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장별강해(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제1장 전반부 장별 강해

손진길 2026. 3. 2. 04:50

요한복음 제1장 전반부 장별 강해

제목; “말씀의 성육신과 세례 요한의 증언”(1:1-28)

작성자; 손진길 목사(26 32일 월요일 작성)

소위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으로 불리고 있는 3권의 복음서 곧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주후 60년대를 전후하여 작성되어 초대교회에 회람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80대의 노인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 에베소에 살고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제4복음서는 공관복음보다 30년이나 늦게 작성되어 초대교회에 회람된 복음서입니다.

이미 30년 전에 3권의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성도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이국 땅에서 나그네생활을 하면서 사도 요한이 또 한권의 복음서를 작성하여 세상에 내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략 다음과 같은 요인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주후 60년대 말엽 가나안에서 발생한 유대인들의 반란을 강력하게 진압하기 위하여 로마에서 대규모 군대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갑니다. 당시 로마황제의 아들 디두스 장군이 지휘하는 막강한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110만명의 유대인이 희생되고 말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전란을 피하여 멀리 해외로 피난하고 맙니다. 그 가운데 60대의 노인 사도 요한이 큰 이모 곧 나사렛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멀리 소아시아로 피신한 것입니다(19:26-27). 그는 그곳에서 20년 세월을 주변의 초대교회를 여럿 돌보면서 헬라의 학문과 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1:4-6). 그 이유는 현지의 헬라인과 로마인에게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기존 공관복음은 주로 히브리경전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위하여 저술된 복음서들입니다. 그와 달리 사도 요한은 헬라의 철학과 종교에 익숙한 현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를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2)  그 일을 위하여 60대의 노인 사도 요한이 간절히 기도하면서 20년 동안 헬라의 철학과 학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주후 90년이 되자 요한복음을 저술하여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그는 제4복음서의 저술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한마디로,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막내사도인 요한이 개인적으로 많이 기억하고 있는데 공관복음에서 빠진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자신의 기억 가운데 중요한 것을 발췌하여 제4복음서에 싣고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기억을 남겨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노년에 요한복음을 저술한 것입니다.

(3)  주후 1세기 말엽 헬라 철학은 초기 영지주의 이론이 서서히 체계화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세계와 물적인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고 사유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능력과 지혜가 물적인 이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사용하던 사람의 육신은 영적인 세계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므로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벗어버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극단적인 쾌락주의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2:15). 그들은 이 세상에서 실컷 육신적인 쾌락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적인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영적이며 도덕적인 타락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3 6개월 동안 복음 전파하여 만민구원을 실현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공생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생의 구원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3:13-18, 5:24-29, 11:26, 14:1-3, 16-2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구약의 시작은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1절임. 그러나 제4복음의 시작은 신비로운 로고스 말씀의 존재인데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에 벌써 존재하고 계셨다는 것임)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여호와 하나님과 말씀이신 독생자는 언제나 함께 계셨다는 것임),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특히 여호와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말씀이신 독생자 역시 창조주라는 것임, 1:3-30, 11:28)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b),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1c),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9:3-7, 랍비 사울 앞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의 형상으로 현신하였는데 그 존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 곧 주님이신 것임)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사도 바울은 창세전에 여호와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여 성도로 살아가며 영생을 얻도록 섭리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음, 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사람의 생명이 들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며 이 세상을 복음의 빛으로 밝히는 성도들이 천국에서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임, 28:18-20, 22:28-30)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어둠의 세력이 빛의 세력을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임, “5.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선지자를 말함)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생명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 4)에 대하여 증언하고(1:17, 4:5-6) 모든 사람이 자기(세례 요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20)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영생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는 대속자 그리스도를 말함, 11:1-9, 19:25)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3),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주인행세를 하며 창조주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있는 것임. 요컨대, 영적 타락을 말하고 있음), 11. 자기 땅(약속의 땅 가나안을 말함)에 오매 자기 백성(선민 유대인들)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누구나 그리스도를 대속자 구원주로 믿으면 영생구원을 얻어 하나님자녀가 되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임. 그것이 그리스도의 만민구원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임, 31:31-34, 3:13-18, 14:1-3, 16-20, 22:28-30, 4:12, 8:1-4, 15-18),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선민의 증거 곧 육신적인 할례를 강조하고 있는 유대교와 다르다는 것임),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대속자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역사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적으로  동행하는 거듭난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임, 14:16-20, 8:15-18)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독생자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말함),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ς의미는 여호와의 뜻과 같음, 3:14)영광(하나님의 영광인 카보드, כָּבוֹד를 말함)이요, (성령이 인자 그리스도에게 전달하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20-23, 대속자 그리스도, 19:25)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이 세상에 태어난 순서는 친척사이인 세례 요한이 나사렛 예수보다 6개월 먼저임, 1:36. 그러나 창조주의 위격인 그리스도와 피조물이며 여호와의 종인 사람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음, 1:43-45. 여호와가 창조한 피조세계이기에 사람인 세례 요한 이전에 벌써 창조주인 독생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임, 14. 그것이 창조주의 선재성임, Pre-existence) 16. 우리가 다 그의 (성령)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이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임, 3:2. 곧 유한한 것이 아니고 영생의 진리이며 플러스 섬, Plus sum,이라는 의미임. 예컨대,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것임, 6:10-15) 17율법(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정국가의 법률로서 강제적인 규정을 말함) (구약시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영생의 천국을 주시는 여호와의 은혜와 그 길을 알려주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말함, 9:6-7, 11:1-12)(신약시대, 31:31-3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예수님의 교훈과 생애가 그 은혜와 진리를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임)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창조주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게 되면 피조물의 육신은 녹아 내리고 마는 것임, 33:20-23, 벧후3:12-13),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3:14, 110:1, 홀로 스스로 발생한 존재이며 여호와의 한 위격에 해당함, μονογενς)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5, 27, 30, 14:9)“(1:1-18);

