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후서 주석

디모데전서 제 2장(요약자; 예수사랑)

손진길 2024. 6. 9. 08:42

디모데전서 2(요약자; 예수사랑)

 


=====2:1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
'
첫째로'(* , 프로톤 판톤) 시간적인 우선보다는
중요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Guthrie, Robertson). 바울이 첫번째 중요한 사항으로
말하는 것은 기도에 어떤 사람을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본절에서 바울은
도의 대상을 '모든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혹자는 '모든 사람' '모든 죄인들과
성도들을 포함하는 범세계적인 사람'(Robertson)으로 규정하지만 이것은 타당하지
. 오히려 본절의 '모든 사람'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인종이나 국적이나 사회적
위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Hendriksen). 이것은 기도의
대상을 생각함에 있어 인간의 관습과 제도를 초월(超越)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절에 나오는 개의 기도에 대한 명사인 '간구', '기도', '도고', '감사' 각기
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단순한 동의어로서 반복 사용되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Hervey). 혹자는 단어의 의미를 따로이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한다(Guthrie). 그러나 단어들이 열거된 것은 단순히 무의미한 반복만은 아니
. 단어들을 원어상으로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간구' 해당하는 헬라
'데에세이스'(* ) '긴박한 상황에서의 어떤 특별한 성취를
위한 탄원' 의미한다(Earle). 둘째, '기도'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카스'(*
)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아룀' 뜻한
(Hervey). 셋째 '도고' 해당하는 헬라어 '엔튜크세이스'(*
)
신약성경에서 딤전 4:5 본절에서만 언급되는 단어로 '접근', '인터뷰',
'
사회적 교제' 등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간구하는 '중보 기도' 가리킨다(Hervey). 넷째, '감사'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리
스티아스'(* ) 과거의 하나님의 은총에대한 '감사의
' 뜻한다(Lenski).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 본절은 기도의 대상으로
별히 권세자들을 포함할 것을 지시한다. '임금들'(* , 바실레온)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던 네로 황제 뿐만 아니라 지위가 낮은 분봉왕들도
포함한다(Scott, Earle). 그러나 '임금들' 당시의 황제와 왕들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본절의 명령은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을 초월하여 적용되는 명령이다
(Lenski).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권세자들을 두시고 그들을 주관하시기
문에( 13:1) 그들이 아무리 합당치 못한 통치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
해야만 한다(Calvin). 당시에 로마 제국을 지배하던 네로가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한 사실을 염두에 바울의 명령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를 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
세자들을 위한 기도는 나라의 안녕과 사회 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부와 사회
평안한 상태로 나아갈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안정된 신앙 생활을 영위해 나갈
있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 외적 장애인 전쟁이 없고, 내적 장애인 근심이
생활을 말한다(Hendriksen). 그리고 '경건'(* , 유세베이아)
'단정'(* , 셈노테티) 그리스도인의 신앙심과 고상한
도덕적인 덕행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리스도인들은 통치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해야 한다. 이는 단지 위정자
들과 국가 지도자들에게 밀착되어서 자신들의 이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서와
안녕의 축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Lenski).

=====2: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 권세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일임을 말한다. '받으실 만한
'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데크톤(* ) 본절과 5:4에만
오는 단어로 '기쁘게 받아들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포데코마이(*
)
형용사형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선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흔쾌히 응답하여 주신다(요일 5:14).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 구절은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
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의 주요 쟁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본절을 두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구원론적 해석은 타당치 않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지만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Earle). 그래서 칼빈(Calvin) '모든 사람' 하나
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받으며'
헬라어 '소데나이'(* ) 수동형으로서 구원의 주체는 오직 '우리
구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일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에서 지지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어떤 계층이나
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Lenski).
진리를 아는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진리에 대한 지식은 구원의 뿌리요, 열매
이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의 자의적(自意的)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획득된다( 16:17 ; 딤후 2:25).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33:11)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2:5
하나님은 분이시요 - 바울이 이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며,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실은 개역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
헬라어 본문에 나오는 접속사 '가르'(* , '왜냐하면') 앞절 내용에
이유나 근거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또한 '가르' 하나님께 드리는
선하고 받으실 만한 기도(1-3) 구원의 소망을 확고히 해준다는 점을 나타낸다
(Calvin).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중보'
해당하는 헬라어 '메시테스'(* ) 원래 '화친이나 계약을
위해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mediator, NIV, JB).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로 인해 깨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
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다. 바울 사도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
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할 없음을 강조하고
(Guthrie). 한편 바울이 '사람이신'이라는 말을 부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성을 소유하심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성취
하셨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신격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원주를 하늘 저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사 우리의 친구되신
예수( 15:13, 14)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Calvin).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속전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속전' 헬라어 '안틸뤼트론'(*
)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로 노예나 죄수의
'
몸값' 나타내는 '뤼트론'(* ) '대신' 뜻하는 헬라어 '안티'(*
)
합성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값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
키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지만, 그의 속전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죄의 멍에로부터 풀려나게
( 10:10-13).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다 - 구절은 크게 가지로 해석된다. (1) 그리스도
구속은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가 증거해야하는 사실이다(Hendriksen). (2) 그리스
도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르러 일어났다(Guthrie, JB). 구절의 '기약
이르면'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이스 이디오디스'(*
)
문자적으로 ' 자신의 때에' 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번
견해가 타당하다(Earle).

