다. 반면에 가난한 서민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며 더욱 가난하게 되고 맙니다. 둘째, 부동산 가격이 이미 폭등하여 있으므로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자녀들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 부동산을 취득하기 위하여 후세대의 소득이 부모의 세대로 이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부모들이 자녀들의 돈을 갈취하게 되는 모양이 되고 맙니다.
(3) 정의사회가 실현이 된다면 부모세대와 자녀세대 사이에 착취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과 같이 평안함을 누리며 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사5:17a). 그리고 빈익빈 부익부라고 하는 사회적인 병리현상이 치유가 되고 있으므로 돈 없는 떠돌이들도 복지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부자의 버려진 밭’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율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구제의 방법이지만(출23:11) 오늘날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현대국가의 ‘복지제도’가 그것을 제도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는 애굽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신 출애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타민족이라고 하더라도 나그네가 된 유민들을 돌보라고 율법을 정하고 있습니다(출22:21). 그러나 그 율법의 정신은 선민사회에서 유대교로 개종하여 함께 살고 있는 이방인을 제외하고 나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방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제사장나라가 전혀 힘쓰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망각한 것입니다. 장차 그러한 시대가 청산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방향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이사야의 다음 말씀은 다시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5:17b). 사족을 더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영적으로 떠돌고 있는 이방인들이 장차 예수님의 복음으로 그 말씀의 뜻을 전해 듣게 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인생을 사는 목적을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어주는 자를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는 것인 줄 깨닫고서(요6:38-40) 평생을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자신은 종이므로 자신의 뜻을 행하지 아니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 청지기의 정신이며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상입니다. 그렇게 행할 때에 병든 사회가 치유가 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상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있을 것임을 선지자 이사야가 알기 쉽게 위와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묵상을 할 필요가 있는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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