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장별강해(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제13장 강해설교

손진길 2026. 4. 3. 10:00

요한복음 제13장 강해설교

제목; “예수님이 성찬식 도중 세족식을 거행하시고 또한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변절을 예언하시다”(13:1-38)

작성자; 손진길 목사(26 43Good Friday 작성)

본문 요한복음 제13장의 말씀은 그 깊은 의미에 있어서 그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제3장 제13-16절의 말씀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3-16). 간략하게 풀이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인자(人子, son of man) 곧 사람의 아들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온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합니다. 그 이유가 누가복음 제1장과 요한복음 제1장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이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1:34-35),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2-14). 역시 말씀의 풀이 곧 그 의미의 해석이 다음과 같이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은 남자와 여자의 합방으로 말미암아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1:34). 먼저 성령님이 마리아에게 임하고 그 다음에 창조주의 능력이 그녀에게 역사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몸에서 탄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35).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창조의 과정을 거쳐서 모태에서 태어난 유일한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거룩한 영이신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1:14a, 4:24의역)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그 의미가 곧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입니다.

2)   하나님의 독생자가 하늘에 있는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고 친히 비천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신 이유는 두가지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 되어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1:29). 그것은 그 옛날 광야에서 뱀에게 물려서 죽어가고 있는 동족들을 살리기 위하여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어낸 처방과 같습니다(3:14). 장대에 놋뱀을 매달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나음을 허락한 것입니다(21:6-9).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그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셨기에 무덤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3:13b, 16). 그러므로 말씀을 간추려 보자면, 하늘에 있는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고 비천한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과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천국에 입성하는 승천의 비결이 되고 있습니다(3:13-16, 1:12-14, 1:35, 16:24).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러한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실천할 수가 있을까요? 그 깨달음과 실천이 사도 요한이 살아가고 있는 초대교회의 시대에 너무나 절실한 것이기에 그가 그 중요한 성만찬의 자리에서 스승 예수님이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에게 주신 말씀 곧 세족식(洗足式)의 이야기와 교훈을 본문 요한복음 제13장에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독생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15-16). 그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그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부디 용서하여 달라고 창조주 여호와께 간구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 것 뿐만 아니라 영원한 구원 곧 영생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3:15, 18:30). 달리 말하자면, 영생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무덤에서 영생의 몸을 얻어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그의 제자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3:13b, 16, 살전4:16-17). 과연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요? 그 증거를 위의 구절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이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1:35);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게 된 성령의 내주 역사하심과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이 그의 제자인 성도들에게도 임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이 자신을 방문한 공회원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신 말씀이 그러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거룩한 영적인 삶을 살아가며 훗날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3:5의역). 그러므로 그 말씀은 성도의 심령속에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게 되는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 그리고 함께 역사하시는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을 벌써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4:16-20, 23).

2)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성도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 답게 그리고 여호와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리가 충만한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희구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론이 성육신의 비밀에 숨겨져 있습니다(1:14a). 진실로 거룩한 자는 그 영광을 내려놓고 스스로 형제의 세상먼지가 묻어 있는 그 발을 손수 씻어주는 일을 실천하여야 합니다(13:12-14). 그 일은 세속적으로 주인이 아니라 종이 행하는 이른바 섬기는 일입니다(13:16). 그 일을 주인이 종이 되어 대신 행하는 그것이 진정한 주님의 사랑이며 소자(주님의 형제인 작은 자, 13:33, 25:40)의 영혼을 돌보고 살리는 길임을 예수님이 새로운 계명 곧 형제사랑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13:17, 34-35, 요일2:8-11).

3)    그것이 이른바 성도의 삶에서 교회안에서나 바깥에서나 참으로 요구되고 있는 섬기는 리더십입니다(13:14-17). 그와 같이 실천하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의 천국에 올라가는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13:17, 16:24, 19). 그러나 그와 같은 영적인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삶이 현실적으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가룟 유다처럼 이 세상에서 한번 크게 출세하고 입신 양명하고자 하는 육적인 욕구가 강하기 때문입니다(7:17-24). 그리고 사도 베드로처럼 자기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본능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8:25-27). 그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도 요한이 오래 기억하여 본문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13:21-22, 26-30, 37-38).