(1)  본문 제1절에서 사도 요한이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a)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살펴봅니다; 4권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등 세 권의 공관복음서가 주후 6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요한복음은 그 보다 한 세대가 늦게 주후 90년경에 저술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의 막내 사도라고 불리고 있는 사도 요한이 80대의 노인이 되어서 자신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첫머리에 복음서의 완결판임을 암시하고 있는 문구를 적고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a). 히브리 성경의 첫 번째의 책은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입니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모세는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가 계신다고 하는 사실과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로부터 천지만물과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히브리 성경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다른 각도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창조행위 이전에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셨던가 하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시지만 인간이 보기에 인격적으로 달리 보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독생자로서 함께 계셨다는 설명입니다(1:1bc). , 세상의 창조이전에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본체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독립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중에 사도 요한은 독생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14, 18, 3:16). 독생자의 뜻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실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분신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됩니다(1:49, 3:17).

2)   둘째, 사도 요한은 모세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시원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세의 율법은 천지를 창조하신 야훼 하나님의 행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릅니다. 그것은 창조행위가 아니라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신 독생자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그 사실, 소위 being together and living together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말씀이 하나님과 자리를 함께 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이 복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는 엄청난 행위가 없어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아가서, 우리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누며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뜻대로 살아가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그 옆자리에서 안식을 누리며 창조주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있는 성도가 진실로 복음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본문 제2-5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사도 요한이 4.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독자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신분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공유하고 있는 독생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정체성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독립성을 누리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과 한 몸이 되어서 모든 창조의 행위를 완성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 독생자가 이 땅에 파견되어 올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불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독특한 설명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었던 당시의 헬라 철학과 사상에 의하면 그의 설명은 상당히 논리적인 것입니다. 동시에 히브리 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2)   예를 들어보면, 원시적인 형태의 영지주의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모세오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이미 그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영지주의는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신의 세계가 먼저 존재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신적인 지혜로부터 창조되고 있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자연계 그리고 육체적인 인간의 세계가 또 하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의 신의 세계는 범신론적이지만 그 신들의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소위 최고의 신이 아버지로서 365개나 되는 많은 신을 아들 신으로 만들어내었다는 관념입니다. 그 가운데 열등한 신으로서 이른 바 말씀 또는 진리를 의미하고 있는 로고스의 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고스가 그만 지혜가 출중하여 아버지의 금기를 어기고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창조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한 헬라의 철학자들의 로고스사상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3)   그 이유는 그들에게 어떤 모양으로라도 창조주의 살아 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주 되심을 그들의 사상에 비추어서 설명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독생자는 헬라의 사상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일한 창주주 야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는 히브리 사상에서부터 독생자가 비롯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창세기에서부터 로고스의 관념이 이미 탄생하고 있습니다. 일례를 들자면, “1. 이 후에 야훼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After this,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Abram in a vision……)”(15:1)같은 표현이 그것입니다. 히브리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하나의 개별적인 인격체로 그들에게 계시로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4)   천국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분리되기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훗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독생자가 인간에게 일찍부터 아버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선지자를 통하여 계시해주는 일을 주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독생자의 사역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역의 특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명제가 성립되고 있습니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독생자가 계시해준 창조주에 관한 말씀 가운데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들어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진행되고 있는지 아닌지 조명해볼 수 있는 빛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백성들이 그 말씀의 빛을 조명 받는 것은 쉽지가 아니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어두움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사람에게 비추어지더라도 어두움의 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의 방해로 쉽게 백성들이 그 생명의 뜻을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1:9-11, 6:12, 4:14-19).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여줄 때에는 그 어두움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스러지고 말 것입니다(1:14, 16, 8:2). 그러한 이중적인 설명이 가능한 문장이 그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요한복음 제1장 제5절의 말씀입니다; “5.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but the darkness has not understood it, NIV, …..and the darkness did not overcome it, NRSV)”(1:5). 구미지역의 성도들이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새국제번역(NIV)’은 한국어 성경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학교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새수정표준번역(NRSV)’에서는 어두움의 세력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위와 같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본문 제6-8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1:6)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1:6).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백성들, 성도들에 대하여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1:12-13). 그와 같은 표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1)    먼저 공통점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하나님께로부터그들의 인생이 시작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환언하면, 그들이 세상에 목적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이 돌아가야 곳도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11:16).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과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나 성도들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그들이 증거하고 있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의 성육신이며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말씀에 비추어서 각자 자신의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1:4, 7). 그러한 외침이 바로 그들이 세상에 목적이며 그들이 인생을 사는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입니다(1:6, 12-13).