=====2: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 '이를 위하여' 함은
'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친히 자신을 속전으로 내어주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라는 의미이다(6). '전파하는 ' 해당하는 헬라어 '케뤽스'(* )
원래 '임금, 군주, 행정 장관, 총독, 군대 장관 등의 공식 통신문을 배달하거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기타 여러 가지 의무를 이행하는 배달인 또는 사자(使者)'라는
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용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선포하는
' 의미한다(Thayer). 또한 '사도'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
)
'보내심을 받은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 가리킨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고 일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쳤다( 9:15 ; 20:24).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 바울이 복음선포에 대한 그의 직무의 진정성을 이처럼
강력하게 밝히는 것은 1:3, 19, 20에서 시사되듯이 에베소 교인들 중에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그의 사도적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Scott).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 바울이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의 스승이 '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 동격을 이룬다.
특별히 바울의 사도직이 많은 도전을 받은 이유는 사도란 예수의 공생애 기간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고 것을 전파할 있는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분이 '믿음과 진리 안에서' 것임을 강조하여 에베소 교인
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위나 디모데의 권위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고자 한다(Calvin).
실제로 바울은 헬라 학문의 3 중심지(알렉산드리아, 아테네, 다소) 중의 하나였던
다소에서 출생하여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3:5)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양육과
교육을 받았고 이러한 적절한 배경하에서 예수로부터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사명을
받은 자였다( 26:15-18).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
- '그러므로' 새로운 주제가 도입됨을 나타낸다. 본절에서부터는 공중 예배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지켜야 규율을 다루고 있다. '원하노라' 해당하는 헬라어
'
불로마이'(* ) 바울의 강한 소원이며, 또한 명령의 의미를
내포한다(Simpson). 혹자는 구절을 '왕의 명령' 비유하고 있다(Scott). 바울은
먼저 남자들이 교회 내에서 서로 화목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엄격히 명하
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배하는 일에 앞서 사람과
사이의 평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 하셨다( 5:23, 24). 특별히 바울 사도가 '
노와 다툼이 없이' 말을 사용한 것은 구절의 문맥을 살펴볼 이방인과 유대인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전히 선민 의식(
民意識)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을 배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분쟁은 하나
님의 자녀가 교인들 가운데서 종식되어져야 했다(Calvin). 한편 본절에는 기도의
자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성경에 기록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는 서서 손을 들고
손바닥은 위로 향하여 펴는 것이었다( 9:29 ; 왕상 8:22 ; 63:4 ; 18:11).
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기도의 자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와 다툼이 없는 '이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
행하거나, 기타 범죄를 짓고 나서 더럽혀진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Lenski). 만일 우리가 그런 손을 든다면 하나님께서 돌아서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몸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
태도가 중요하다.