이상과 같은 말씀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차제에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금년 유월절에 대속의 십자가에 스스로 속죄의 제물로 희생되심으로 말미암아, 1:29, 12:27, 32-33) 세상을 떠나 (무덤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승천하심으로, 6:62-63, 7:33, 8:31)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3:13, 14:1-3)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6:37-40)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 가운데 가룟 유다가 선택한 것은 전자인 생명과 축복이 아니라 후자인 사망과 저주임, 30:29-30, 3:4-6. 영생구원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출세와 소원성취를 위하여 예수님을 배신하였기에 그 결과는 영생의 구원이 아니라 영벌의 심판인 것임, 3:22, 5:24-29)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5:22, 27)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13:1b),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스승 예수님이 최후의 유월절만찬 도중에 일어나 손수 수행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세족식이 세상에 남게 되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징표가 되는 것임, 5절과 1c)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순서에 따라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의 발을 씻기고자 하시니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식사를 위하여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은 그 집의 종이 하는 일이므로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어 주는 것은 세상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는 것임)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장차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섬기는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자연히 알게 된다는 말씀임. 실제로 그 의미를 십분 깨닫고 있는 노년의 사도 요한이 특별히 이 기사를 수록하고 있음)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제자의 분수를 지키고자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채로운 것임. 교회에서 지도자들이 섬기는 리더십의 본을 보이지 아니하고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면 순식간에 교회는 세속적인 조직이 되고 마는 것임. 그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본받는 지체가 아님, 16:24, 19, 1:21-23)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진실로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그 본을 따라 온전히 성도들을 섬기는 사도로 살아가고자 하는 베드로임, 21:15-19, 6:3-4)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여호와를 섬기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40년을 그와 함께 지낸 모세는, 2:16, 21-22, 7:23, 30)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모세를 호렙 산 불꽃 앞으로 부르신 여호와께서 그에게 단지 세상에서 더러워진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음, 3:5)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완전히 현세적인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수행 제자가 있다는 말씀임),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세상적인 소원성취를 위하여 스승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가 누구인지 영적으로 이미 분별하고 계시는 예수님이심, 6:64. 그러나 그 자의 회개를 기다리시므로 결코 그 이름을 발설하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음, 18-19, 21, 26-30)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그 세족식의 깊은 의미를)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군사부일체의 고대사회이므로 스승은 제자의 상전이며 주인과 같다는 것임)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의 질서를 깨고 역설적으로  스스로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이웃을 차별하지 말고 나와 똑같은 가치를 가지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여호와가 그를 돌보듯이 그렇게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라는 것임, 10:33-37. 그것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가 되는 진리이며, 10:25-28,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서 영생의 몸의 부활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 자녀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비결인 것임, 16:24, 18:28-30, 22:28-30)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제자는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서 그대로 배우는 것임, 5:19)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세상이치가 그러한 것이 맞음),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주님이 그와 같이 섬기는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 당연함. 그런데 그 일을 보시고 천국에 들어가는 영생구원의 축복까지 허락하시니 참으로 좋으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이심, 65:1-2, 17:10)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라나선 자들 가운데 예수님은 특별히 12명을 선택하여 수행제자로 삼고 3 6개월간 함께 먹고 마시며 복음 전파하는 공생애를 살아가심, 6:13-16. 그러나 그 가운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지 아니하고 그 반대로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스스로 희생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세상적인 소원성취를 위하여 말을 갈아타려고 함, 8:31, 9:31. 스승 예수를 떠나 유대교지도자들의 편에 서서 한번 손쉽게 출세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임, 26-30, 26:14-16. 그러한 미래지사를 예수님이 벌써 알고 계신다는 것임, 6:64)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41:9)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24:44-45)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미리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훗날 그 일이 실현되거나 성취될 때에 그것이 여호와의 창조적인 역사의 섭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기 위한 것임, 48:5-7)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8:28-30, 10:38, 12:44-45, 14:23)“(13:1-20);

(1)  본문 제1-6절을 살펴봅니다; 그 주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방법은 무엇인가?”(1b)라는 것입니다;

1)   노년의 사도 요한은 주후 90년경에 이 글을 쓰면서 먼 옛날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과 육신적으로 헤어진 지 벌써 60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옛날 예루살렘의 마지막 유월절만찬의 자리에서 베푸신 스승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그 행하심이 그리움으로 그리고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식(洗足式)을 거행한 것이며 그때의 감격스러운 가르침인 것입니다(13:3-5).

2)   건조한 ()사막성 기후를 가지고 있는 유대 땅입니다. 물이 귀하며 먼지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땅에서 손님에게 발을 씻을 물을 가져다 주는 것은 귀한 대접입니다(7:44). 더 귀한 것은 그 집의 하인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발을 종이 씻어줍니다. 그 이유는 발을 씻어주는 것이 종들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열을 중시하는 고대사회에서 종이 하는 일을 주인이 대신 행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더구나 주인이 종의 발을 씻어 주는 경우는 결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려고 하십니다(13:5). 제자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3)   그렇지만 윗사람이 갑작스럽게 행하는 일을 아랫사람이 쉽사리 말릴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괄괄한 베드로는 다릅니다. 한사코 스승을 만류하고 있습니다;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13:6). 그러나 세족식은 끝까지 진행됩니다. 특히 스승이신 예수님을 장정인 종의 몸값에 해당하는 은 30세겔에 팔게 되는 가룟 유다의 발도 씻어주게 됩니다(13:2, 10-12, 26:14-16, 21:32). 그 의식은 오늘 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하신 다음 말씀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4-15). 한마디로, 예수님의 세족식은 섬기는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   일을 추억하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 제자들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마지막으로 세족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증거로서 십자가를 지십니다(19:16, 30).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청산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은혜로 입게 되는 자들은 서로 섬기고 사랑해야만 합니다.

5)   사실을 미리 가르쳐주기 위하여 저녁 식사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13:3-5). 십자가의 사랑과 세족식, 가운데 제자들이 장차 흉내낼 있는 것은 세족식과 같은 섬김의 리더십 뿐입니다. 감히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겠다고 우길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십자가를 진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대속의 효과를 바랄 없습니다(32:32-34). 이유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선지자나 사람이 십자가를 진다고 하더라도 하늘로부터 대속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32:34). 일반 사람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신 여호와 이레의 대속의 제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22:11-14, 1:29).

6)   요컨대, 히브리서의 말씀 그대로 사람의 죄를 단번에 사할 있는 영원한 제물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어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7:27-28, 1:29, 3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사람들의 죄를 청산해 버리셨기에 이제 제자들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지 아니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후배들의 발을 씻어주는 사랑의 의식은 계속 행해야만 합니다. 세족식의 기본정신은 남을 낫게 여기고 스스로 그리스도 때문에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종으로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인생”(10:27-37)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인생으로 일관하는 삶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는 성도들의 삶의 방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13:1, 5, 15:9-12, 12:30-31).

(2)   본문 7-10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 나중에 알게 되는 세족식과 십자가 대속의 의미”(13:7)입니다;

1)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b) 사도 요한의 말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사도 요한은 이미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들은 바가 있습니다;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그렇지만 말씀의 뜻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단언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13:7b). 말씀은 스토리의 전개를 보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이지만, 사실은 제자들이 모두 듣고 있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하신 것입니다.

2)      언뜻 보면, 말씀은 오로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세족식의 의미를 나중에 알게 것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말씀은 예수님께서 조만간 지시게 되는 대속의 십자가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으며 또한 믿고 있는 그대로 그들의 메시아는 다윗의 후계자이며 다윗만큼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들의 메시아는 외세를 물리치고 옛날 다윗이 점령했던 제국의 , 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사이에 있는 넓은 땅을 다시 차지함으로써 시온의 영광을 세상에 떨치는 자입니다(15:18, 삼하8:1-14).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알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다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만 자신이 죽어야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이상한 이야기만 하시고 있습니다(12:31-33). 그러다가 어처구니없게도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에 의하여 맥없이 체포당하고 비참하게 십자가 형에 처해지고 맙니다(18:11-13, 19:16). 제자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엄청난 배신감이 몰려와서 그들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21:2-3, 14:50).

