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히스기야 왕의 불신앙을 보고 크게 실망한 이사야가 만민을 영생으로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뜻을 드러내기 시작하다”(사40:1-31)
설교일; 주후 2026년 11월 22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5년 8월 20일 수요일 작성)

선지자 이사야가 조국인 다윗왕조 유대왕국에 대한 기대를 모두 접고 있는 대목이 그의 선지서 제39장입니다. 주전 701년경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대의 왕 히스기야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주고 15년 수명을 늘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누란의 위기에 빠져 있는 예루살렘성을 구원하고 앗수르 침략군을 유대왕국에서 퇴각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어 그 두가지 사실에 대한 예언을 먼저 전하게 한 다음에 꼭 그대로 신위적인 역사가 발생하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던 악성 종기가 떠나가고 예루살렘성을 포위공격하고 있던 앗수르 병사가 천사에 의하여 전멸당하게 되는 광경을 목격한 자가 히스기야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와 영광을 대내외적으로 공포하고 여호와의 종으로 남은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로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의와 공로인 것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망명정부에서 온 사절에게도 앗수르를 물리친 유대왕국의 부와 강성함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한심한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왕 히스기야의 처신을 바라보고서 선지자 히스기야는 절망에 빠집니다. 선민의 나라 국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여호와신앙의 현주소가 그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백 년 남짓 지나면 신바벨론제국 갈대아군대의 침입으로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 왕의 행태가 다음과 같습니다; “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한마디로, 지독한 현세적인 이기주의자의 말입니다. 선민의 왕에게서 전혀 영생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내세에 대한 믿음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에 따라 본문 제40장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은 물론 모든 세상사람들이 직면하게 될 훗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선민들이 그들의 포로가 되어 이방제국 바벨론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사39:6-7). 그들이 충분한 징벌을 받고 노역의 때가 끝나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그 옛날 세상제국 애굽에서 그들을 해방한 출애굽의 역사를 다시 발생하게 할 것입니다(사40:1-2).
(2) 둘째, 가나안 땅에서 다시 살아가게 되는 그들에게 그 옛날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그들을 여호와의 군사로 조련하던 여호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올 것입니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먼저 나타나서 대속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백성들에게 소개하면서 주님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먼저 회개의 물세례를 받으라고 외칠 것입니다(사40:3-5).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라는 것을 선포할 것입니다(사40:6-11).
(3)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게 되면 무덤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새로운 시대가 전개됩니다(사40:12-14). 그것이 물질적인 이 세상이 장차 사라지면 영생의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대신 임하게 되는 말세의 시작입니다(사40:15-17). 드디어 지독한 현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된 이 세상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며 여호와와 어린양의 보좌가 새 예루살렘과 함께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됩니다(사40:18-26).
(4) 넷째, 그 천성으로 들어가서 믿음의 조상들이 희구하던 그 영생을 함께 누리게 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현세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마음을 모두 청산하고 오로지 남은 인생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만을 믿으며 여호와 종으로 끝까지 이 세상을 살아간 자들입니다. 요컨대,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야곱의 삶을 청산하고 남은 인생을 여호와의 종인 이스라엘로 살아간 자들입니다(사40:27-28). 그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권능과 상급과 면류관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사40:29-31).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구절씩 풀이하여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다윗왕조가 멸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노예생활하고 있는 선민들을)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예루살렘에서 끌려온 선민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라는 것임),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는 시기가) 끝났고(렘25:11-12),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성전을 재건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음).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히스기야 왕이 불치의 병과 침략군 앗수르로부터 구원하여 준 여호와의 은혜를 재빨리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하게 처신한 것과 같이 선민들의 행동이 지독하게 현세적이고 지극히 이기적이었기에 여호와의 처벌을 갑절로 받게 된 것임. 구체적으로,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고 그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수십년간 노예생활을 하게 된 것을 말하고 있음)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출13:17-22, 출애굽한 이스라엘자손을 여호와의 군대로 만들기 위한 훈련장소인 광야 또는 세례 요한과 같이 금욕생활과 영성훈련을 하고 있는 장소인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마3:3, 눅3:4)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눅3:5),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눅3:6).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3-4절 및 5a, 높은 산 깊은 골짜기와 같은 선민들의 교만하고 이기적인 구원사상이 아니라 평탄한 온 세상 땅끝까지 펼쳐지는 여호와의 만민구원사상을 의미하고 있음. 그리고 독생자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통하여 성도들이 창조주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됨을 말하고 있음, 요1:14-18) 6. 말하는 자(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동물은 식물인 풀처럼 연약하고 그 화려한 생명이 매우 짧다는 것임. 유식하게 말하자면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임),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식물이 창조주 여호와의 뜻에 따라 생노병사의 과정을 밟고 있음).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여호와가 사랑하는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한갓 풀처럼 생노병사의 과정을 밟게 될 것임)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그러므로 그 생명이 유한한 세상에서 영생을 얻으려 하는 자는 창조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여호와의 종으로 한평생 살아가라는 것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그 점을 배우라는 것임, 창21:33, 22:12-14.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여호와의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임, 마13:44-46, 4:4, 신8:3). 9. 아름다운 소식(그리스도의 영생의 천국복음과 대속의 죽음 및 부활 승천소식을 말함, 눅24:44-53)을 시온(Zion,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 요1:11)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창22:1-2, 대하3:1, 아브라함이 영생의 하나님을 만난 해발 800미터의 모리아 산 또는 믿음의 열조들이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해발 930미터의 헤브론 막벨라 굴이 있는 산, 창49:29-33, 히11:16, 요8:56)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선민들의 도성)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새 언약 시대를 여시는, 렘31:33)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주님께서 재림, 살전4:16)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요5:24-29).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눅22:28-30, 히11:26),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시23:1-3, 마4:23,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복음으로 가르쳐 주실 것이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보혜사 성령께서 선민 이방인 구별 없이 여호와를 찾는 자들의 심령속에 임재하실 것이며, 요14:16-20),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복음의 사역자로 온세상에 파송하실 것임, 마28:18-20, 요21:15-18, 눅9:1-6, 10:1-16, 24:44-49, 행1:8)“(사40:1-11);

(1) 본문 제1-2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과 같은 현세주의 이기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는 자가 겪고 있는 삼중고(三重苦, 노역과 죄와 벌)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①선민의 나라가 멸망하고 ②그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노예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 두가지의 벌입니다. ③또 하나의 벌은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노역의 시대가 끝나고 새 언약의 시대가 다가오게 될 것인데 그때 회개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현세주의 이기적인 생각에 빠져서 만민구원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면 영생구원의 기회마저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정치사회적으로 국민들의 수준이 곧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지도자의 수준을 말해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비슷한 수준에서 동일한 의식과 문화를 가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들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히스기야 시대 유대 백성들의 여호와신앙의 현주소가 바로 히스기야 왕의 신앙행태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예루살렘성의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는 말씀은 그 자체 히스기야 왕을 포함하는 모든 선민들에게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2) 그 적용의 폭을 넓혀보자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나 신앙심을 별로 찾아볼 수가 없는 이방인들에게도 장차 적용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에 의하여 그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제부터 그 깊은 의미를 각 구절을 살피면서 묵상을 통하여 풀이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제1절입니다;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여기서 ‘위로’라고 하는 것은 큰 슬픔을 당한 자의 마음을 달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슬픔을 당하게 될 것임을 먼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슬픔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멀리 가서 찾아보지 아니해도 됩니다. 바로 앞장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이 약탈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질로 끌려가고 왕의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장차 이국 땅에서 원수의 종으로 살게 될 것이다”(사39:6-7 의역).