2)    다음으로 세례 요한과 성도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시점이 서로 다릅니다. 세례 요한은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이름을 하나님이 직접 지어 주시고 부모에게 출생의 예언을 해주고 있습니다(1:13-25). 그렇지만 성도들은 그러한 과정이 없이 생물학적으로 부모로부터 먼저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중생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점에 관하여 훗날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3:5). 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 요한보다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성도들보다 작은 자가 되고 있습니다(11:11). 말씀의 뜻은 단지 예언에 의지하여 메시아를 증거하고 있는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보다는 자신의 인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정확하게 주님을 증거할 있다는 것입니다.

3)    초대교회시대에 아볼로와 사도 바울의 차이가 그와 같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볼로는 말씀 가운데서 메시아를 깨달았습니다(18:24-26). 그래서 교회에서 증거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나타나시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9:3-22). 그의 신앙은 체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적인 체험과 깨달음을 히브리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확신이 서게 되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갔습니다. 결과 사도 바울의 간증과 주님을 증거하는 능력이 훨씬 힘이 있습니다(19:1-7). 일반적으로,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자의 증거가 법정에서 효력이 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직접 증인이 하나님의 법정에서도 간접 증인보다는 중시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사도 바울과 같은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시고 체험을 말씀에 비추어서 객관화시키고 일반화시켜서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전하시는 주님의 증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끝으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말씀의 성육신이 아니라 단지 성육신하시는 독생자의 증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1:7-8).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가 없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고 지켜야만 하는 법도가 있습니다. 종이 분수를 넘어서서 주인의 지위를 침범하게 되면 진노를 사게 되고 멸망 당할 뿐입니다(20:14-16).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을 청종하는 종을 자녀로 삼아 주시는 그것만도 너무나 감지덕지한 일입니다(1:12-14). 그러한 분수와 법도를 지키면서 메시아의 증거자가 되고 있는 사람이 여기서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신분과 삶의 목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도 요한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요한의 지적이 새삼 그리워지고 그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느껴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라고 하겠습니다.

(4)   본문 9-13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12. 영접하는 ,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독생자가 땅에 오게 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셔서 땅에 오신 이유는 한마디로, 여호와말씀의 정확한 뜻을 이제는 선지자를 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셔서 그들의 입장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으로 알려주시고 또한 자신의 생애로써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1:14, 11:27). 그런데 문제는 영적으로 이미 어두움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는, 이른 실락원’(失樂園, the lost paradise) 인간들이 창조주를 제대로 영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3:22-24, 1:9-11). 그렇지만 창조주 앞에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정직하게 신앙 고백하는 자는 누구나 신원이 회복되고 있습니다(1:12-13). 그와 같은 사실을 주후 60 이전에 사도 바울은 그가 저술한 로마서에서 이제는 어두운 세력의 노릇에서 벗어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양자가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8:15). 점을 사도 요한은 주후 90년에 그가 기록한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다시 부여 받고 있는 것이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1:12).

1)      그와 같은 신원회복의 역사가 있게 되는 이유를 성경말씀 가운데서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유는 메시아 예수가 오게 되는 이유와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 그리고 시편의 말씀이 이제 성취되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24:44-45).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보면, 다음의 내용을 알게 됩니다; 모세의 율법서 가운데 번째의 책인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메시아의 오심과 그를 통하여 범한 인류를 구원할 것임을 이미 시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훗날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서 사탄의 화신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3:15).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여자의 후손인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 혼자만이 완전한 여자의 후손입니다. 이유는 인류 모두가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위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1:34-35).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책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b)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사탄의 가장 권세인 음부의 세력을 쳐부수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다윗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자신의 영적인 눈으로 보고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 야훼께서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수들로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오른 쪽에 앉아 있으라하셨도다”(110:1).  