3)      모든 영웅들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히스토리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원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경우에 있어서는, 만약 메시아가 허무하게 체포당하고 처형되고 나면 만사가 끝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인간의 상상의 한계를 언제나 초월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두뇌로 모두 이해되고 예측가능한 일이 신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신은 믿을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즘 말로 신의 인간의 상상과 능력의 한계를 완전하게 초월하는 경지의 것입니다(4:24, 22:12-14). 신의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인 영생의 몸을 입고 3일만에 무덤에서 되살아나시고 40일후에 그대로 승천하시는 것입니다(20:11-18, 24:49-53). 그리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부활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17:24, 14:1-3, 8:35).

4)      다만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족식입니다. 세족식이야말로 앞으로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상에 세우면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목회해야만 하는지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무엇보다도, 양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더러움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세척하고 양들을 거룩한 자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섬기는 리더십 아니고는 전혀 불가능한 사역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끝까지 사랑하는 방법 상대방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 목자장이신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양으로 알고서 끝까지 책임지고서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생명을 얻도록 풍성한 말씀의 꼴을 먹이고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요한도 나중에 깨닫게 것이라고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13:7).

5)      다음 주제는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13:8b, 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 구절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매개체는 입니다. 물에 대하여 예수님이 이미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밤중에 은밀하게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3:5b)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말하고 있다고 쉽게 이해됩니다. 믿는 자에게 만약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고 내주하여 역사하시고 있다고 한다면, 자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모신 자입니다. 영적으로 이미 구원과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하나의 관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물로 거듭나는 으로 예수님이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6)      물로 거듭나는 무엇인지 세족식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다소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어야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먹고 마실 수가 있다는 의미가 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가 하나 있습니다; 일찍이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만났습니다. 그때 여호와는 그곳이 거룩한 곳이므로 모세에게 그의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3:5). 사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신발을 벗고 세상에서 묻혀온 먼지를 씻어내어야만 곳에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깨끗한 몸으로 그리고 의인으로 선다고 하는 것은 작게는 세족식이 필요하고 크게 보자면,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칭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을 사용하는 세족식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을 사용하는 칭의의 은혜 말하고 있습니다.

7)      그렇다면 성도들은 칭의의 은혜 의화(義化, justification) 되고 말씀을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성화(聖化, sanctification) 이루어 나가야만 합니다. 일은 사람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십니다(1:8, 24:49). 비록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중차대하지마는 일은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있을 때에 비로서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1:8).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이 오순절 날에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시작되고 믿는 자들이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며 세상을 이기고 천국으로 입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8)      하나의 주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몸이 깨끗하니라”(13:10b)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이미 깨끗한 의인이 되었다고 말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상명령을 실천해야만 하는 남은 인생에 있어서 더러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다시 구원을 받은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똑바로 수가 있을까요? 방법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몸이 깨끗하니라”(13:10b). 세상의 먼지가 묻은 발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으로써 씻겨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서로 용서하고 섬기며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이 있을 때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똑바로 수가 있을 것입니다.

9)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스승이 자신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그대로 두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만류했습니다(13:8a). 세족식을 거행하여야 예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 진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13:8b). 그것은 베드로가 진정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요청합니다(13:9). 그렇게 필요가 없다는 예수님의 대답이 10절과 같은 것입니다(10a). 그렇다면 예수님은 복음의 말씀으로,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로,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어 주심으로 베드로의 손과 머리를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초대교회 이후 성도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발을 씻어주고 더불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13:14-15, 17). 그것은 성도들이 남은 인생 동안 끊임없이 실천해야만 하는 새로운 계명입니다(13:34-35, 요일3:23-24).

(3)   본문 11-15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 “11. 이는 자기를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13:11a, 6:64b)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1)      마지막 유월절을 앞둔 만찬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는 의식을 행하시고 있습니다(13:4-15). 그것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날도 그러하지만 특히 서열이 엄격한 고대사회에 있어서 그것은 종이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경우는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는 그와 같은 소위 섬기는 자의 정신으로 서로 사랑하고 목양하여야 한다고 의미를 풀이하고 있습니다(13:13-15). 일찍이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3:5) 말씀하신 물로 거듭난다 의미가 세족식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대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리에서 스승을 배신하고 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3:10b). 여기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말의 뜻이 바로 11. 이는 자기를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것이라고 사도 요한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13:11a).

2)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바로 배신자이며 나를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에 30세겔을 받고서 팔아 넘길 자라고 직접 이름을 말씀하지 아니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렇게 자세한 미래지사를 모르고 계셨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아니하다는 점을 벌써 모세오경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4:36), “10.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34:10).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대강의 말씀을 교훈으로 주시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더구나 그들의 지도자로 세운 모세에게는 대면하여 직접 말씀을 나누시던 하나님이십니다. 나아가서 독생자에게는 여호와에 대한 모든 계시의 권한을 일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7.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계획을 모두 통찰하고 계신 유일하신 독생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의 배신의 시나리오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6:64).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 요한복음 13장에서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13:26b).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이름을 분명하게 거론하지 아니하고서 변죽을 울리고 있는 것일까요? 번거롭게 조각을 적셔다 주는 간접적인 방법을 취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유는 아직도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어거스틴은 그의 교회론에서 교회를 신앙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잘난 자식이나 못난 자식이나 품에 안고서 되기를 바라면서 양육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거룩해서 교회가 거룩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지체인 교회가 거룩한 것입니다(1:22-23). 성도들은 날마다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성결의 과정을 걷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넘어지면 서로가 일으켜 세워주고 함께 믿음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세족의 정신은 점을 강력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에 비추어서 가룟 유다에게도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한번 제공하고 계시는 선한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10:10-11).