1)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히스기야 왕이 두 번이나 자신과 나라를 살려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서도 배은망덕하게 남은 인생을 타락된 모습으로 살게 될 때에 그 자손들과 그의 백성들이 훗날에 당하게 되는 고통과 슬픔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배은망덕(背恩忘德, 은혜를 저버리고 베풀어준 구원의 사실조차 잊어버림)한 인생을 살게 되면 장차 그러한 슬픔을 당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2) 그런데 이사야는 스스로 위로함을 얻고 또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가 있을 것임을 전하라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얻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사40:1). 도대체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다음 제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둘째, 제2절입니다; “2. (a)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b)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c)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40:2); 장차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는 크신 위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원수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운명을 해방과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구주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실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사9:6-7, 11:1-16). 그와 같은 의미에서 각 구절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사40:2a); 참된 구원이란 마음속에서부터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구원이란 마음속에서부터 확실히 믿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먼저 회개하고 구원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예루살렘의 (백성들의) 마음’(사40:2a)이라고 먼저 언급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사40:2b); 힘든 노예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때가 되었으며 죄인의 신분에서도 벗어나게 된다고 하는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의 기쁜 소식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조금 더 살펴봅니다;
3) 선민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왕국이 망하고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이방 땅에서 살게 되는 그것이 노역의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벨론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에게 해방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과 고토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다시 믿음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세상에서 육체 가운데 갇혀서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자체가 노역의 때일 수도 있습니다(고후5:1-4). 그러므로 인생 가운데 구원주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노역의 때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의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롬8:2).
5) 죄의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해방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죄의 결과가 사망이기 때문에 죄에서 사함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은 사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메시아가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입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죄사함 곧 영원한 용서입니다.
6) 셋,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40:2c); 벌을 배나 받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사람의 죄 때문에 두사람이 벌을 받았다고 하는 의미와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나 자신이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가 또 나의 죄를 지고 그 벌을 대신 받고 있습니다(요1:29, 사53:5).
7) 하나님 앞에 죄를 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 죄를 바로 회개하고 벌을 청하면 그 한번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한번 용서를 받고 나서도 또 재범을 합니다. 그러면 가중처벌이 됩니다. 그렇게 잘못을 반복하여 짓고 있는 자들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 비상한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요?
8) 그것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메시아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얻게 함으로써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도록 만드는 방법입니다(롬8:1-2). 쉽게 말하자면, 메시아의 운명과 성도의 운명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작업입니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주인과 종을 하나로 묶고 공동운명체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9) 참고로 그 대목을 적어봅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4-5).
(4) 본문 이사야 제40장 제3-5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히스기야와 같은 삶인가? 아니면 아브라함과 같은 삶인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자 여호와의 은혜로 불치의 병에서 나음을 입고 15년 수명연장을 받게 되며 또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예루살렘성을 포위공격하고 있던 앗수르 군사를 전멸시켜버리는 기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바라본 선지자 이사야는 가슴이 뛰고 있습니다. 혹시 히스기야 왕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놀랄 정도입니다(요1:19-20). 하지만 그 다음 덤으로 15년을 더 살게 되는 히스기야 왕의 행동은 이사야를 너무나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생활태도이기 때문입니다.
1) 히스기야 왕의 남은 인생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의 태도가 전혀 아닙니다. 한마디로 정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이 죽기 살기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왔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또 기도하면 나라의 구원과 백성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착각입니다. 주인을 종으로 취급하고 어느 사이에 자신이 하나님을 하인으로 부리고 있는 주인인 셈입니다. 요컨대,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기도나 들어주는 하나의 우상으로 여기고 마는 것입니다(마4:5-7). 그러므로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우상 문화입니다(출20:3-5).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평생 청지기의 입장에서 여호와신앙의 모범을 보여야만 하는 제사장나라의 왕 히스기야가 남은 인생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를 살려주고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구해주었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잊어버리고 제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히스기야는 그저 남은 인생 가운데 예루살렘성에서 나라를 구한 왕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세상적인 영광을 실컷 누리면 그만이라고 하는 지극히 현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신앙인의 모습만 이사야에게 보여주고 마는 것입니다(사39:8);

3) 그에 따라 절망에 사로잡힌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히스기야 왕을 비롯한 자신의 동족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사40:1) 본문을 비롯한 제40장이하의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그와 같은 관점에서 각 구절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5) 셋째, 제3절입니다; “3. (a)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b)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c)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 하나,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이사야와 같은 여호와의 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사40:3a).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선지자들입니다(사1:2, 6:8-9, 겔2:4-5). 그리고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는 세례 요한입니다(요1:23). 나아가서 신약에서는 메시아와 그의 제자들입니다(마4:17, 행2:14). 그들이 모두 여호와신앙을 올바르게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 말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구절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40:3b);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자면 우선적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먼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12:1). 히스기야 왕을 비롯한 예루살렘성의 주민들은 그들의 도성을 떠나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성에서 천년만년 온갖 종교적인 혜택을 누리며 편안하게 한평생 살고자 하는 생각을 접어야만 합니다.