2)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땅에서 필요한 이유를 다시 창세기에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과 인간을 6일동안에 모두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경영하고자 돕는 자를 선택하여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대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담이며 장소가 소위 에덴동산입니다. 그렇지만 같은 시공간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아담이 같이 지내기 위해서는 법도가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공존의 장치가 다음과 같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16.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법도를 어겨버린 자가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용어를 빌리면 패역’(悖逆)입니다(32:20, 대하6:37). 패륜과 반역이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의 반역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의 아름다운 관계와 동행의 역사가 깨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은 정다운 부자관계의 윤리가 깨어져버린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같은 공간 에덴동산에서 더이상 함께 살지 못하고 세상으로 쫓겨나버리고 맙니다(3:23-24). 죄악이 만연된 어두운 세상, ‘실락원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자신의 백성으로, 그리고 자신의 아들로 다시 맞아 들이고자 하고 있습니다(1:9-10). 그것이 예수님의 교훈인 탕자의 비유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15:17-24). 결론적으로, 탕자와 같은 실락원의 백성들을 다시 신원을 회복시키고 아들로 맞아 들이고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번째 작업이 본문에서 말씀의 성육신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11, 14).

3)      그런데 만민의 구원과 신원의 회복을 위하여 땅에 성육신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선민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 선민들만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로 착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메시아가 마치 옛날 중근동 지역 전체를 호령하던 패권국가 다윗의 제국을 다시 재건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주전 586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 제사장의 나라가 소위 다윗왕조의 유대왕국입니다. 주전 142년부터 80년간의 레위인 하스모니안 왕조의 시대를 제외한다면 유다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나라의 주권을 되찾지 못하고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 바벨론의 뒤를 이은 제국들에 의하여 지배 받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자신들의 해방과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선민들의 소망과 소원이 오죽이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 포기하지 아니하고 출애굽기의 모세를 기다렸으며 이스라엘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다윗의 후손을 메시아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가 혈통, 육정, 또는 사람의 ”(1:13)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4)      선민들의 육체적인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의미가 다음과 같이 쉽게 이해됩니다; “혈통 적자로서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고 있는 이삭입니다(21:12). 육정으로 자는 서자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소생들입니다(16:15-16, 25:1-6). 사람의 으로 자는 당시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자신의 뜻으로 후계자로 세우고자 했던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을 말하고 있습니다(15:2). 그들이 모두 세상적으로 아브라함의 뜻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모두는 한마디로 사람의 뜻과 핏줄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자는 마치 모리아 산에서 죽을 목숨이 다시 살아난 이삭 같은 자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죽을 밖에 없는 운명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자신이 마련한 제물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고 살려준 것입니다(22:9-14). 그래서 이삭은 이제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땅에 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유월절 어린 제물이 되고 있습니다(1:29). 덕택에 성도들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탄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함께 동행할 있는 신원으로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은혜가 선민들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모든 인류에게 생명과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9. ,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9), “12. 영접하는 ,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선민, 이방인 가리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니라”(1:12-13). 만민구원의 하나님, 참으로 고마우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5)   본문 14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a)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가운데 거한다 하는 말은 “(거처를 옮겨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뜻입니다. 그것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생사고락(生死苦樂) 같이 나누고 있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과연 그러한 동거의 관계가 가능할까요? 희랍신화에서는 주로 신이 인간이 되어 남녀 간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믿음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8:1-8).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창조주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완벽하게 함께 성장하고 먹고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는 것이 현신의 의미가 아니고 완전하게 사람과 똑같이 어린 아기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1:14a, 1:18-25).

1)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함께 자라나고 같은 모습으로 생활하면서 무언가를 행할 있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이 증명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도로 사도 요한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1:14b)라는 문장을 적고 있다고 있습니다. 히브리 바이블인 구약에 따르면 아버지의 영광은 창조주의 영광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만물과 만민을 창조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스스로 비천한 인간의 몸을 빌려서 아기로 태어나는 치욕을 감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창조주의 영광은 낮고 천한 피조물의 위치를 초월해서 빛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이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가 스스로 정하고 있는 질서와 분수를 깨고서 전혀 다른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정한 법칙을 깨고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있는 능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창조주만이 스스로 결단하고 행할 있는 무섭고도 두려운 모습입니다. 세상에 누가 있어서 자신의 한계를 그렇게 뛰어넘으며 반대의 개념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신의 아들과 같은 독생자를 내세워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하시고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편입시키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14bb) 재창조의 길을 열어놓고 계시는 유일하면서도 완전하신 창조주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혁신과 세상의 창조가 얼마든지 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c).