4)      다음의 주제는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13)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많은 반대자들의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가운데에는 복음을 달리 해석하고 있는 율법주의자 원시적인 영지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생전에 예수님을 모셨던 12사도들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본토 유대인 성도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주의자 개인적으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아직도 전통적인 유대교의 율법생활을 매우 중시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도전에 직면하여 사도 바울은 많은 교리서를 작성하여 그가 개척했던 이방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냈습니다. 가운데 특히 자신의 사도성과 사도직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2.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9:2). 결국 사도성을 인정하고 사도직을 부여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겠지만 그것은 동시에 성도들의 인정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라는 바울의 설명입니다.

5)      그와 똑같은 말씀을 본문에서 예수님이 12수행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3-14). 나를 선생으로 대접하려거든 나의 가르침을 따르고 나를 주인으로 대접하려거든 주인의 손과 발이 되라는 것입니다. 12사도들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삼고서 지난 3 6개월 동안 동고동락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틀림없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신앙고백하고 있는 자들입니다(16:16). 한마디로, 나다나엘과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1:49b),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16b). 예수님이 선생으로서 제자들에게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겼으니 종들인 너희들도 주님의 손이 되어 서로의 발을 씻겨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가르침과 명령을 어기게 되면 예수님을 선생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또한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있지 아니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실천하면서 목자의 인생을 살아가라는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6)      하나의 주제는 본을 보이는 방법”(13:14-15)입니다; 선생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손수 본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2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강력한 시청각 교육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교육이 부족합니다. 인간은 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운데 청각은 5분의 1 쓰임새에 불과합니다. 완전한 확신과 인식을 위해서는 다른 감각기능의 도움을 받아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시각과 촉각의 도움을 크게 받고 있습니다. 물론 미각과 취각이 함께 하는 밥상공동체이면 더욱 완전한 분석과 확신을 갖게 것입니다. 나아가서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이라는 의식이 강화되고 공동의 운명체라는 인식에까지 이르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세족의식의 본을 손수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오감을 만족시키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있습니다. 남은 세월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자리에서 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특이한 가르침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장차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행하게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12수행제자들의 선생으로서 세족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장래에는 제자들이 새로 믿는 자들의 선생이 되어 그들에게 세족의식을 행하며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성숙한 성도의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장차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고 사도들은 그들의 선생이 것이라는 예언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7)      장차 새로 믿게 되는 자들을 12사도들이 선생이 되어 예수님처럼 그들을 돌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돌보는 방법은 몸소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뜻은 주인과 종의 관계의 정립이 아닙니다. 서로가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서 주님의 손과 발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주님이 행하신 일을 그들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인간관계를 가지고서 탄생하게 되는 신앙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은 일반사회의 조직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주종관계, 상하관계, 서열의식에 입각하고 있는 사회적인 조직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고 서로를 사랑하면서 섬겨야만 하는 새로운 조직체입니다. 요컨대,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손수 모범을 보임으로써 새로 믿는 자들을 양육해내어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강력한 가르침입니다.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14.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4-15).

(4)   본문 16-18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 무엇을 알고 행하면 복을 받을 있는가?”(13:16-17) 것입니다;

1)      예수님이 해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3:16-17).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종이란 주인에게 속해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의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주인의 뜻을 실천하는데 사용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종이 주인의 손발처럼 움직여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말은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성도는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뜻과 말씀을 좇아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보냄을 받은 자와 보낸 자와의 관계를 예수님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냄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보낸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2)      4복음서에 따르면, 독생자는 본래 창조주와 함께 있는 말씀이며 자신이 창조주입니다(1:1-3). 한마디로, 독생자와 창조주 하나님은 같은 본체이십니다(10:30, 2:6-7). 그러나 독생자가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을 하셨습니다. 비천한 인간으로,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크지 못합니다(13:16). 하나님의 아들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희생하고 헌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희생과 헌신의 결과로 하나님의 아들은 신원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본체의 영광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을 구원하는 뜻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의 뜻을 본문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부름꾼은 보내신 자의 뜻을 따라서 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역할은 파송자보다 결코 크지가 아니합니다(13:16). 크고 중차대한 일은 모두 주인이 알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종과 심부름꾼은 그저 간단한 일만 처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은 가벼운 것입니다(11:28-30). 이치를 알게 되면 세상살이에 있어서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복을 받은 자임을 알게 것입니다.

3)      다음의 주제는 주인을 해치는 종은 복을 받을 수가 없다”(13:18) 것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행동한다면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점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영리하다고 처신하게 때에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인의 뜻을 벗어나서 사익 종인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추구하게 때에는 아무리 총애하던 종이라고 하더라도 주인은 그것을 용납할 없습니다(14:13-14, 3:4-6). 그래서 가장 강력한 처벌을 내리게 됩니다(14:15, 3:22-24). 이스라엘의 전승에 따르면,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보좌를 탐내다가 사탄인 루시퍼가 되어 세상으로 쫓겨나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승이 반영되어 있는 성경의 기록이 이사야 14장입니다. 또한 창세기 3장에는 영리하지만 간교한 뱀의 이야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탄의 영이 뱀에게 들어간 것은 간교한 특성 때문인 같습니다. 간사하며 동시에 교활한 것이 간교함입니다. 구체적으로, 윗사람에 대해서는 간사합니다. 비위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어리석고 약한 존재에 대해서는 교활하게 속이며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올무에 아담부부가 걸려들어서 타락하게 됩니다.

4)      결과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심판을 행하십니다. 평생 동안 몸으로 기어 다니면서 흙이나 집어삼키도록 만드십니다(3:14). 이제 다시는 하나님 앞에 발로 서서 말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먹고 살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성과 지성을 잘못 사용하였기에 진노의 대상이 되고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는 대상이 가룟 유다입니다. 이상 예수님을 선생이며 주님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선생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배신을 꿈꾸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산헤드린 대공회에 밀고하고 자신의 출세와 안전만을 도모하고자 합니다(22:4-6).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서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야망의 달성과 안전과 영달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세상 것에 가치의 중심을 두고 있기에 하늘의 복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맙니다. 요컨대, 가장 복인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는 자가 바로 종의 신분을 망각하고 있는 가룟 유다인 것입니다.