2) 그래서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로 나왔을 때에(출12:37-51) 비로서 인생과 생활의 절대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출13:20-22).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으면 먹고 자고 마시고 걷는 그 모든 일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신8:15-16).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켜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우상이 가득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십니다. 그들의 사명은 그 옛날 아브라함의 사명과 같습니다(창12:1-4). 하나님의 말씀을 원주민들에게 전하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행위’입니다(사40:3b)
3) 셋,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c); 중근동에서 고대문명이 꽃을 피우고 있는 곳은 큰 강의 유역들입니다. 곧 2강이 만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애굽의 나일강 삼각주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 두 지역을 잇고 있는 대상들의 길은 사막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막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4) 사막은 물이 적어서 동식물이 살기가 힘든 곳입니다; 그러므로 두 개의 문명권이 서로 교류가 적습니다. 그 결과 서로 좋은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문명권으로 이주하게 되면 아예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로 ‘부정을 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붙어 있는 차별적인 용어가 사실은 ‘히브리인’입니다(창14:13). 히브리인은 떠돌이이며 다른 문명권에서 살 곳을 찾아서 온 이주민입니다. 그들은 열등한 다른 문화와 종교를 지니고 있다고 일단 차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주민들이 함께 식사하거나 상종하기를 원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잘못된 누룩처럼 오염의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창43:32, 46:34).
5) 사막에서는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어서 남의 것을 서로 약탈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말렉 족속이 대표적입니다(출17:8). 몽골의 유목민들에게도 약탈식 정복문화가 남아 있음을 역사적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막은 그러한 곳입니다. 특히 사막을 건너서 다른 나라를 침략합니다. 그것은 침략의 길이 바로 사막이라는 의미입니다.
6) 어떻게 하면 사막을 하나님의 대로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한마디로, 사막을 건너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는 통로로 삼아야만 합니다. 주후 7세기 이후의 회교도들처럼 칼과 코란을 들고서 정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막을 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십자가와 성경을 들고서 사막을 건너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선함 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제19장에서 메시아가 오시면 복음의 대로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막에 건설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사19:23-25).
(6) 넷째, 제4절입니다; “4. (a)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b)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c)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40:4); 각 구절이 약간씩 다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사40:4a); 예루살렘성은 천혜적인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왜냐하면, 해발 79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면이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지하수로를 건설하여 성밖의 물을 끌어들인 다음에 오랜 기간 수성(守城)작전을 전개한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적들이 물러가자 다시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도성의 백성들은 철옹성 예루살렘성 안에서 안전하고도 행복한 세월을 보내고자 염원하고 있습니다.
2)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그러한 예루살렘성의 안이하고도 현세적인 신앙생활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적으로, 골짜기를 높이고 산과 언덕을 깎아서 평탄하게 만들라고 합니다(사40:4a). 그것은 적들의 공격에 매우 취약한 도성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말씀하시는 뜻은 안전한 성에 틀어박혀서 신앙 생활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서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전하는 자에게 예루살렘성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지켜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 그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간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이 살아 있는 그들에게 평생동안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시기를 너무나 좋아하십니다(출3:15, 마22:32). 물론 하나님의 기업도 그들에게 상속해주시는 것입니다(계21:6-7).
4) 둘,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사40:4b);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는 참으로 고르지 아니한 곳입니다. 그만큼 사회적인 차별과 불공평함이 많습니다. 더구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등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도 선민들의 독점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차별을 철폐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바로 잡으라고 하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은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더욱 구체적인 가르침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마5:1-20).
5) 셋,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40:4c); 세상에는 2가지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험한 길이고 또 하나는 평탄한 길입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어느 쪽일까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그것은 험한 길이며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마7:14). 그러므로 찾는 자가 적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평생 동안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극소수입니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일까요? 모두가 평탄하고 넓은 길로 다니다가 영생의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일까요?
6) 이사야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험하고 좁은 그 길을 메시아가 끝까지 가게 되고 또 그의 제자들이 그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그 길은 넓어지고 큰 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가면서 생명의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사66:20-21, 계21:24-27).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훗날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7)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0-1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15:22-23).
(7) 다섯째, 제5절입니다; “5. (a)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b)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40:5);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사40:5a). 그것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구원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1) 먼 훗날 사도 요한이 마지막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그와 관련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2)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까지 모두 부활시켜서 심판대 앞에 세운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가 결정됩니다. 부활의 몸을 입는다고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정확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소멸하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아 불 못 속으로 던져지게 되면 영원히 몸이 타는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눅16:24). 그것은 죽음과 소멸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3) 반대로, 그 부활의 몸을 입고서 심판대를 ‘그대로 통과’(free pass)하여 영생으로 들어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시는 육신의 욕심에 지배를 받아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꺾임을 당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롬7:22-25).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섬기고자 하는 그 마음이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육체를 부활의 몸으로 입게 되었으니 그것이 영생의 기쁨입니다.
4) 그와 같은 새로운 영생의 몸을 입고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그 영광을 영원히 찬양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사40:5a). 그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복음이 하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사40:5b). 창조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씀이므로 생명력과 창조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의 창조를 미리 바라보면서 그 말씀을 동족들에게 힘있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8) 본문 제6-11절에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 두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사40:6-8)와 “하나님을 보라”(사40:9-11)의 차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대에서 하나님을 직접 보는 시대로 역사가 전개될 것임을 본문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지 각 구절을 살펴보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9) 여섯째, 제6절입니다; “6. (a)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b)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사40:6); 여기서 ‘말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소리’는 선지자입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선포가 되고 있기 때문에 ‘말하는 자’가 마치 ‘선지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밀하게 그 내부관계를 묵상해보면 다음의 사실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1) 하나,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사40:6a); 선지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닙니다. 말씀의 종입니다. 곧 주인의 말을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마이크나 스피커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에게 선지자가 묻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칠까요?”(사40:6a).
2) 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사40:6b); 여호와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고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풀에 한 시절 피어나는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사40:6b 의역). 조금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 선민이라고 하는 너희들이 마치 풀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들판에서 나고 자라고 마르고 사라지는 풀과 무엇이 다른가? 그 육신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서로 자랑하고 있으니 그것은 더 한심한 일이다. 풀보다 존속기간이 더 짧은 것이 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한때 아름답게 피었다가 곧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될 것인가?