=====2:9
이와 같이 여자들도 - 본절은 8절에 언급된 , 남자들이 공중 예배에 참석할때
건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참석하여 거룩한 손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똑같
거룩한 심령을 가지고 공중 예배에 참여하여야 함을 말한다.
아담한 옷을 입으며 - '아담한' 해당하는 헬라어 '코스메인'(*
)
본절과 3:2에서만 나오며, 뜻은 '행동이 단정한', '질서가 잡힌'
. '' 헬라어 '카타스톨레'(* ) 신약성경에서 이곳에
나오는단어로 '' 자체보다는 '복장이나 태도의 단정함'이란 의미를 갖는다
(Hervey, Barlow).
바울은 본문에서 여인들의 옷이 단정하고 품위가 있어야 함을 말함
으로써 예배에 임하는 올바른 태도를 교훈하고 있다.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 '염치'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두스'(*
)
본래 '예절', '고상함' 의미한다(decency, NIV). 본절에서 단어
의미하는 것은 '예절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삼가하는 '(Hendriksen), '여자
다운 조건에서 벗어나지 않는 현숙함'(Bernard)이다. 또한 '정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
소프로쉬네스'(* ) '마음의 확고함', '빠른 이해력'
의미하는 말로 '확고한 판단' 또는 '명석한 판단력'으로 번역할 있다(Earle). 바울
사도가 이처럼 주장한 것은 당시에 여자들이 내면의 아름다움보다 외적인 화려함에
치중을 하였기 때문이다. 예배에 참석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하여 옷치장을 하는 것은 헌신
적인 신앙과 거리가 멀다.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 '땋은 머리' 헬라어 '플레
그마신'(* )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며, 포도나무 덩굴
이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세공품', '화환'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이 땋은 머리
까지도 반대하는 것은 건전하게 땋은 머리가 아니라 뒷말과 연결지어서 보면 겉만
지르르한 허영을 말하고 있음을 있다. 당시에 땋은 머리는 재산의 많음을 나타
냈다(Hendriksen). '금이나 진주나 값진 ' 등으로 꾸미는 것은 예배에 합당한 자세
없다. 이것은 하나님앞에 드리는 마음 자세라기보다 사람에게 관심을 끌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2: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 '선행' '자선 행위' 가리킨다(5:10 ; 고후
9:8, 9 ;
1:10). 바울은 당시에 교리와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자선 행위의 필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Guthrie). 신앙의 아름다
열매인 선행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보석이나 값비싼 옷을 훨씬 능가하는 가치있
요소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 번역된 헬라어 '에팡겔로메나이스 데오세베이안'(*
)
문자적으로 '하나님 공경함을 고백한
자들'이다(who profess to worship God, NIV). 이것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의 품행이
정해야 하는 수준이 일반 여성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
데에 있음을 말해준다(Guthrie).

=====2:11
여자의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 바울은 여자들이 집회에서 마땅히 보여야
정숙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종용'이란 '침묵' 의미한다. 공적인 장소에서
말하려고 나서지 않는 것이다(고전 14:34, 35). 또한 '종용' 여자들이 봉사하는
위에 있어서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순종함으로' 개인의
권리의 포기나 무조건적인 굴복을 의미하기보다는 조직된 권위, 예를들어 교회의 법규
질서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Ramsay).

=====2: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 바울은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
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도 여자는 남자의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시켜 주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당부하였다(고전 11:2-6). 이것은 남존 여비
(
男尊女卑)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의 기능 차이와 창조 질서를 언급한
것이다.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있다( 3:28). 본절의
가르치지 말라는 것은 교회의 공공 집회에서 금하는 것이지 자신의 가족들과 가정에서
하는 가르침까지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맡겨주신 가르치
직분을 강조하고 있다(Calvin).

=====2: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후며 -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이유를 가지로 제시
한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법으로 제정하셨다는 (13) 여자가 범죄함으로 인한
벌로 여자에 부과하였다는 (14)이다. 여기서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다고 해서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가 열등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창조의 순서일 이다
(
2:18-25). 그러나 순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다.

=====2: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 여자가
자를 주관치 못하는 두번째 이유는 여자의 범죄 행위를 인함이다. 여자가 사단의 유혹
빠진 것은 모든 인류를 죄의 노예로 만들었다( 3:1-6). 이러한 사실은 여자는
르치는 일을 맡길 없을 정도로 쉽게 꾀임을 받는다는 주장을 가져왔다. 사실 하와
타락은 그녀에게 정해주신 위치를 무시하였을 일어났다. 그녀는 복종하는
앞장서는 것을 택하였다. 그녀의 범죄는 순종의 길에서 벗어나버린 것이었다. 그래
이제 그녀는 그녀 자신의 죄악된 본으로 인해 남편에게 순종하여야 하며, 남자를
주관해서는 안된다(Hendriksen).