(5)   본문 18-20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3:18b)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1)      떡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가족이나 한식구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중에 배신자나 반역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9. 내가 신뢰하여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41:9). 다윗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음모를 꾸며서 남편인 충신을 전사하게 만든 살인교사자입니다(삼하11:4-5, 14-20). 그때문에 다윗은 여호와의 징벌로 왕자의 반란을 번이나 경험하게 됩니다(삼하12:10). 압살롬 왕자의 반란을 맞았을 때에는 대부분의 친구와 신하들이 다윗 왕을 버리고 그를 대적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이 내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적으로는 한없이 친구와 신하들에게 섭섭했던 다윗입니다. 그때의 상실감과 절망감이 아득하게 묻어나고 있는 시가 위의 구절입니다(41:9).

2)      그와 똑같은 경우를 지금 예수님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36개월 동안이나 식구로서 동고동락을 했는데 선생인 자신을 버리고 가룟 유다는 배신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발꿈치를 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술책입니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후손도 여자의 후손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것이니라”(3:15). 그런데 여기서 하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후손입니다. 순수한 여자의 후손은 생물학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이 역사적으로 훗날 한번 하나님의 능력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3:15’ 예언의 내용입니다.

3)      예언 그대로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났습니다(1:18).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그렇게 성육신하신 것입니다(1:12-14, 3:16-17). 이제 예수님이 공생애를 끝내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십니다(13:1). 그리하면 무덤 속에서 사탄의 가장 권세인 음부의 권세를 부수어 버리고 부활할 것입니다. 일을 알지 못한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서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도록 획책하고 있습니다(13:2, 18). 사탄의 술책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승자박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역시 다윗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15. 그가 웅덩이를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17. 내가 야훼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7:14-17).

4)      다음의 주제는 선생이신 주님의 복음의 말씀,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것인가?”(13:19)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담겨 있는 세상구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점을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정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44.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라”(24:44-48).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예수님은 사탄의 수하가 되고 있는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십자가 대속의 길로 가게 것입니다.

5)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지금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유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대로 자신이 십자가를 것이며 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믿는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훗날 깨닫게 해주기 위한 것입니다(13:19). 예수님의 일생이 하나님 아버지의 세상구원의 계획에서 비롯되고 있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해준 복음의 말씀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과 신약의 복음이 동일한 메시지이기에 그것은 진리입니다. 다만 선민들은 히브리경전의 말씀을 자기본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였을 뿐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특권과 특혜에 도움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을 채택한 것입니다.

6)      결국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이스라엘로 편입되지 아니하는 구원이 없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자신들만 출입할 있는 성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율법과 할례를 자신들의 전유물로 삼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는 자에게는 동일한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사실을 지적하고 아버지 하나님 말씀의 본뜻을 명백하게 밝히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복음의 말씀으로,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입증한 것입니다. 선민 유대인들과 대적하였기 때문에 비록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지마는 그것이 승리의 길이 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님의 복음이 자신의 뜻과 동일한 것이며 진리이기에 땅에 전대미문의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것입니다. 요컨대, 창조주 하나님께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확실하게 판결하신 것입니다. 판결의 결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과 초대교회의 탄생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7)      하나의 주제는 복음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면 어떤 복을 받을 있는가?”(13:20)라는 것입니다; 심부름을 종을 영접하는 자는 심부름을 보낸 주인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3:20). 말씀에는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게 되는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임한다는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1:12). 그러므로 인생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운명이 달라지고 팔자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죽을 자가 살아나고 남을 해치고 자신만이 살고자 하던 자가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 변화 받게 됩니다.

8)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를 영접하는 자에게도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복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가지 종류의 사람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들고 찾아오는 예수님의 일꾼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자를 영접하는 것은 주인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자를 살리고 돌보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가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 자신을 영접한 것으로 간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과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상급이 주어진다는 내용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공관복음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5.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니”(18: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25:40b).