2)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를 깨뜨리면서 새로운 질서를 다시 창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분신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작업을 이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만민구원의 계획과 실천입니다. 나아가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3:16). 그러한 목적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인물이 글의 저자인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의 결과를 그렇게 자신의 복음서에 적고 있는 것입니다. 차제에 은혜’, ‘진리’, ‘충만 개념을 한번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은혜 사회적인 상식과 개인적인 기대치를 훨씬 뛰어 넘어서 받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성경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쉽게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내와 함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하나님의 책임추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 아담이 상식에 맞지 아니하는 변명을 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는 대목입니다. 잘하면 아내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할 있을 같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창조하여 자신에게 손을 이끌어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책임도 슬쩍 거론해보고 있는 중입니다(2:22, 3:12). 그러나 그러한 아담의 항변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잘해야 아담과 하와의 공동책임으로 하나님의 판결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3:13).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아담, 하와, 뱀이 모두 처벌받고 있습니다(3:14-19). 그런데 복음서로 오게 되면 판결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고 있습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를 제물로 삼아서 인간의 죄를 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 개념입니다. 책임의 일부만을 감당해 주셔도 감지덕지인데 전부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담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인류에게 드리워져 있었던 죄와 사망의 굴레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8:1-2). 하나님의 독생자의 은혜를 감사할 수밖에 없게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제는 남은 생애를 죄를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행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3)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독생자의 말씀의 뜻이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재강조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민과 만물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본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섭리의 정확한 방향이라는 설명이 훗날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10:30) 선포하고 계십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진리 말했기에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하여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충만 개념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차고 넘치는 것인지를 예수님이 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것입니다. 다섯 덩이와 마리의 생선요리를 가지고 장정만 오천 , 남녀노소 모두 계산하면 이만 명의 청중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곳간이 오병이어 매개로 하여 열린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그렇게 충만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로마서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그러한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오늘 그와 같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성도들의 사람 속에서 숨을 쉬고 있습니다(31:33, 8:1-4, 고전6:19).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영이 성령님과 함께 성도들에게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4:16-20). 그러므로 아무쪼록 말씀이 자신의 육신적인 삶으로 구현되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저와 여러 성도님에게 계속 내주하여 역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6) 본문 15-16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15b)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제1장 제15절의 말씀,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는 세례 요한의 증언입니다. 그의 증언을 사도 요한이 그 오랜 세월 60년 동안이나 잘 간수하였다가 여기 그의 복음서에 두 차례나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1:15, 30). 그만큼 그 내용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소위 창조주의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창조물보다 먼저 스스로 존재하고 계신 분이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를 가장 쉽게 설명해주고 있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여기서 자신은 피조물인 인간이며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조만간 메시아로 백성들에게 소개하게 되는 그 분은 창조주의 신분을 가지고 오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러한 그의 독특한 역할과 관련하여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상당히 특이한 선지자입니다; ①그는 주전 410년경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440년이 지나서 신약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선지자입니다. ②그는 주로 백성들에게 회개만을 촉구했던 구약의 일반 선지자와는 다릅니다. 그는 천국의 도래와 메시아의 오심이 임박하였다고 전하면서 동시에 회개하고 그에게 나아오는 백성들에게 물세례를 행한 최초의 선지자입니다(3:2-6). ③실제로 그는 주후 28년경에 요단 강가에서 백성들에게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라고 소개를 했습니다(3:1, 16-22, 1:34). ④세례 요한은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고 있습니다(1:20).  그렇지만 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엘리야의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9:4). 그의 정체에 대하여 훗날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세상에 다시 온다고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이며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이미 담당했다는 것입니다”(1:8, 20, 11:10, 17:12-13, 왕하2:11, 4:5-6). ⑤세례 요한은 용감하게도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의 패륜행위를 크게 질책하다가 그 때문에 옥에 갇히고 마침내 참수되고 말았습니다(14:1-12). 그와 같이 짧지만 굵은 인생을 살게 되는 세례 요한이 의미심장한 명제를 하나 백성들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그 내용이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는 대목입니다(1:15, 30).

