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과 간증설교 및 기타 정보들

내게 있는 김치영 목사님의 흔적(정인조의 글)

손진길 2023. 7. 7. 13:11

내게 있는 김치영 목사님의 흔적

 

(정인조글로벌21() 대표이사)

 

    사도 바울은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 6:17)고 말씀하셨는데 스스로 목사님을 신앙의 스승이라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는 바울이 자랑했던 것과 같은  스승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김치영 목사님을 만나게 된 것은 김성년 선배의 소개로 대구 동산병원 원목실에서 열렸던 한 알의 밀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면서부터였으며 대학 1학년 겨울 방학 때인 1972 1월 초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안임상, 이승현 등 고등학교 동기들이 같은 시기에  모임에 참여하였고 김명용, 최재호, 권기익, 이근우 등의 동기들도 이후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김성철, 하은규, 정기석, 황향옥, 윤성자, 박영숙, 신선기, 이영훈 등의 서울 선배님과 서정규, 박우현, 김현환 등 대구의 선배님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 생활에 대한 원칙이나 신념이 없었던 그 당시에 김목사님과의 만남은 완전히 나를 압도한 기억이 납니다. 자신이 너무 왜소하고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였고 때론 지적인 호기심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1971년 실시한 대통령 선거의 충격,  1972년도의 유신 등으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 체제의 모순이 심하여 가던 70년대에 체제를 거침없이 비판하시는 목사님의 용기의 원천이  성경이요 믿음의 힘 때문이라 생각하니  존경심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매스컴에서 접할 수 없었던 시국에 관한 목사님의 말씀을 긴장 속에서 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당시 동산병원 내 사택은 온 집안이  책으로 가득 찼으며 목사님과의 대화는 신학은  물론 동서 고전, 위인들의 삶, 문학, 철학, 건축, 예술, 생태학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였습니다. 금속공학을 전공한 저에게도 자유도라는 것이 있다던데 그 뜻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시어  감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유도는  자유에너지, 자유에너지는 엔트로피를 알고 있어야  되니 자연현상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도 목사님은 전문가 수준 이상이었습니다. 떼아르 드 샤르뎅의 오메가 포인트에 관한 말씀도  이때에 들은 것 같고, 생물학의  발달로 예상되는 체세포 분열에 의한 생명복제의 윤리성 문제는 당시  자주하신 말씀인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현실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지적 갈증을 채웠다는 만족감과 함께 매력도 커져 갔으며 이후 해마다 한두 번 열렸던 수련회 참석, 몇 차례의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1972 10월 유신  이후 11월부터 1973 2월까지 미아리에서  유용렬, 하은규, 신선기이영훈, 이승현, 안임상과의 처음 공동생활을 하였고, 그 후에 휘경동에서 1973 11  안임상이 입대할 때까지 이승현과 셋이서 하였습니다. 또한 1974년에 사당동에서 이승현과 1978년에는 신림동에서  최영호, 우정원, 강남훈 등 후배와의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공동생활은 신앙훈련의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특히 1974년도엔 이상곤, 석호철, 정승화, 이경덕, 손수일, 조무환 등  후배가 상경하여 서울 모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서울공대 교양과정부가 있었던 공릉동의 기독학생회관에서 짧은 믿음으로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신앙에 관한 말씀을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이승현과 함께 노력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NEB Text로 한 성경공부,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키에르케골(SØren Kierkegaard)의 수많은 저서, Forsyth  『기도의 정신』, 단테의 『신곡』, 성 어거스틴의 『고백』을 읽었고 "한알의 밀 필독 고전 20"을 하은규 선배로부터 들은바 있는데 목사님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1972년 여름 이후 한알의 밀 서울 모임은 김성철, 엄경숙 선배님 부부가 출석하던 마포 갈보리 교회에서 갖게 되었으며 정한 교회가 없었던 이승현, 안임상, 정인조는 1976년까지  출석(등록)하였습니다.

    1975 3월부터 1977 6월까지는 ROTC 장교로 임관되어 진주에서 군대 생활을 하였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자 가끔 대명동 영남대학 앞 한알의 밀교회까지 주일 예배 참석을 하였으며 이때 조건호, 홍종각 선배를 만난 것으로 기억합니다.

    1977 7월부터 대우중공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고, 1978  초엔 모임 회원인 조우진을 홍춘선 사모님으로부터 신부감으로 소개받고 기미년 삼월  일일(1979 3 1)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였습니다. 군대 생활 중 한알의 밀교회에서 회계를 담당했던 아내는 십의 일조 이상을 헌금하는 것을 보고 우리 집안이 제법 여유가 있는 것으로 잘못 판단했다고 후회를 하지만(?) 하늘 나라의 곳간은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으니  최선의 결정을 한 셈입니다

    나는 고향이 합천이고 생활은 서울에서 하였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모임을 위해 서울을 방문하시거나 수련회 참석, 고향을 오가며 대구 모임 참석을 통하여 말씀을 들은 기회가 대부분이었고,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목사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대학 시절엔 동산병원 사택에서 목사님, 하은규 선배님과 바둑을 두기도 한 것 같고 때로는 식객이 된 적도 있었으며 한번은 모임 후 노래  자랑을 하였는데 나는 찔레꽃을 부른 기억이 납니다.

    민족과 역사 앞에서의 책임 있는 삶을 강조하신 목사님의 가르침을 통해 역사를 보는 눈을 뜨게 되었고, 남북과 동서의 분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갈 여러분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목사님이 우리와 함께 21세기를 살지 못하고 먼저 하늘 나라로 가신 것을 생각하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가 연상되곤 합니다.

    죄와 은혜를 일깨워 주시고 신앙과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신 목사님을 20살의 젊은  나이에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천명(知天命)을 지나며 가르쳐 주신대로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있지만 1978 815일 여름 수련회에서 말씀하신 한알의 밀 선언을 읽고 우리 부부의 결혼식에서  목사님께서 전하여 주신 권면의 말씀을 들으며 다시 한 번 각성 된 삶을 살고자 다짐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