둘째로,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6:70-71),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스스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결코 그 이름을 발설하지 아니하시는 것임)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4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에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본인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음, 19:26, 21:20)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철부지의 행동이므로 사도 요한이 막내 사도이며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이종동생임을 드러내고 있는 대목임, 19:25-27, 15:40, 20:20-21. 실제로 최후의 만찬 그림이 그러함)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베드로가 막내인 요한에게 부탁하여 스승 예수님의 답을 듣고자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평소 예수님과 사도 요한의 친척관계를 잘 알고 있음, 25. 베드로가 갈릴리의 선주 세베대의 어선을 타고 고기잡이를 한 일꾼 출신이므로 그러한 것으로 보임, 21:20-21),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시몬 베드로의 부탁을 받은 그대로 사도 요한이, 24)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실명을 밝히는 대신에 떡을 떼어 가룟 유다에게 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음. 그것은 넌지시 짐작하도록 만들고 있는 절묘한 방법임),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스승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속을 훤히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면 가룟 유다로서는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가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살길이며 영생구원을 받는 길임. 그러나 그의 선택은 변함없이 스승을 배신하고 자신의 현세적인 출세를 도모하는 것임, 26:14-16. 그 순간 완전히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 감, 1:15, 8:2)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6:23-25, 47),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성령충만한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체포당하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되는 미래지사를 알고 계시지만 당시 수행제자들은 정치적인 메시아가 재건하는 다윗의 제국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어 스승과 가룟 유다와의 대화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임, 10:35-41),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공생애를 함께 살아가는 사제간 13인의 재정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가룟 유다이므로 계산에 밝고 세상적으로 영리한 사람임을 알 수 있음. 그러나 그 성품이 음흉하여 공금을 탐내는 자임을 사도 요한이 먼저 밝히고 있음, 12:6)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최후의 만찬이 끝나는 시간이 밤이며 그 밤에 예수님의 기도의 처소가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룟 유다가 유대교지도자들과 함께 체포조를 이끌고 와서 긴급체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임. 여호와의 독생자가 어두음의 세력에게 체포되는 그것이 어두운 밤 역사의 시작인 것임, 22:53, 23:44, 6:12)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12:28,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심으로 말미암아 두가지 영광을 얻게 되신다는 것임; 하나는, 앞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줄 수 있는 주님이 되시는 것임. 그것이 어린양 그리스도가 받게 되는 영광임, 5:12. 또 하나는, 무덤에서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가진 머리 권세 곧 음부의 권세가 깨어져 버리는 것임, 3:15, 8:1-2. 사도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그것이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 사망을 없애는 주님의 승리의 영광임, 고전15:20-26).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하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던 사탄의 권세가 깨어져버리는 것임, 3:13-18, 8:1-2. 성도들에게 악한 영이 쫓겨나고 성령님이 임하여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이 열렸으므로 창조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임, 11:20).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였으므로 천하 권세와 심판의 권세를 얻게 되심, 28:18, 5:22, 27) 33. 작은 자들아(그리스도의 형제인 소자들아, 25:40),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체포를 당할 때까지 잠시 동안임, 18:12. 그러나 그 사이에 제14-17장의 엄청난 예수님의 최후의 메시지가 나타나고 있는 것임)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8:21)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성찬식 도중에 예수님이 손수 수행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세족식의 모범을 따라 성도들은 교회에서 서로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임.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여 함께 영생의 구원으로 나아가는 새 계명인 것임. 그 점을 사도 요한이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초대교회에 있어서도 섬기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음)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6:24절에 기록되어 있는 제자도에 또 하나가 추가되는 것임)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8:21, 이 세상에 속한 목숨에 연연하여 베드로가 스승을 부인하지만 그가 회개할 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찾아가서 목자로 발령하심, 21:17. 그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이방선교자가 되어 끝까지 헌신함으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임, 21:17-19, 16:24)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그러나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한 것임, 18:25-27, 14:38)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18:25-27, 22:56-62)“(13:21-38);

(1)  본문 제21절과 제26-27절을 함께 살펴봅니다; 그 주제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하여 예수님의 심령이 왜 그토록 괴로운 것인가?”(13:21)입니다;

1)   예수님의 심령이 괴로우신 이유는 곧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13:21b)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만찬을 나누고 있는 12명의 수행제자는 지난 36개월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자들입니다. 이제 그 가운데 하나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줄 터이니 출세의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22:3-4). 그러자 유대교지도자들은 약간의 돈을 주면서 승낙한 것으로 보입니다(22:5). 한마디로, 스승인 자신을 배신하고 우선 약간의 돈을 받고 내부 고발자가 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22:6). 그 자가 지금 멀쩡한 얼굴로 자신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예수님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참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2)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정도의 일 때문에 그토록 심령이 괴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더 깊숙한 영적인 이유가 다음과 같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①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뜻이 바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6:39b)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 가룟 유다가 영원히 잃어버린 양이 되고 말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의 양심에 호소해보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떡 한 조각을 적셔다 갸룟 유다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13:26). 이미 그의 마음 속 계획을 알고 있으니 부디 마음을 돌리라는 권유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간절한 눈빛과 괴로운 마음을 외면하고 맙니다. 마지막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사탄이 마음을 완전하게 장악해버립니다(13:27a). 모든 일이 끝나고 있습니다.

3)   이제는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벌어질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씀이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13:27b)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가룟 유다와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6:40b)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릴 방도가 이제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떠나가고 남자로는 마지막 남아 있는 자가 12수행제자입니다(6:66-68). 그들이 이름하여 12사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땅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행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명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허무합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그지 없습니다.

4)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부고발자가 아니라 외부고발자만 있어도 됩니다(18:29-30, 19:7, 14:56-65, 15:3-4). 그런데 내부고발자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도 회계와 재정의 중책을 담당하고 있는 가룟 유다입니다(12:6). 신임하지 아니하면 결코 돈궤를 맡기지 아니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여 스승의 영적인 진리를 외면하고 배신합니다(12:6, 43, 딤후4:10). 이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쾌재를 부르며 모든 유대인들에게 흑색선전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와 끝까지 함께 지냈던 가룟 유다라는 제자의 말에 의하면, 예수가 전하고 있는 복음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고 혹세무민(惑世誣民, 무속적인 말과 이적으로써 세상사람들을 꾀는 ) 하면서 유대교를 반대하고 있다고 공포할 것입니다.

5)   이제는 하나님 아들의 복음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을 떠나간 모든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 시간이 임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1:29).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제자인 가룟 유다의 죄까지 용서해주고 싶어하십니다. 문제는 그가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서 완전히 회개하고 돌아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룟 유다는 스승의 기대를 끝까지 저버리게 됩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여러 차례나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부활의 예언조차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5:21, 11:25, 8:31, 9:31).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27:3-5). 사람이 자신의 죽음으로 사죄가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구원의 방도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 제물,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만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하여 사죄의 효과를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22:10-14, 1:29, 2:36-42, 4:12, 7:27). 스승 예수와 함께 공생애를 지냈던 가룟 유다가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조차 믿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판단과 생각만을 앞세우다가 결국은 자살로써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것입니다(27:5, 1:16-20). 결과 영광스러운 12사도의 반열에서 이름이 빠지고 대신 맛디아가 들어가게 됩니다(1:20, 26).