2)      위와 같은 세례 요한의 외침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훗날 다시 예수님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8:57). 예수님이 거침없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8:58b).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가 바로 하나님의 오른 쪽에 좌정하고 있었던 그리스도라고 다음과 같이 유대인들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12:35-37).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는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조주의 권능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 앞에 자신이 종의 신분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표현이 예수님은 자신보다 먼저 존재하신 창조주이시며 자신은 그 신발끈을 매기에도 부족한 하찮은 피조물에 지나지 아니하는 종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1:15, 27). 그러한 고백이야말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신앙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세례 요한의 신앙을 칭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11).

3)      놀랍게도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여자가 낳은 자 세례 요한보다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3:5-6). 그 점을 예수님이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4:12). 그것은 오늘 날 성도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특권입니다. 자신의 속 사람 안에 성령의 전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인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14:17, 고전6:19). 그 점을 사도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a). 그것이 바로 여기서 사도 요한의 표현을 빌리면,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1:16). 그리고 구태여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1:17).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본적인 은혜와 믿음 위에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서 충만하게 은혜와 믿음을 더하여 준다는 것입니다(1:16, 1:17). 창세기를 보면 기초적인 은혜와 믿음이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에 의하여 훗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되는 아브라함이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의 모습을 주전 21세기에 가나안 땅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15:6, 4:16).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은혜를 또한 베풀고 있습니다(50:20).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러한 기본적인 믿음과 은혜 위에 바야흐로 더 크고 충만한 것이 더해지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1:16). 더 큰 은혜는 선지자가 아니라 메시아로부터 이 세상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요한의 복음은 그것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구약과 신약과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과의 차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7)  본문 제17-18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7b)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17). 그는 모세가 전해준 구약시대의 율법과 예수님이 전해준 신약시대의 은혜 및 진리를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도 요한처럼 두 가지의 개념을 상호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드러나게 됩니다;

1)   율법은 자율규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행위 당사자가 율법에 비추어서 잘못을 범했을 때에는 율법사회가 가차 없이 징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선을 보이고 있는 은혜는 다른 것입니다.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예수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용서하는 대목입니다(8:3-11). 간음 또는 음행이라고 하는 용어는 강제적인 성추행에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사자의 선택으로 인하여 음란한 행위가 성적으로 자행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적인 충동을 자율 규제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따르게 되면 당연히 그 여인은 간통을 행한 사내와 함께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8:5, 20:10).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여인을 용서하고 있습니다(8:11).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사함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의인으로 간주가 된 것, 칭의라고 하는 것은 죄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독생자의 대속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서 이 세상에 전해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앞과 뒤가 똑 같으며 겉과 속이 동일하고 율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어기게 되면 행위 당사자가 무조건 그 보응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어긴 죄의 총결산은 죽음으로써 청산하게 됩니다. 그 진리가 이 세상에 응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그 죽음 안에서 성도들이 함께 죽는 것입니다(6:4). 그리고 이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부활 안에 자신의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믿는 자가 남은 세월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 베드로에게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장은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하여 주님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베드로이지만 목양의 삶 가운데에서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21:15-18). 마침내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는 성령의 역사와 도우심이 있다는 예언을 얻게 됩니다(21:19). 요컨대, 성도들이 자신의 이익과 야망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소원을 위하여 한 평생을 헌신하게 되면 그 십자가의 길 끝에는 부활하신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등가성(等價性)의 법칙이 복음 속에 숨어 있으며 그것이 성경말씀의 진리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과 같은 독생자를 이 땅에 대속의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보내시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엄청난 비밀에 속하고 있습니다. 사탄도 그 비밀을 사전에 탐지할 수 없었기에 어처구니없게도 십자가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이 사탄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무기인 죽음과 음부의 권세를 깨부수어 버리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3:15, 27:50-54). 이제는 진리의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미 죄와 사망의 법이 깨어지고 믿는 자에게 영생의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증거하고 계십니다(14:17, 15:26-27, 8:1-2). 그와 같은 놀라운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던 사도 요한이 자신이 죽기 전에 그 사실을 여기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멸망하지 아니하고 구원을 받게 하고자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이 은혜입니다(3:16).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와 사망의 징벌을 대신 감당하심으로써 그 사실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또한 등가성을 가진 진리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강조하면서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의 서론을 제1장 제18절에서 마치고 있습니다.

