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58회 손진길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계성고등학교를 주후 1971년 1월 15일에 졸업한 제58회 졸업생 손진길 목사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목사가 되고자 신학대학으로 진학한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일 하나를 회고하여 보면, 저의 계성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친구 김명용은 훗날 신학대학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고등학교 시절 제게 말한 적이 있지만 저는 그가 참으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저도 어느 사이에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김명용은 서울대 문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곧바로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하여 훌륭한 목사이면서 조직신학 교수이고 또한 그 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뛰어난 인물입니다.
저는 당시 계성고등학교에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던 특별반에서 3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1971년 3월초에 서울공대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며칠 전에 한국전력 원자력부에 입사가 되어 쌍문동에서 원자력관계 연수를 받고서 그해 6월 하순에는 고리원자력1호기를 건설하고 있는 현장에 투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순조롭게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기사로 생활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서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 저는 휴직을 하게 되고 계속 병간호를 한다고 그만 회사를 관두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예 전공을 바꾸어 행정학을 공부한 다음에 1981년 봄에 입법고등고시를 보고서 국회사무처에 사무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주로 위원회 실무직원이 되어 관료생활을 14년간 하다가 그만 똑같은 일을 그것도 3년마다 예산, 집행, 결산 등으로 반복되는 일을 일일이 살피고 검토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그만두고서 1995년초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후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생활하다가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목회자가 되고 지금은 은퇴하여 70대의 노년이 되어 동창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이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저의 과거일을 말씀드리는 것보다 한가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의 인생을 크게 바꾼 일이 계성고등학교 제45회 출신으로서 저의 중학교 3학년 당시의 담임인 은사 윤위한 선생님과의 귀한 인연에서 시작되고 있는데 그 사실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경주 출신입니다. 경주 황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 있는 경북중학교에 입학하고자 시험을 보았으나 그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에서 보결로 들어간 중학교가 미션 스쿨인 문화중학교인데 그곳에 젊은 윤위한 선생님이 부임하여 3학년 때 저희 반 담임을 맡았습니다.
저는 재학당시 윤선생님의 고향이 경주시 주변의 시골마을인 아화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문화중학교를 일찍 졸업하고 이번에는 경북고등학교에 응시하고자 대구에 있는 영수학원에서 2달간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입학시험 때까지 그 정도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영어와 수학 그리고 국어를 실력이 뛰어난 학원의 선생님들이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제가 상당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과목은 영어 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문화중학교에서 배운 수학과 국어가 영 빈약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절망했습니다.
그 정도의 실력으로는 3년간 실력 좋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대구의 뛰어난 학생들과 경쟁하여 경북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에 따라 고향에 있는 경주고등학교로 진학하겠다고 결심하고서 원서를 쓰기 위하여 모교인 문화중학교를 찾아가서 담임인 윤위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저의 사정이야기를 들으신 다음에 윤선생님이 제게 질문했습니다; “대구에는 경북고등학교 말고도 좋은 명문고등학교가 여럿 있는데 어째서 고향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려고 하느냐?”. 저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경북고등학교 말고도 사대부고가 있지요…”.
그 대답을 듣고서 윤선생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구에는 사대부고 말고도 명문인 계성고등학교가 있다. 어째서 그 학교에 진학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저는 대답했습니다; “계성고등학교는 사립이면서 귀족학교입니다. 등록금이 매우 비쌉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곳에 입학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대답을 들으시고 윤선생님이 빙그레 웃음기를 머금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대구 계성고등학교 출신이다. 시골인 아화 영천에서도 대구의 사립인 계성학교로 진학했는데 진길이 네가 어떻게 그곳으로 진학할 수가 없겠는가? 학비가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의 부친이 부담하면 된다. 내가 전화를 너의 아버지에게 내고서 허락을 받으면 진학할 수 있겠지?”.