=====2:15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 '하와'라는 개인으로부
이제는 일반적인 여자에게로 주제를 바꾸로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 여성에게
어서 가지 미덕을 소개한다. '정절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그것인데, 이것
들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뛰어날 있는 적절한 품성들이다(Guthrie).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 구절은 목회 서신 가장 난해한 구절로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여자는 여자의 삶의 모든 조건들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것이다(Calvin). (2) 여인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해산함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들이 구원을 얻게 것이다(Elicott, Lock). (3) 여자가 해산을 안전하게 치름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Moffatt). (4) 자녀를 양육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Chrysostom).
(5)
여자는 해산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Scott). 이상의 견해
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이유는 여자는 형벌로 주어진 해산의 고통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있어서는 남자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디모데전서 제2장에 대한 샤마임의 글

디모데전서2장 합당한 삶으로 기도하라

1장에서는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이유와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것에 대한 감사가 고백되어 있습니다. 2장에서는 두 가지 단락으로 나누어 가르칩니다. 1-7절에서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며, 8-15절에서는 교회 안에 성도들에 대한 가르침을 이어갑니다. 특히 여자 성도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7절 기도에 대한 교훈

8-15절 성도들에 대한 가르침

1. 1-7절 기도에 대한 교훈

1-7절 기도에 대한 교훈

ㄱ. 나라를 위해, 정치인을 위해 기도하라

1-7절까지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1-4절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하지만(1절), 특별히 정치는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2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기도가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설명은 앞선 1-3절에서 강조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4절에서 말한 ‘모든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정말 세상의 ‘모든 사람’일까요? 

톰 라이트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1세기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으로 돌아가야 할 것은 제안한다. 

“이러한 생각은 정확히 1세기 유대인들이 처해 있는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들은 여러 세대 동안 박해를 당하며 불의한 통치자들 밑에서 고통을 겪었다. 이교도 군주들은 유대교를 압박하려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출애굽 때 파라오에게 하셨던 것처럼 억압적인 폭군을 타도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계속 간청해다.” 톰 라이트 『목회서신』, 39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 황제가 바른 통치를 하도록, 관리들이 합리적이고 깨끗한 정치를 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백성과 시민으로서 당연히 의무를 져야 합니다. 주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했습니다.(마 22:21) 그 외 막 12:17, 눅 20:25에서 등장한다.

마 22: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이렇게 해야하는 이유를 몇 가지 제시 합니다.

ㄴ. 평안한 삶을 위하여

2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즉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등장하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경건(εὐσέβεια)’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5번이 등장하는데 10번이 목회서신에서 사용될만큼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3:16에서는 ‘경건의 비밀’이란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려 땅의 양분을 받아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양식을 취함으로 나타내는 삶의 열매입니다.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옮겨 심은 나무가 아직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심한 폭풍을 만난다면 쉽게 죽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환경이 전부는 아니지만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것은 확실합니다.

‘단정함(σεμνότης)’은 목회서신에서만 3번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딤전 2:2, 3:4, 딛 2:7)

딤전 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딛 2: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이 단어와 동족 형용사인 ‘셈노스(σεμνός)’는 딤전 3:8에서 ‘정중하고’, 3:11에서는 ‘정숙하고’, 딛 2:2에서는 ‘절제하며’ σεμνός의 원어적 의미는 ‘명예로운’ ‘위엄있는’의 뜻이다. 딛 2:2에서 이 단어를 어떤 단어로 번역했는지 상당히 모호하다. 만약 어순을 따라했다면 ‘절제하며’이지만 이 단어는 σεμνός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번역이다. 

 빌 4:8 등에서 사용됩니다. 셈노스가 의도한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경건한 

이러한 문장들의 맥락들을 살펴본다면 ‘셈노테스는 엄숙하고 진지하며 단정한 태도와 행위, 곧 품위 진지함, 엄숙함과 같은 거룩한 실재에 대한 경의의 (내적이며 외적인) 태도(윌리암 D. 바운스 『WBC 목회서신』 328) 를 의미합니다.