둘째로,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이후 400여년의 중간시대를 지나고 드디어 유대 땅에 공식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선지자이므로 그 정체를 밝히고자 유대교지도자들이 매우 노력하고 있음.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여호와의 능력으로 외세를 쳐부수고 그 옛날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할 것이기 때문임)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세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말4:5-6,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먼저 오는 자 곧)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말라기 선지자와 같은, 1:1)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예루살렘성전의 산헤드린 대공회원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40:3, 3:4) 하니라!(세례 요한이 어쩔 수가 없어서 자신의 정체를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의 환생도 아니며 말라기와 같은 선지자도 아니고 단지 여호와가 이 세상에 보낸 그리스도의 전령임을 인정하고 있는 대목임)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주전 140년경에 출현하였으며 사제지간에 히브리경전을 연구하고 주석을 만들어 유대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철저하게 시킨 자들임)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회개의 물)세례를 베푸느냐? 26. (세례)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내 뒤(6개월 후, 1:36)에 오시는 그이(대속자 그리스도)!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대시대 가장 작은 종의 소임이 주인의 신발끈을 푸는 것임) 하더라. 28. 이 일(문답)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무화과와 대추야자 등 유실수가 많이 자라고 있는 마을을 의미함. 그러므로 요단 강 동편에도 물이 많은 동네 베다니가 있고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 남쪽 기슭에도 민박집이 많은 베다니 마을이 존재하고 있는 것임)에서 일어난 일이니라“(1:19-28);

(1)  본문 제19-23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시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근본적으로 진리는 언제나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동일할 때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증거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할 때 그것이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말씀충만과 더불어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고 있을지라도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충만까지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성령의 능력을 행하는 성령의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영적인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만 성령의 충만이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장기적으로는 말씀이 충만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정상적으로 나타나고 사람들을 올바로 하나님께 인도할 수가 있게 됩니다(1:8).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어집니다. 비록 세상이 인정해주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그 좁은 길로 한평생 달려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시고 자신을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자,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본문이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한가지 예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이 세상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의 오심을 예비하기 위한 것입니다”(4:5-6절 요약). 그리고 나서 4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온 유대 땅에 선지자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유다의 백성들은 더욱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나라 강대국의 지배가 계속 되기 때문입니다. 짧은 기간 주전 142년부터 주전 63년까지 80년에 불과한 레위인 제사장 가문 하스모니안 왕조의 통치기간을 제외하고 나면 유다 백성들은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지배를 계속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긴 세월 동안 다윗의 후손 가운데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여호와의 능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조국 유다의 나라를 되찾아 주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의 나라는 옛날 다윗 왕 시대의 이스라엘제국처럼 온 중근동 땅을 호령하는 패권국의 모습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메시아라는 히브리 말을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시절에 요단 강가에 선지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유대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자 히브리 성경에 밝은 제사장들과 랍비들을 그곳으로 파견하고 있습니다(1:19a). 그들의 임무는 세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여 그들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대공회에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차 질문하고 있습니다.

2)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과의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메시아인지 아닌지를 제일 먼저 묻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네가 누구냐(그리스도냐)?”(1:19b),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1:20b)입니다. ②이제는 다시 오는 엘리야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1:21a), “나는 아니라”(1:21b). ③마지막으로 말라기와 같은 구약상의 선지자인지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 선지자냐?”(1:21c), “아니라”(1:21d). 한마디로,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도 아니고 다시 오는 엘리야도 아니고, 나아가서 구약에서의 선지자와 같은 신분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1:22b),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1:23, 40:3). 그의 대답 안에 함축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파헤쳐보자면, 그것은 나는 너희 유대인들이 말하고 있는 그와 같은 신분의 사람으로 너희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그 사명만을 감당하고 싶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명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오시는 독생자를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백성들이 믿음으로 그 분을 영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1:6-8, 3:16, 5:24). 그렇게 자신의 사명을 묵묵히 신실하게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인정하심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훗날 세례 요한의 정체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세례 요한)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4b-15).

3)   세례 요한이 행한 그 일이 바로 다시 오는 엘리야의 사명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가 그대로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다시 오는 엘리야의 역할을 훌륭하게 성취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그는 그가 수행한 직무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11:11). 그것이 진정한 세례 요한의 신분이며 정체성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 가능합니다;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그러므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10:40-41a). 무엇보다도 영접하는 그 일이 우선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맞아 들이고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나의 사명으로 인식하고서 그 사명의 완수에 전력투구한다면 그 사명에 합당하는 대우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분이 위탁하는 어린 생명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소외 받고 있는 이웃의 생명을 살리고 돌본다면 그러한 성도에게는 천국에서 그 수행한 직무에 합당한 신분과 상급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그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선지자로 삼아 주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감히 선지자라고 자처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권세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이름에 맞는 역할을 감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자신의 신분과 직급을 세상적으로 내세우기 이전에 먼저 그러한 신분과 직급에 합당한 사명부터 잘 감당함으로써 그렇게 인정을 받게 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2)  본문 제24-25절을 살펴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1:23b)라는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관련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선지서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임을 백성들에게 예언하고 있습니다(40:3). 그의 예언은 장차 제사장나라가 망하고 선민들이 이방나라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미래지사에 대한 것입니다.