(10) 일곱째, 제7절입니다; “7. (a)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b)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7); 창세기 제2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영적인 삶이 가능한 생령으로 만들고 계십니다(창2:7).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코를 맞대고서 영적인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1) 이사야의 시대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성과 백성들을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사37:14-20). 그동안 애굽제국의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리며 성안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소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사라졌으니 마지막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2) 그것도 그동안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있었기 때문에 죄송스러워서 그저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간주하고서 심히 모독하고 있는 저 앗수르제국의 황제 산헤립과 그의 침략군대를 징벌해달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사37:17). 그렇게 부족한 죄인의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침략군을 물리치고서 예루살렘성과 유대왕국에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사37:34-37).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그후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3) 하나,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사40:7a); 구원을 받은 이후에 히스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의 행동을 보니 도저히 창조주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단이 다음과 같습니다; 한평생 예루살렘 성내에서 선민으로서의 기득권을 누리며 잘 살다가 죽고 나면 그만이라고 하는 현세주의 기복신앙의 모습이 만연되어 있습니다(사39:6-8).
4) 그것은 한마디로, 육신적인 삶을 탐닉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탄식이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사40:7a).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전달되지만 그러하지 못한 자에게는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그들의 육신적인 삶의 주기를 자연적인 법칙 그대로 주장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풀은 마르고 꽃은 더 빨리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사40:7a).
5) 둘,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7b); 히스기야 왕과 유대왕국의 백성들이 스스로 선민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세상에 자랑하고 있지만 그들의 신앙태도를 보니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들의 현세적이고도 육신적인 소원이나 들어주는 한갓 우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풀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사40:7b).
(11) 여덟째로, 제8절입니다; “8. (a)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b)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8);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선민 유대왕국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십니다;
1) 하나,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사40:8a); 계속 육신적인 삶에 탐닉하다가 풀과 같이 마르고 말 것인가? 세상적으로 누리는 영화와 육체적인 아름다움은 풀보다 더 빨리 사라지는 일장춘몽과 같을 것이다(사40:8a).
2) 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8b);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우고 깨달아 실천함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얻을 것인가? 이사야는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현세적인 구원과 복에만 매달리지 말고 부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을 깨닫고서 영생의 구원을 소망하라고 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사40:8b).
(12) 아홉째, 제9절입니다; “9. (a)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b)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c)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40:9); 여기서 ‘아름다운 소식’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며 곧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삶에 몰두하고 있는 선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지자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하나,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사40:9a); 무엇보다도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복음으로 유다의 백성들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선지자는 먼저 높은 산에 올라가야만 한다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그 옛날 모세처럼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직접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출19:3-6). 왜 그렇게 해야만 할까요? 다음 두 가지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2) 하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영생의 구원을 줄 수 있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유일하신 창조주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면 실효성이 없다고 하겠습니다(신8:3, 마4:4). 또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이 생기를 사람들의 코에 불어넣어주고 있습니다(창2:7). 따라서 선지자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옛날 에스겔 선지자처럼 사람들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말씀의 능력으로 불어넣어줄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가 되어야만 합니다(겔37:9-10).
3) 둘,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사40:9b); 선민들이 아름다운 구원의 소식을 복음으로 전하는 선지자들을 환영할까요? 그렇지 않다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유대교리 선민사상과 다르기 때문에 거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복음을 계속 주장한다면 해치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두려워하지 말고 목소리를 높여서 유다의 백성들에게 힘써 외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사40:9b).
4) 셋,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40:9c); 그러면 선민들이 그 아름다운 구원의 소식이 과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그 증거를 보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구원의 복음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증명해줄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가 그 정답을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그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사40:9c 의역).
5)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일찍이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일러주신 주의사항 그대로 피조물인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출33:20). 그렇다면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까요? 그 방법이 바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시고 사람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또한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모노게네스 , μονογενὴς)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나(그리스도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b);

6)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영적인 하나님을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보고서 그 교훈과 생애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 절정은 대속의 십자가 죽으심과 무덤 속의 부활 사건입니다(마27:50-54). 창조주 하나님만이 선지자를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켜 하늘로 승천시킬 수가 있습니다(행2:32-33). 그 사건이 장차 역사 가운데 현실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비로서 사람들이 재창조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보게 되는 영적인 삶이 이 세상에서도 제자들의 삶속에서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사야의 예언은 그 일이 발생하기 700년 전에 장래의 일을 예언하고 있는 진실로 소망에 가득 찬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하겠습니다.
(13) 열째, 제10절입니다; “10. (a)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b)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c)보라, 상급(구원)이 그에게 있고 보응(심판)이 그의 앞에 있으며”(사40:10);
1) 하나, ‘강한 자’(10a)는 세상을 이기는 자이며 세상의 권세를 쥐고 있는 악한 영들을 처벌하시는 자입니다(요12:31-32, 16:33). 앞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가 그러한 자라고 선지자 이사야가 벌써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사40:10a). 그리고 그는 구체적인 2가지의 예언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2) 둘,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사40:10b); 메시아가 죽음에서 부활하시게 되면 세상임금들이 쫓겨나게 됩니다(요12:31-32). 제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 시작하며 그 나라를 그리스도가 직접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40:10b).
3) 셋, “보라, 상급(구원)이 그에게 있고 보응(심판)이 그의 앞에 있으며”(사40:10c); 메시아가 아버지 하나님의 권한의 위임을 받아 친히 구원과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훗날 그리스도의 증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1-22),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7-29).
(14) 열한째, 제11절입니다; “11. (a)그(메시아)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b)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c)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1); 이사야는 참으로 알기 쉽게 메시아의 사역의 모습 3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하나, “11. 그(메시아)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사40:11a); 흔히 메시아를 목자, 그의 인도함을 받는 백성들을 양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시23:1-2). 이사야는 목자가 양떼를 풍성한 목초지로 안내하듯이 메시아가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양떼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입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b). 영육 간의 풍성함과 생명력이 그 말씀 가운데 넘치고 있습니다.
2) 둘,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사40:11b); 양을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목자의 일입니다(삼상17:34-36, 요10:11-15). 특히 대항능력이 약한 어린양을 먼저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좋은 목자입니다. 어린양을 모두 그 품에 안으시며 강력하게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잘 키워서 능히 원수와 그리고 세상과 싸워서 승리를 얻도록 양육하십니다(요16:23-24, 33, 17:15).