딱 부러진 윤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나의 아버지가 그 정도로 많은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주시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계성고등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루겠습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는 단숨에 답변하셨다; “대구의 계성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다고 하면 등록금을 내주고 말고요. 그런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그렇게 나는 미션 스쿨인 계성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은사 윤위한 담임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교의 대선배가 되시는 윤선생님이 미처 나에게 당시에 말씀해주지 아니하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계성고등학교에서는 동창회의 지원을 받아서 매년 특차로 장학생을 50명씩 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 계통인 계명대학교에서 그 시험을 별도로 사전에 치르고 있다. 그에 따라 대구 경북은 물론이고 경남에 있는 중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의 졸업생이 그 장학생시험에 대거 응시하고 있다. 선발인원은 매년 50명인데 응시자가 무척 많은 것이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나는 계성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무난히 합격하여 운동장에 모여서 반편성을 하게 되었다. 1반부터 8반까지 8개의 반으로 합격자들이 편성이 된다. 담벼락에 팻말이 붙어 있고 그 앞에 호명이 되는 대로 줄을 서고 있다. 나는 8반으로 편성이 되었는데 학생수가 우리 반에는 10명이다. 기타 반에는 전부 60명씩이다.
그것을 보고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 8반이 꼬래비 반인 모양이다. 그래서 10명의 꼬래비들만 모여 있다. 이거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야 창피를 면할 것 같다!… “. 그런데 내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갑자기 교실에서 50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우루루 몰려들고 모두 8반의 팻말 아래로 모였기 때문이다.
교실로 인솔한 담임 황재호 선생님이 엄숙하게 말씀하신다; “여기 50명은 계명대학교에서 특차로 뽑은 장학생들이다. 거기에 입학성적이 좋은 10명을 합하여 우리 특별반이 편성되었다. 우리는 서울대학교 합격을 목표로 하여 앞으로 진학지도를 하고 함께 공부할 것이다. 그런데 입학시험을 보고 그냥 특별반에 편성된 학생 가운데 그 성적이 이상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며칠 후에 다시 한번 시험을 볼 것이다”.
그 말씀의 대상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나는 당시에 미처 알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날 개인별 입학성적을 조그만 종이에 접어서 각자에게 배부하여 주었는데 그 내용을 보고서 나는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내 성적이 681점으로서 전교 10등이었던 것이다. 내 눈을 의심하면서 내가 그 정도로 고득점을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임을 다음 번 시험을 보고서 곧 알게 되었다. 나의 성적이 박성웅과 함께 공동 6위인 것이다. 그 박성웅이 후에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평생 외교관으로 생활하고 나중에는 대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나는 서울공대를 나왔지만 나중에 행정고시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먼저 치르게 된 입법고시에 합격하여 입법부에서 공무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 서울법대에 진학한 동기가 2사람있지만 그들은 사법고시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세월이 많이 지나 아무 말도 없이 내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된 은사 윤위한 선생님이 오클랜드를 방문하여 내 소식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그때 우리 가족은 뉴질랜드에서 호주로 재이민을 떠나고 오클랜드에 없었다.
나중에 나는 시드니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하고 담임을 맡아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은퇴한 다음에는 오클랜드 North Shore에 정착하여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뜻밖에 계성고등학교 동창회 오클랜드 총무인 65기 채헌주 동문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 내용은 구글에서 나의 소식을 접하시고 은사 윤위한 선생님이 통화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전화 상으로 계성고등학교 대선배이면서 나의 은사인 윤위한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반갑고도 기쁜 일이다.
그와 같은 오랜 인연에 감사하면서 오늘은 은사 윤위한 선생님의 깊은 배려에 머리 숙여 다시금 인사를 드린다. 아무쪼록 주님 안에서 영육 간의 강건하심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동문 여러분의 건승도 빌어 마지 않습니다. 살롬!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입법고등고시 실시현황(1-14회 및 19회)(출처; 대학에 관한 모든 이야기) (0) | 2023.07.02 |
|---|---|
| 티스토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0) | 2022.07.07 |
| 성경공부에 이끌리어 결국 목사가 되다(작성자; 손진길) (0) | 2020.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