1)   그 옛날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던 때가 다시 역사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1:9-10).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그들을 구원해달라고 히스기야 왕때처럼 다시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37:4-7). 그 결과 출애굽의 은혜가 ()바벨론의 역사로 다시 있을 것임을 알게 됩니다(48:20, 49:12-26). 그런데 장차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이루실 해방과 구원은 그 옛날 모세의 것과 다르다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모세 때처럼 이방나라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의 자손만을 출애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자손 뿐만 아니라 애굽인의 후손들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북쪽의 제사장나라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바 있는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사람들도 구원하실 것입니다(19:21-15). 새 언약의 시대가 되면(31:31-34) 만민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복음이 전세계 모든 민족에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 복음의 길이 바로 주님이 가시는 대로입니다. 그 길을 미리 준비하라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광야에서 있을 것임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새 시대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막에 길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1:23, 40:3).

2)   그리고 복음의 일꾼들은 광야에 모여들어서 신앙훈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듣고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로 모여드는 것입니다. 신앙훈련의 장소 광야로 떠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업과 집안의 일을 일정기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12사도가 그러했습니다(4:22, 18:28).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자 50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고전15:6). 그러나 열흘 후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120명 정도의 성도들만이 남아 있었습니다(1:15, 2:1-4). 그들에게 오순절날에 성령이 강림하여 내주, 역사하시기를 시작했으며 그들로부터 초대교회가 시작되고 있습니다(2:41-47).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집안일을 제쳐두고 끝까지 헌신하는 자는 항상 소수입니다. 그들은 광야로 나아오는 영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오늘 날도 그들로부터 사막에 길을 내는 새 시대가 전개될 것입니다.

3)   1970년대말 서울 서초동에서 사랑의교회를 시작하셨던 옥한흠 목사님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세례 요한의 청지기 정신을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본받아야만 한다고 강조하신 바가 있습니다. 옳습니다. 종이 영광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은 사명만을 완수하고 공기의 흐름을 따라 사라지는 소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와 영광은 성도들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도들의 노력으로 확장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훗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봉헌할 것입니다(고전15:24). 그 때에는 새 예루살렘의 성에 사도들의 12주춧돌이 놓이게 되고 그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 책에 적혀 있는 성도들이 부활, 승천하여 그 문으로 영광스럽게도 당당하게 천국에 입장할 것입니다(21:14, 26-27).

(3)  본문 제26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세례 요한이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1:26b)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가 시작되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람 곧 인자(人子, the son of man)가 함께 서있다는 것입니다(1:26). 그 분이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의미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세워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18:5-6).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이야기를 하시고 있습니다(16:19-31). 지체 장애자이며 거지인 나사로는 큰 부자의 집 대문 바깥에서 겨우 동냥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평생 동안 나사로를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이 죽어서 나사로는 천국으로, 부자는 지옥불로 들어갔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거지 나사로는 부자를 회개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매일 전해주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공로로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천국생활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회적인 약자인 소자 나사로를 사람 대접해주지 아니했던 부자는 지옥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5:29, 25:40-46).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들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가 예수님이 보낸 사람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4)  본문 제27-28절을 살펴봅니다;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1:27b)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그와 같은 세례 요한의 답변이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에게 주어진 장소가 요단 강 동편에 있는 마을 베다니입니다(28b). 그곳에는 물이 풍성하여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결심하는 백성들에게 물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28a). 물이 좋은 오아시스와 같은 마을 베다니에는 유실수가 무성합니다. 그와 같이 유실수가 많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마을이 복음서에 또 하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베다니입니다. 특히 그곳에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식사와 방을 제공하는 민박집이 많습니다. 그곳에 있는 나사로의 민박집을 오래 이용한 손님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겠습니다(11:1, 11).

2)   참고로, 16세기 일본에서는 주인의 신발을 따뜻하게 보관하고 그 신발의 끈을 묶거나 풀어주는 종이 존재했습니다. 한때 춘추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했던 대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본래 그러한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주인인 오다 노부나가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는지 주인의 신발을 늘 자신의 품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신발을 주인의 발에 신겨드렸습니다. 그러한 신분사회가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종에 대한 묘사로서 세례 요한이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7b). 세례 요한의 묘사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다음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18:27).

결론적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 운행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시키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인간의 존재는 티끌이나 재와 같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주인의 신발끈을 매는 종보다 조금 못한 자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실 굉장히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랑의 주님과 너무 친하다가 보니까 잠깐 동안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은 한갓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빨리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과 같이 그래도 종으로라도 삼아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17:10).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자신의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면서 여호와의 종인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무익한 종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