3) 셋,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1c); 전쟁이 나면 어떤 사람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까요? 피난을 가기에 부적당한 사람들이 먼저 적에게 살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19.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마24:19). 따라서 그리스도가 그들을 얼마나 안전하게 인도하시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욥38:4-18,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창조주이심을 말하고 있음) 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롬11:33-34,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홀로 섭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인 지혜와 권능을 말하고 있음)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제12-13절에 대한 강조임)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피조세계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 앞에 서는 피조물은 시공간에 갇혀 있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임, 창18:27, 사41:14), 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제15절에 대한 강조 용법임).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역시 제15절에 대한 강조임). 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출20:4, 제2계명을 명심하라는 것임. 피조물의 형상으로 우상을 만들어 창조주 여호와로 잘못 섬기지 말라는 것임, 출32:1-10, 33-35) 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사44:9-10,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신으로 섬기는 것이 우상이며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창조주가 전혀 아닌 것임, 출3:14, 요1:27, 30). 20.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데 그 이유는 나무로 만든 그것이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는 무능력자이기 때문임, 사41:7, 44:17-18)”(사40:12-20);

(1) 본문 제12-17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그 위상에 대하여 선민들에게 다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본문에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상에 대하여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모세오경에 이미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사야가 아까운 지면을 할애하여 동족들에게 다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크게 보아 2가지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이사야가 메시아의 시대를 내다보면서 하나님과 메시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미리 비유적으로 설명해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모세오경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선민들이 불행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 두번째 이유에 대하여 먼저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창조주의 위상과 그 권능에 대하여 핵심사항을 동족인 선민들에게 다시 설명해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천지만물의 유일한 창조주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서 마치 우상처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왕국의 왕인 히스기야의 신앙부터 그러합니다.
2) 유대왕국의 백성들은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였더니(사37:14-20)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성과 유대왕국을 구원해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사37:34-37). 또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였더니 불치병에서 고침을 받고 더구나 15년 목숨연장까지 받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사38:1-8). 그러므로 형편이 위급하게 되면 히스기야 왕처럼 기도만 하면 만사가 형통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선민들의 소원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들어 주어야 합니다. 만약 들어주지 아니한다고 하면 이스라엘의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출17:7).
3) 본질적으로 우상이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면, 그들의 현세적인 소원을 들어주도록 고안되어 있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그러한 목적으로 만든 도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그를 신으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항상 세상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적당한 명분을 제공해주고 또한 초월적인 능력으로 신적인 도움을 주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형상화 해 놓은 신이므로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우상이 별로 쓸모가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얼른 그것을 버리고 또 다른 신을 고안하여 만들어 세우고서 제사를 드리고 맙니다. 그렇게 ‘업그레이드’(upgrade)해 나갈 수가 있으나 참으로 편리한 도구입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선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그렇게 하나의 우상으로 대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그리고 지극히 집단 이기적인 소원 그것도 당장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실현시켜주는 신으로 이해하고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특징이 무엇인지부터 이사야가 다시 설명해주지 아니하면 안 되는 실정입니다. 근본적으로 선민들의 하나님인식이 타락하여 비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첫째, 제12절입니다; “12. (a)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b)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c)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d)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사40:12);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1) 하나,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사40:12a); 흔히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뜻은 사람이 그 작은 손으로 넓은 하늘을 가릴 수가 없듯이 사람의 약은 꾀와 속임수로 광명한 진리를 덮거나 진실을 가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밀려오는 바닷물을 막기 위하여 그 작은 손바닥으로 밀어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극히 일부분의 파도를 잠시 막을 수 있을 뿐 그 나머지 전부가 넘쳐흘러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가리고 또 그 옆을 가려가면서 한번 그 물의 양을 재려고 시도할지라도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손바닥은 결코 창조주가 만든 세계의 광대함을 계측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둘,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사40:12b); 사람이 손가락을 활짝 펴서 엄지와 검지로 한 뼘 한 뼘씩 하늘의 크기를 재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늘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혹시 날개를 만들어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태양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공위성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죽기 전에 도달할 수 있는 하늘이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전체 하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측정은 영이신 하나님만이 가능하십니다(요4:24).
3) 셋,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사40:12c); 여기서 ‘되’는 부피를 재는 도구입니다. 땅은 수많은 티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부피를 재기 위하여 사람이 ‘되’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티끌을 모두 담아서 잴 수가 없습니다. 티끌의 양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만이 가능한 부피의 측정입니다.
4) 넷,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사40:12d); 고대사회에서 넓이를 재기 위하여 손바닥, 길이를 재기 위하여 손의 뼘을 사용하고 있음을 위에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부피를 재기 위해서는 ‘되’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무게를 재기 위해서는 ‘저울’을 사용합니다. 그것도 두 가지 종류의 저울을 사용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접시저울과 막대저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 2가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5) 접시저울은 접시 위에 물건을 놓고서 그 무게가 얼마나 용수철을 누르는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용수철이 눌려지는 만큼 저울의 바늘이 움직여지도록 장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난히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막대저울은 추와 중심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물건을 매달고 다른 쪽에는 추를 매답니다. 그 다음에 그 중간에 줄을 매어 그것을 사람이 위로 당깁니다. 물론 그 당기고 있는 줄을 막대에 이동시키면서 무게중심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심에서 이동한 거리를 가지고 그 무게를 잴 수가 있습니다. 기준이 되는 추의 무게에 이동거리를 곱하게 되면 무난히 물건의 무게가 계산되는 것입니다.
6) 그런데 산과 언덕을 그러한 저울에 도저히 달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큰 저울을 만들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잴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 애초에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구만큼 큰 인류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잊어먹고 있습니다. 사람의 두뇌와 과학의 힘으로 지구의 무게와 부피 그리고 하늘과 바다의 크기와 용량까지 모두 잴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계측과 더불어 통제까지 가능하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이사야는 미약한 피조물이 마치 창조주가 된 듯이 뻐기고 있으니 그것이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기서 창조주의 권능과 그 위대하심을 선민들에게 다시 한번 각인해주고 있습니다.
(3) 둘째, 제13절입니다; “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40:13); 창세기 제1장을 보면, 제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우주 바깥에 운행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2구절을 합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그리고 그 역할을 분리해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의 영이 감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피조된 세계에는 많은 천체가 운행하고 있으며 많은 동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영이 일일이 돌보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이치를 꿰뚫고 있으며 자연의 운행과 역사의 섭리까지 관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창조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에게 그 누가 지도와 편달을 베푼답시고 감히 선생처럼 행동할 수가 있겠습니까?(사40:13, 롬11:33-36)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한마디로 방자한 행동입니다.
(4) 셋째, 제14절입니다; “14. (a)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b)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c)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40:14); 여기서는 앞의 절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라는 인칭대명사를 더 자주 사용하고 있으며 ‘의논’, ‘정의’, ‘지식’, ‘통달’이라는 사회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영과는 다른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짐작해볼 수가 있습니다. 이미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 제7장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제9장에서 메시아의 통치를, 제11장에서 메시아의 나라의 특징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선민들에게 메시아가 창조주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보여줄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1) 하나,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사40:14a); 메시아가 창조주의 신분으로 피조물인 사람들의 사회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사람들과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의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을 실천할 따름입니다(요6:38). 그러므로 그 문제에 관하여 메시아에게 교훈을 베풀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사40:14a).