(2)   본문 22-30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는 막내사도 요한과 옆에서 자신의 궁금증을 대신 물어보도록 시키고 있는 사도 베드로”(13:22-25)입니다;

1)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12수행제자 가운데 사람이 자신을 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13:21). 그러자 제자들이 서로를 살펴보면서 과연 누가 선생을 배신할 자인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13:22). 그와 같이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3:23-30).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지금 80대의 노인이 되어 있는 사도 요한이 자신의 젊은 시절 한때를 무한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가지고 되돌아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글을 작성하고 있는 현재도 눈만 감으면 그때의 정경이 눈에 선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젊은 시절에 자신이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스승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음식을 먹는 막내 노릇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을 재삼 기억하면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13:23, 25). 지금 생각해도 스승은 심령이 괴로워서 마음이 참담한 실정인데 자신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송구할 따름입니다. 이제 60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당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 짐작하고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13:21). 철이 없기는 예수님과 나이가 비슷하여 12사도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의 심정을 모르고서 오로지 배신자가 누구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바로 묻기가 곤란해서 슬쩍 막내인 요한에게 대신 물어보라고 고개를 돌려서 눈짓하고 있습니다;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13:24-25).

2)      다음의 주제는 가룟 유다의 마지막 선택과 후의 역사 전개”(13:26-30)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인 막내 요한의 질문에도 가룟 유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라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13:26). 그렇게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한마디로, 가룟 유다의 회심을 끝까지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65:1-2). 그리고 당사자의 의사를 끝까지 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30:19-20, 3:20).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에게 보내어진 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6:39). 선한 목자로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10:11). 그렇지만 자신이 목자를 믿고서 따라갈 것인지 아니할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13:26). 그리고 선생인 자신이 이미 그의 배신행위를 알고 있으므로 일을 고만두기를 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완곡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마지막 갈림길에 서고 있습니다; “자신의 음모를 포기하고서 스승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서 따를 것인지, 아니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스승을 팔고서 그들의 신임을 얻을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자유의지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남은 인생이 결정될 것입니다”(22:1-6, 27:3-8).

3)      가룟 유다는 최종적으로 후자를 선택했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생명의 부활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5:29, 27:5). 그런데 인간에게 허용된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한가지 철이 없는 항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조주는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믿고서 모두가 구원과 영생을 얻도록 조치하지 아니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했을까요? 성경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 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여호와는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하고 있습니다(1:26). 유일하게 하나님의 성품인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선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빼앗아버린다면, 동물이나 로봇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없고 영원히 종이 수밖에 없는 신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역으로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평생 동안 그리고 영원히 종으로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살고 싶습니까?”

4)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 예수를 선생으로 그리고 주님으로 선택하고 하나님의 아들처럼 인생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것입니다(1:12-13, 13:13-17, 4:12).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주셨고 성령님이 강림하여 성도와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3:5, 14:16-20). 갈림길에 있던 가룟 유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승을 버리기로 최종결심을 하고 맙니다. 순간 사탄이 그를 완전하게 장악합니다(13:27). 그리고 미리 약속된 각본대로 이제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22:5-6, 13:30). 그의 인생에 있어서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13:30, 12:35-36). 만찬자리를 떠나서 밤중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산헤드린 대공회로 향하고 있습니다(13:30, 18:23). 참고로, 예수님이 얼마나 은밀하게 가룟 유다에게 떡을 떼어주고 조용하게 그의 의사를 물으셨는지를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27. 조각을 받은 사탄이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앉은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물건을 사라 하셨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13:27-29).

(3)   본문 31-35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13:31b)라는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1)      모든 계획은 이제 변경 없이 그대로 실시될 것입니다. 세부계획이 방금 확정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스승 예수를 팔고서 세상의 영광을 취하고자 최종선택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31. 그가 나간 후에”(13:31a)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만 가룟 유다가 자신의 불신앙 때문에 내부고발자가 되어버렸기에 이제 만민구원의 계획은 그렇게 확정된 것입니다(30:19-20). 세상에서의 모든 일은 조금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확정된 세부계획대로 차질 없이 역사를 섭리하실 것입니다. 점을 예수님이 너무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13:31b). 내용에는 가지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하나는, 일단 합의가 되면 하나님은 그대로 시행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합의의 과정에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계약이 성립되면 다음 실현의 문제는 신경 필요가 없습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기로 이미 약속하셨기에 언약에 상대방이 충실하기만 하면 100% 그대로 실현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이 있었으면 약속은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이기에 그대로 믿어도 됩니다. 다만 문제는 항상 신실하지 못한 인간의 성품입니다. 원칙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에는 상대방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사람이기에 당사자 본인의 신앙과 불신앙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신앙의 길을 달려갔다면 반드시 자신의 인생 가운데 그리고 영적인 가운데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헤세드하나님이심을 예수님이 철저하게 믿고서 지금 확정된 계획이 그대로 실현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제가 이미 성취된 것과 진배가 없기에 과거형이라고 하겠습니다(31b).

3)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사랑으로 그리고 영광을 주고 받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음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13:31, 17:21-24).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만민을 심판하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성취할 것입니다(3:16-17).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17:4). 아들이 작은 것을 드리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것을 주십니다. 그것이 무덤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생입니다(17:5). 영광을 장차 예수님이 누리시게 것입니다. 다음에는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누릴 있게 것입니다(13:32).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 중국에 대한 조공관계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변방의 왕이 조공을 바치면 중원의 황제는 여러 배로 답례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공사절을 자주 보내고자 합니다. 중국에서는 수를 제한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플러스섬(Plus-Sum) 게임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은 다릅니다. 구태여 수를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자로부터 그리고 믿음의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수없이 많이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빠짐없이 수십 , 또는 수백 배로 되돌려 주십니다(18:28-30, 42:10). 점을 이해하게 되면 신앙생활이 한결 즐거워질 것입니다.