고요하고 평안함(ἤρεμον καὶ ἡσύχιον)은 비슷한 단어입니다. 두 단어는 외적 환경을 의미합니다. 그에 비해 경건함과 단정함은 신앙의 내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적 상태가 외적 상태에 지배당해서는 안 되지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ㄷ. 하나님께서 받으심

두 번째 이유는 3절에서 소개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신앙생활이 하나님께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흠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열납 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즉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그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입니다. 존 스토트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는 평화로운 상태가 복음 전파를 촉진시킨다는 뜻인 것 같다. 분명히 ‘로마의 평화’는 복음의 초기에 빨리 전파될 수 있었던 주된 요인 중 하나였다. 다라서 우리가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이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경건과 도덕성이 활짝 꽃피고 복음 전도가 장애없이 진전되는 것이다.” 존 스토트 『BST 디모데전서.디도서강해』, 79

1-7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정치인들이 바르게 정치함으로 복음이 평안한 가운데 전파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것을 위해 기꺼이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 8-15절 성도들에 대한 가르침

두 번째 부분인 8-15절에서는 성도들의 삶에 대해 다룹니다. 그런데 8절 외에는 모두 여성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대교회에서도 교회 안에서 여성 성도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문제도 많이 일으킨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여성들에 대해 무엇을 가르칠까요? 먼저 8절에 나타난 남성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 봅시다.

ㄱ. 남녀의 역할(8-10절)

남성: 분노와 다툼

남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분노와 다툼입니다. 두 가지는 동일한 연상선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분노는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남성적 성향입니다. 물론 분노가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분노는 남성들에게 있게 자주 그리고 쉽게 넘어지는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은 분노에 대해 자주 강조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성향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즉 분노는 사단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행 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바울은 에베소서 4;26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분내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죄로 쉽게 이끌릴 수 있고, 분이 오래가면 사단에게 틈을 주게 됩니다. 바울은 분노와 다툼은 연결함으로 분노이 쉽게 다툼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현재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는 에베소서 교회 안에는 남성들 간에 적지 않은 논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서 4:25-32에서는 말과 언어에 대한 권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분(4:26)과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4:31)이 함께 엮어져 있는 것을 볼 때 서로 말로 인해 다투고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여전히 말과 언어 행실에 대한 강조가 이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성: 외모를 치장하지 말라

9절은 접속사가 있습니다. ‘호사우토스(Ὡσαύτως’)는 ‘역시’ ‘마찬가지로’의 뜻입니다. 남성들이 바르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여성들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9-10절에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취하지 말아야할 행동을 설명합니다. 하지 말아야할 것과 대신 해야 할 것을 정리해 봅시다.

   하지 말아야할 것: 땋은 머리,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치장함(9절)

   해야 할 것: 단정하게 옷 입고, 소박함과 정절로서 자기를 단장할 것(9절) 선행으로(10절)

남성이 분노와 다툼이 문제라면 여성은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치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단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금하는 땋은 머리나 금, 진주, 값진 옷 등은 교회 안의 다른 지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여성들이 입어야할 옷, 치장해야할 재료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먼저 단정한 옷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단장해야 하는데, 소박함과 정절이란 재료를 사용해야 합니다. ‘정절(αἰδώς)’이란 단어와 ‘절제(σωφροσύνη)’라는 단어가 성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성적인 의미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안에서 좋지 않은 성적의도를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절제로 번역된 ‘소프로수네(σωφροσύνη)’는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의미를 가지는 동사에 ‘순결’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윌리암 D. 바운스 『WBC 목회서신』, 375

ㄴ. 교회 안의 여성의 역할(11-15절)

바울은 여성의 문제를 더 깊이 나아갑니다. 먼저 여자들은 일체 순종함으로 배우라고 권합니다.(11절) 이유는 ‘허락지 아니하노니’(12절)라고 말하는데 바울 자신의 생각인지 주님의 뜻인지 불명확합니다. 어쨌든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존재가 아닌 배우는 대상인 이유를 몇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아담이 먼지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3절) 두 번째는 타락에 있어서 하와가 책임이 크기 때문입니다.(14절) 두 가지 이유는 여성 자체가 권위에 있어서 남자보다 열등하며, 가르침에 있어서 연약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 구절들은 아직도 많은 논쟁 가운데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15절을 참고해 본다며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자들이 정숙함으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게 된다면 그의 해산함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여자들은 정숙하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 거룩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출처: https://392766.exbible.net/entry/장별설교-디모데전서2장-합당한-삶으로-기도하라 [Pensées: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