2) 둘,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사40:14b);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자기들 사회의 전통이나 관념이 옳다고 우기는 그것이 사실은 정의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정의는 아전인수격이며 집단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개념의 정의를 하나님의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메시아 앞에서 주장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사40:14b).
3) 셋,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40:14c); 사람들의 지식에 속하는 신학이나 교리로써 메시아가 전해주는 구원의 이치를 대신할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장차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선민들은 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메시아에게 선민들의 율법적인 지식이나 유대교리에 의한 구원의 길이 더 맞는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사40:14c).
(5) 넷째, 제15절입니다;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사40:15); 하나님이 만민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시는 메시아의 위상이 창조주의 그것과 같습니다(요10:30). 구체적으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앞에 서게 되면 열방이 큰 통속에 가득 담겨 있는 물 가운데 퍼낸 한 방울의 물과 같습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티끌을 달고 있는 저울에서 얻어낸 하나의 작은 티끌에 불과합니다. 먼 나라 섬들은 그 작은 티끌에서 흩날리는 먼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참으로 창조주의 권세를 가지신 메시아 앞에서는 티끌과 같은 미물이 바로 피조물인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사40:15의역).
(6) 다섯째, 제16절입니다; “16. (a)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b)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사40:16); 이사야의 비유는 더욱 선민들에게 친근한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성전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었다고 선민들이 자신들의 헌신과 희생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 레바논 자체도 창조주 앞에서는 땔감으로도 부족한 것인데 레바논의 나무로 지었다고 하는 성전의 봉헌이 무슨 큰 생색거리가 될 것인가 하는 관점입니다(사40:16a). 그러므로 예배당이나 성당을 무지하게 화려하게 최상급으로 지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부끄러운 소치라고 하겠습니다(출20:24-26). 더 도전적인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가축을 번제로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제물로써 부족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사40:16b).
2) 백성들의 죄는 태산과 같은데 기껏 가축의 일부를 드려서 번제를 드린다고 하여 그 죄가 다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많은 제물을 바쳤다고 하는 자부심이 아닙니다. 사실은 너무나 부족하지만 부디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 어린양을 메시아로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창22:13, 사53:5-7, 요1:29)이라고 미리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7) 여섯째, 제17절입니다; “17. (a)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b)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사40:17); 이사야가 마지막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1) 하나,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사40:17a);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나라와 민족이 아무 것도 아니며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사40:17a). 사람들은 스스로 위대한 창조물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지식의 성장과 체계화가 과학의 이름으로 특정분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경지를 건드리고 있다고 그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대망상입니다. 특히 선민들의 경우에는 교만이 더 심합니다. 창조주가 자신들의 성전에만 임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제물에 굉장히 감격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선민들 자신들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도구로 쓰임을 받는 종들이 오히려 주인을 능멸하고 있는 셈입니다.
2) 둘,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사40:17b); 그와 같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경고가 다음과 같이 정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b-10),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한마디로,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되면 그들을 없는 것같이 제거할 수가 있으며 그 나라를 빈 것처럼 버려버릴 수 있으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사40:17b).
(8) 본문 제18-26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 사람이 만든 형상인 우상과 다르다(사40:18-20). 둘, 땅에 살고 있는 사람과 다르다(사40:21-22). 셋, 사람이 만든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이 없다(사40:23-24). 넷, 하나님은 천지만물과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사40:25-26). 그 가운데 여기서는 제20절까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9) 첫째, 제18절입니다; “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40:18); 창세기 제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것이 사람들입니다(창1:26-27). 사람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그 특징이 다음과 같습니다;
1)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이신 하나님의(요4:24)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흙으로 빗은 사람의 육체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보이는 겉과 보이지 아니하는 속 가운데 어느 것이 하나님을 닮아 있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삼상16:7, 롬7:22-25);

2)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빗으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고 계십니다(창2:7). 그 결과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서 움직이는 영혼을 가진 인간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받아서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하겠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사람의 영혼이 마음을 지배하고 육체를 움직여 나갈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의 관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아담과 같은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창2:7-8).
3)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보이는 형상이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입니다(창5:1-4, 출20:4-5).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출32:4-10). 그리고 보이는 형상과 모양이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이치에 맞지 아니하는 것입니다(사40:18).
(10) 둘째, 제19절입니다; “19. (a)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b) 장색(goldsmith)이 금으로 입혔고, (c)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사40:19); 이사야가 사람들이 만든 우상의 2가지 종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금속으로 만든 우상입니다. 또 하나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우상입니다. 먼저 금속으로 우상을 만드는 과정이 다음과 같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이 정성을 기울여서 힘있는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강한 금속으로 주물을 떠서 만들도록 장인에게 부탁합니다(사40:19a). 주물로 만든 우상에 금박을 입히고 치장을 합니다(사40:19b). 은 사슬을 만들어 그 신상을 꾸미게 되면 귀한 주신이 되는 것입니다(사40:19c). 예를 들면, 시돈의 주신 바알이 그러합니다(왕상16:32).
(11) 셋째, 제20절입니다; “20. (a)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b)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사40:20); 가난한 사람들은 값비싼 우상을 주조하여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단한 나무를 선택하여 그것으로 우상을 조각합니다(사40:20a). 주로 아름다운 여신을 만들어 달라고 목공에게 부탁합니다(사40:20b). 그렇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처럼 여신을 조각하여 목상을 세우게 됩니다. 마치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신7:5, 왕상16:33).