4)      이제는 “33. 작은 자들아”(13:33a) 의미에 대하여 묵상해봅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1:1). 그러므로 창조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 세계는 결코 여호와 하나님만큼 위대하거나 수가 없습니다(13:16, 15:20).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경영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청지기를 창조하셨습니다.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1:26, 2:7). 사람 아담 에덴동산에 두고서 하나님이 손수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2:8-9, 15-17). 그런데 아담부부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가운데서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버리고 맙니다(3:22-23). 영생의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면서 놀라운 생명력을 계속 공급 받던 그곳 에덴동산이 낙원입니다. 이제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났기에 사람들은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에서 줄곧 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실락원의 죄인들이 의인이 되어 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릴 수가 있게 될까요? 창세기 이후 그것이 성경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5)      방법은 실락원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1:12-13). 그렇다면, 실락원의 사람들은 초라한 죄인들이고 천국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인이며 자들입니다. 여기서부터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 대비되고 있는 작은 개념이 도출되고 있습니다. 개념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신앙을 가진 자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 일단 회복하기 때문에 남은 인생을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은 초라한 죄인들이기에 작은 입니다. 나아가서 경쟁사회에서 뒤쳐지고 구조적으로 소외되어 생존의 위기에 처해져 있는 자들도 작은 개념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18:6, 14, 25:40).

6)      그에 따라 예수님의 관심은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실락원의 죄인들을 의인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것인가? 하나는, 고아나 과부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의 생명을 어떻게 하면 돌볼 있을 것인가? 입니다. 그들 작은 자들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점을 다음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7:34)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13:33). 지금은 천국에 없지만 나중에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방법을 13:34-35’ 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명입니다.

7)      계명, “서로 사랑하라”(13:34-35) 대하여 묵상해봅니다; 사도 요한을 흔히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계명으로서 서로 사랑하라 명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34-35). 명제를 그의 서신서에서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요일4:7-12). 명제의 출발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세족의 의식입니다(13:4-17). 공관복음에 없는 사건을 사도 요한이 대서특필하면서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세족의 사랑을 제자들이 서로 실천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7 사이에 기록되고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통하여 재강조되고 있습니다.

8)      내용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13:33 때문입니다. 지금은 천국에 없지만 만약에 사람들이 계명을 실천하게 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4:21, 15:9-17). 계명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 것입니다; “34.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제자인 알리라”(13:34-35).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습니다(10:11). 본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또한 선한 목자로서 남은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다(21:15-19). 그렇게 실천할 때에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주어졌던 영광이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주어질 것입니다. 영광이 바로 무덤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얻게 되는 영생입니다(21:7, 22:1-4).

9)      참고로, 사도 요한이 주후 90년경에 글을 쓰면서 서로 사랑하라 계명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소아시아 땅의 교회들이 서로 분파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성도들이 지역사회에서 인정받고 칭송을 받았습니다(2:43-47). 그러나 50 이상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서로 이견을 보이고 쉽게 용납하지 아니하는 풍조가 생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후 60년을 전후하여 그의 서신서를 작성하여 초대교회에 회람할 때에도 이미 분파는 있었습니다(고전3:3-9). 그렇지만 그러한 현상이 많아진 같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교회 내에서 성도 간에 사랑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요한의 지적과 같이 성도 간에 서로 섬기며 사랑하여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얻으신 부활과 영생을 제자들도 얻게 것입니다. 아무쪼록 점을 명심하시고 신앙생활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있기를 기도합니다.

(4)   본문 13장의 말미인 36-38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 13:36-38)입니다;

1)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유훈(遺訓, 마지막으로 남기신 교훈) 3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13:34).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신 것처럼 그렇게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서로를 섬기라는 것입니다(13:13-17). 그것은 상대방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는 명령입니다. 이유는 작은 자가 바로 자이신 예수님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8:5-6, 25:40).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스승이신 예수님, 나아가서 독생자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도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3:35).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양을 돌보라는 것입니다(21:15-19). 양들이 이끄는 데로 목양하면서 남은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 가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 양을 넣어 주시고 목자로 발령을 내시면 충성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서 제자들이 그렇게 목양해야 합니다(10:11, 21:19, 28:18-20). 복음의 일꾼으로 파송하시면서 먼저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20:21-23, 24:49). 그것은 이미 30 전에 작성되어 초대교회에 회람이 되고 있는 공관복음에서의 주님의 지상명령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28:18-20, 24:44-49).

2)      가운데 첫번째 유훈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주신 것입니다(13:3-4, 14, 34). 말씀을 듣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가슴이 섬뜩 했습니다. 수배를 받고 있는 스승이 무슨 일을 당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여쭈어 보고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b). 질문은 유명합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을 제자가 따라가고 싶어서 외치고 있는 말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천 가까운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 “쿼바디스, 도미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대 라틴어는 많은 소설과 영화의 제목이 되었으며 오늘 날까지 세상사람들에게도 매우 익숙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의 의지와 힘으로는 자신을 따라올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13:36-38).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의 자리까지 따라갈 없는 것이 제자들의 한계입니다. 주님보다 자신의 목숨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3)      그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무리 앞세운다고 하더라도 육신의 욕구와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외침을 잠재우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제자들의 경우에는 스승에 대한 배신감마저 겹치고 있습니다. 다윗의 후계자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외세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할 알았더니 예수님이 맥없이 체포당하고 처형장으로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요컨대, 메시아인 알았더니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배신감이 엄청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외치면서 3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18:17, 25-27). 그렇게 예수님이 벌써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13:38b).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하여 40일후에 승천하시고(24:44-53) 예루살렘에 남아서 끝까지 합심하여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오순절날 주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20:22, 24:49, 1:8) 강림하셔서 내주 역사하시게 되는 성령충만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2:1-4).

그때 보혜사 성령님이 베드로의 심령에 내주하여 강하게 역사하시게 되자 그가 본토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행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에 대하여 증거합니다(2:14-36).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함께 모여 신앙공동체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출범입니다(2:37-47).

그와 같이 훗날 주님을 따라가겠다는 사도 베드로의 마음 소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님의 임재를 통하여 베드로에게 역사하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본문에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미리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13:36b).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비로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유훈들, 목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제자들의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때에 비로서 가능한 것입니다(8:1-4). 요컨대, 말씀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과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주님이 가신 길을 끝까지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를 항상 드리고 결과  복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힘있게 실천하시는 성령충만한 삶을 너나없이 끝까지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사도들이 앞서간 거룩한 성도의 삶입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