셋째로,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선재성을 가리키고 있음, 창1:1-19, 요1:1-5, 27, 30)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창조주 여호와가 피조세계의 보이는 하늘 곧 궁창에 강림하시게 되면, 출19:16a, 18a)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지상의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은 여호와의 영광 앞에 마치 벌레처럼 그저 두려워 떨게 된다는 것임, 출19:16b, 그것은 단단한 피조물인 바위산도 마찬가지임, 출19:18b).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피조세계의 보이는 하늘이 거대하다고는 하지만 창조주 여호와의 영광 앞에서는 단지 임시천막에 불과하다는 것임. 우주 바깥에 존재하는 천국의 규모는 측량할 수 없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음, 시19:1, 4, 왕상8:27, 계21:1-2), 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세상임금이 쫓겨나고 세상의 지혜자들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는 것임, 사11:1-4, 요12:31-32, 롬11:33-34), 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세상의 권력자와 지혜자들은 창조주 여호와의 권능과 지혜로 이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새언약의 시대에 설자리가 사라지고 말 것임. 그러므로 사라지는 하늘과 땅에 미련을 가지지 말고 그리스도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영접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바라보라는 것임, 사65:17-18, 요1:12-13, 계21:1-2, 히11:16).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이 세상 피조물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임).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말씀으로 이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명심할 필요가 있음, 창1:1-31).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야곱이 이 세상의 불공평함을 불평하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세상적인 형통과 구원을 베풀어주지 아니한다고 원망하고 있지만 그것은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과 아가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임, 마5:43-48)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피조물인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심과 한없는 지혜를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는 진술임, 롬11:33),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성화를 이룰 수 있도록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능력을 부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임, 요14:16-20, 행1:8, 2:1-4, 롬8:1-4, 37-39),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단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면 실패할 것임),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그러므로 복음사역자는 오로지 내주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영적인 능력으로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경건한 성도로 살아가야 하는 것임, 마28:18-20, 요14:1-3, 16-20, 눅22:28-30)“(사40:21-31);
(1) 첫째, 제21절입니다;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사40:21);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동족들인 선민들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다음의 사항을 다시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모세오경만 보더라도 여호와신앙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기록 위에 튼튼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열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훗날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출애굽의 기적을 통하여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출3:14-15, 9:14-18, 12:12).
2) 이른바 여호와신앙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 것입니다(창15:1, 17:1, 출20:1-11, 신6:4-9). 그러므로 창세기 제1장이 하나님신앙의 시작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제1장 제1절을 믿지 아니한다면 여호와신앙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창세기의 기록이 끝나고 출애굽기에 들어서게 되면 소위 여호와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 신앙상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의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인류의 역사와 자연의 질서를 주장하고 계시는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에 빠져서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출17:7). 그에 따라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세에게 직접 가르쳐 주십니다. 그 점을 선지자 이사야가 재삼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구절풀이를 통하여 그 점을 알아봅니다;
(2) 둘째, 제22절입니다; “22. (a)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b)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같이 치셨고”(사40:22); 이사야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땅 위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동족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1) 그 거처와 존재의 차원이 사람과 틀리므로 다음과 같이 그 생각과 뜻도 사람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 이는 내(여호와) 생각이 너희(이스라엘 자손들)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여기서 이사야는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내려다 보실 때에는 땅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은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사40:22a). 그리고 하늘 자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 높이 끝간 데가 없이 펼쳐져 있는 우주 바깥의 수막(창1:2)은 하나님이 손수 펼치신 차양(canopy)과 같다. 그리고 그 하늘이라고 하더라도 성막처럼(출25:8-9, 40:34-35) 하나님의 거처를 모방하고 있는 천막에 불과한 것이다”(사40:22b의역);

(3) 셋째, 제23절입니다; “23. (a)귀인들을 폐하시며, (b)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사40:23);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마6:10). 이사야의 동족인 선민들도 그렇게 간구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이 땅 위에서 자신들의 인생 가운데 실천하기를 작심하고서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그들의 인생도, 그들의 나라도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나라의 지도자나 종교적인 지도자들도 그 존재가치가 상실되고 맙니다. 구체적으로, 나라가 망하며 왕과 귀족들의 기득권과 귀인의 신분이 사라지고 맙니다(사40:23a). 여호와신앙을 백성들에게 바로 가르쳐주지 못한 사사들도 헛된 종교적 행사만 관장하다가 그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고 말 것입니다(사40:23b).
(4) 넷째, 제24절입니다; “24. (a)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b)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마른풀) 같도다”(사40:24); 이사야는 동족들인 선민 유대인들의 여호와신앙의 깊이가 무척 얇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다. 그 뿌리가 겨우 생겨나고 있다”(사40:24a의역)는 것입니다.
1) 그 결과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는 환난이 찾아올 때에 모두들 뿌리가 뽑혀서 마른 풀처럼 바람에 날려가고 만다는 것입니다(사40:24b, 시1:4, 마13:21). 환언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한평생을 살게 되면 그 결말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2) 한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 뜻을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서 영생을 얻는 영혼이 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사람들의 그 육신적인 삶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요?” 이사야의 표현 그대로 인간이란 겨우 지구의 표면에 엉덩이를 붙이고 살고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3)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지구의 중심까지 이르는 두께 6,366km 가운데 겨우 표토층 10km 정도에 삶의 터전을 가지고 있는 인류입니다. 그 내부는 온통 불 못과 같은 용암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계20:14). 그러므로 이사야의 표현 그대로, 겨우 심겨져서 한 평생을 위태위태하게 살고 있는 불쌍한 인생들이라고 하겠습니다(사40:24a&b).
(5) 다섯째, 제25-26절입니다;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 (a)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b)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c)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25-26);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그 의미를 풀이해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사40:25);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하나님의 지위를 침범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존재도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권능에 대하여 비교할 대상이 되지 못하며 동등한 창조주라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사14:12-15);

2) 둘,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사40:26a); 창조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내부에서 복수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시사하고 있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복수의 형상이 하나의 하나님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11:7-8). 복수의 개념이 여호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1.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여호와의 말씀이 독립적인 인격으로 아브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십니다.
3) 이사야서에서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메시아가 창조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11:1-2). 메시아에게 성령님이 강림하여 함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4) 셋,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사40:26b);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 대하여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한대로 식물과 동물을 만들어내라고 하십니다(창1:11, 20, 24). 그러면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생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들을 돌보십니다.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돌보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그 일을 일부 맡아서 수행하고 있는 인물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발탁된 에덴동산의 경작자 아담입니다(창2:15, 19).
5) 넷,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26c);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피조물들은 어길 수가 없습니다. 빠짐없이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실 때에 모두가 심판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요5:28-29). 만약 불복종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소멸과 새로운 창조가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면 심판입니다. 그 마지막 단계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라고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사65:17). 참고로,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계속형이라는 사실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6.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7.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사48:6-7). 지금도 새로운 인생과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6) 본문 제27-31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오해하고 있으며 무엇을 알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동족들에게 다음 3가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①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2가지(사40:27). ②창조주의 능력과 의도에 대한 설명(사40:28-29). ③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엄청난 축복과 은혜(사40:30-31) 등입니다. 과연 그러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지금부터 본문의 각 구절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7) 첫째, 제27절입니다; “27. (a)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b)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사40:27); 여기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개인적인 이름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은 개인적이든지 또는 집단적이든지 간에 2가지의 항변을 하나님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갈 길을 인도해주시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여쭈어 보아도 도무지 답변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묵묵부답’(no comment)의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는, 다른 나라나 민족과의 갈등에 대해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속 시원하게 처리를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과 같습니다.
(8) 둘째, 제28절입니다; “28. (a)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시는 이는 (b)피곤하지 않으시며, (c)곤비하지 않으시며, (d)명철이 한이 없으시며(Hast thou not known? Hast thou not heard, that the everlasting God, the Lord, the Creator of the ends of the earth, fainteth not, neither is weary? There is no searching of his understanding, KJV)”(사40:28); 과연 하나님께서 아니 계시며 전혀 개인적인 문제나 민족적인 문제에 대하여 개입하시거나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선지자 이사야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고 그의 동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땅끝에 이르기까지 천하만물과 만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사40:28a).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속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1) 하나, “피곤하지 않으시며(fainteth not)”(사40:28b); 기진맥진하는 것은 유한한 수명과 한시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이나 인간의 속성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르십니다. 영원히 샘솟는 힘의 소유자이므로 힘이 지쳐서 쓰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2) 둘, “곤비하지 않으시며(neither is weary)”(사40:28c); 사람들은 관심과 인내에 있어서도 한시적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며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실증을 내지 않고 끝까지 관용하시면서 모두 고쳐서 사용하려고 하십니다(사19:22).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며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견인’(堅忍)의 은혜입니다.
3) 셋,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There is no searching of his understanding)”(사40:28d); 부모가 자식을 더 잘 이해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자식이 부모를 더 잘 이해하고 있을까요? 부모가 자식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식을 낳아서 직접 길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직접 창조하여 그 인생과 역사를 지금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를 관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이해력 그 명철하심에 대하여 시비를 건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무지의 소치일 따름입니다.
(9) 셋째, 제29절입니다;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He giveth power to the faint, and to them that have no might he increaseth strength, KJV)”(사40:29); 그러므로 깨닫고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그리고 자기 민족에게 무관심하시며 돌아보지 아니하신다고 사람들이 불평불만을 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정당하지가 못한 시비에 불과합니다. 삶에 지쳐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것만 같은 자에게(to the faint) 살아갈 능력을 다시 생기로 불어넣어주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체력이 바닥이 난 사람에게(to them that have no might) 새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이 삶의 용기를 회복하고 창조주로부터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10) 넷째, 제30절입니다;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사40:30); 사람들은 아무리 젊다고 하더라도 육체적으로 체력이 바닥나고 정신적으로 피곤해지면 아무 일도 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무기력해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장정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살이에서 넘어져 쓰러지게 되면 다시 일어나기가 힘이 듭니다(사40:30). 그렇게 연약한 인간들을 고치고 회복시켜서 한평생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만민을 돌보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입니다(마5:45). 그와 달리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특별한 은총이 있음을 다음 절에서 이사야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11) 다섯째, 제31절입니다; “31. (a)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b)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c)달음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d)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1); 특별한 은총은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앙망’(仰望, 믿음과 소망, waiting upon the Lord, KJV)이라고 하는 것은 영생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한평생 여호와신앙을 가지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믿음생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신앙의 모습이 “waiting upon the Lord” 곧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결정에 따라서 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창17:1, 마26:39, 42).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창조주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여 한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새 힘’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사40:31a).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새 힘’이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사40:31b); 솔로몬의 말과 같이 사람의 육신은 땅으로 내려가지만 그 영혼은 창조주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됩니다(전3:21). 죽어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도 여호와신앙을 올바로 가지고 실천하는 자에게는 그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위로 올라가듯이 여호와 경외자의 영은 창조주와 교제하는 놀라운 은혜를 그렇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롬8:1-15).
2) 둘, “달음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사40:31c); 여호와 경외자의 혼적인 삶, 곧 그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어떻게 사용될까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열심히 할 수 있도록 강건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은 마치 모세가 120세가 되어도 그 눈이 쇠하지 아니하고 그 정신과 육신이 강건한 것과 같습니다(신34:7);

3) 셋,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1d); 여호와 하나님 경외자의 육체가 강건해지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75세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아비의 집을 떠나 이방 땅 가나안으로 독자적인 선교의 길에 나섭니다(창12:1-4). 그후 100년 세월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게 됩니다(창25:7). 무자식이었던 그가 아들 8명을 낳아서 모두 분가시킬 정도로 하나님께서 그를 튼튼하게 돌보시며 역사해주신 것입니다(창25:1-6, 9).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여호와 하나님 경외자로서 평생을 살아가게 되면 동일한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험한 인생길을 아무리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끝까지 동행하시며 보호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사40:31d, 요14:16-20, 롬8:35-37).
결론적으로,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인 유대인들이나 히스기야 왕의 여호와신앙의 현주소를 쳐다볼 때에는 가슴이 답답하고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급하게 되어 다 죽게 되면 그때서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그러나 막상 목숨을 구해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입니다. 또 남은 세월을 제 마음대로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를 앙망하고 있습니다.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되면 예루살렘 백성들을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제멋대로 살 수 없도록 아예 메시아와 공동운명체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는 그 현장에 메시아께서 들어가셔서 노역이 끝났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운신을 못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 죄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한 벌을 배나 받게 되었다고 가르쳐줄 것입니다. 종의 벌을 주인이 함께 받고 있으니 배나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그 은혜가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동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안주하여 살고 있는 죄인들이 징벌의 슬픔에서 벗어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복된 소식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이 세상에서 죄와 사망에 종 노릇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위로 곧 진정한 해방의 메시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처럼 남은 인생을 안이하게 예루살렘성에서 종교생활만을 영위하지 말라고 동족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와 사막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훈련을 받고서 살아갔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평생동안 이방인 지역을 떠돌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떠한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갔는지를 상기하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 의미를 새겨볼 수가 있습니다.
장차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만의 안전지대에 틀어박혀서 구약시대의 선민들처럼 안이하게 현세적인 복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복음선포의 삶과 대속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마16:24, 28:18-20). 그 결과 부활하여 새로운 영생의 몸을 입고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사40:5, 고전15:44).
이사야의 예언은 신 구약을 관통하고 있는 놀라운 복음입니다. 메시아의 역할과 제자들의 삶을 미리 말해주고 있는 예언들입니다. 그러므로 차제에 본문의 뜻을 다양하게 음미하시면서 성도로서의 자신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점검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