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사도행전 제7장 주석(요약자; 인내로 결실하는 자)

손진길 2024. 5. 15. 19:34

사도행전 제7장 주석(요약자; 인내로 결실하는 자)

 

 

=====7:1

大祭司長(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事實(사실)이냐

 

이것이 사실이냐 -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거스렸다는 죄목으로 고소되었다(6:14). 당시의 재판 관례에 따르면 피고에게는 고소한 내용에 대해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재판장인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고소내용에 대한 사실성 여부를 공식적으로 물었다.

 

=====7:2

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父兄(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祖上(조상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榮光(영광)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여러분 부형들이여 - 어떤 학자들(Alford, Hervey)에 따르면 스데반이 이설교를 70인역(LXX)을 바탕으로 하여 헬라어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지방에서도 헬라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식자층(識者層)에서는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였고 스데반 자신도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유대인이며 종교지도자들이었고 또 스데반 자신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설교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는 히브리어로 설교했을 가능성이 높다(Meyer). 이 설교가 어떤 언어로 행해졌던간에 본문에 드러나 이 설교의 내용의 독창성과 특이성 또는 그 의미의 심오함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한편 여기서 '여러분 부형들이여'라는 말은 공회에 모인 사람들을 겸손하고 공손하게 부른 호칭이다. 특히''()의 헬라어 '파테레서'는 공회의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하며''()에 해당하는 '아델포이'는 모든 참관자들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Lenski). 공회원들이나 고소자들은 스데반을 배교자로 몰아붙였으나 스데반은 분을 내거나 욕설로 맞서지 않고 정중히 예의를 갖추고 있다.

 

 

아브라함이...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본구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이는 갈대아 우르를 말함, 11:31)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했는데 창 12:1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다. 이 같은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번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베푸신 약속을 거듭 되풀이 하신것으로 이해된다(Lenski).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필로(Philo)나 요세푸스(Josephus)도 동의하고 있다. 여기서 '영광'은 히브리어로 '쉐키나'로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말이다( 16:7, 10;24:16, 17;33:18, 22;40:34, 35; 9:6, 23). 이 표현은 시 29:3에서 인용된 것으로 스데반은 이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말하는 하나님과 구약성경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서로 동일한 분이심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제약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7:3

가라사대 네 故鄕(고향)과 親戚(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네 고향과 친척과 친척을 떠나...땅으로 가라 - 여기서 '내가 네게 보일 땅'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말한다. 스데반의 논지(論旨)는 이 땅 자체는 '영원한 도성'의 예표로서 의의를 지닐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라는 것이다. 즉 스데반은 보다 핵심적인 하나님의 언약에 관해서는 둔감하면서 외형적 성지 숭배 의식에 젖어 있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경책하고 있는 셈이다.

 

=====7: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居()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時方(시방()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 12:4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에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고 하란을 떠났다. 유대 신학자 필로(Philo)도 동일한 진술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 연대기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70세때 출생했으며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을 때의 나이는 205세였으며 구약 성경에 따르면 이 때 아브라함은 75세였다. 그러나 실제로 데라가 죽을때 아브라함은 145세가 되어야하므로 결국 아브라함은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기 전에 하란을 떠난 것으로 진술되어야한다. 그래서 P문서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브라함이 데라가 죽기 60년 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고 가정한다. 그렇지만 성경내.외적 증거 자료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후에 하란을 떠난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데라의 나이에 따른 연대기적 차이는 여전히 남게 된다.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라가 아브라함을 낳은 나이를 130세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데라가 70세에 첫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아브라함을 낳은 나이를 130세에 낳았다고 가정하면 연대기적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7: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遺業(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子息(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所有(소유)로 주신다고 約束(약속)하셨으며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이 땅을...약속하셨으며 - 혹자에 따르면 스데반이 여기서 아브라함이 매입한 막벧라의 밭과 굴을(23:16,17)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Haenchen). 그래서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遺業)을 주지 않았다'는 말은 모순된다고 한다. 그러나 막벧라의 밭과 굴은 매장지로서의 목적을 가진것이지 유업의 목적으로서 소유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 간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 아브라함에게는 모든 것이 약속으로 주어졌고 그에게 실제로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의 자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땅을 유업으로 주고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 12:2,3)는 말씀은 75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는 믿기어려운 약속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으로 믿기 어려운 약속을 믿었다는 이 사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4:16-22).

 

=====7: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四百(사백(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그 씨가...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 스데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한 기간을 400년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출 12:40 430년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400년이라는 기간을 스데반은 창 15:13에 근거하여 말했을 것이다. 400년과 430년의 차이는 유대인들의 수자 개념에서 찾아야 되는데, 그들은 정확한 수자를 말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 주로 개략적으로 말한다( 11:26). 430년은 400년보다 정확히 표현한 것이며 400년은 개략적인 연대를 나타낸 것이다.

 

=====7:7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審判(심판)하리니 그 後()에 저희가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저희가...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당신의 계획과 섭리가 나타난다. 이 구절은 출 3:12에서 인용된 것으로 출애굽기에서는 '이곳' '시내산'이나'호렙산'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약속의 땅'이나 혹은 '예루살렘'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7:8

割禮(할례)의 言約(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割禮(할례)를 行()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祖上(조상)을 낳으니

 

할례의 언약을...행하고 - '할례의 언약'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히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약속의 증표(證標). 스데반이 이 언약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1)이스라엘은 할례를 통해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과 (2) 이 언약은 단순히 의식거행의 차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51).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것은 출 4:18-26의 주제 강해 '할례와 신앙'을 참조하라.

 

=====7:9

여러 祖上(조상) 요셉을 猜忌(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여러 조상이 요셉을...팔았더니 - 스데반의 설교는 창 37:11,28에 나타난 야곱의 12아들, 12족장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기서 요셉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메시야의 모형이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노예로 팔아버렸지만 그는 자기 형제들의 구세주로 다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죽음에 팔아 넘기워졌지만 이들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스데반이 이 12족장들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애굽'(9-16절 사이에 6번 반복)에 있던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다는 것이다.

 

=====7:10

그 모든 患難(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王() 바로앞에서 恩寵(은총)과 智慧(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自己(자기) 온 집의 治理者(치리자)로 세웠느니라

환난에서 건져내사...치리자로 세웠느니라 - 39:21;41:41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며 시 105:21의 말씀과도 연결된다. 요셉이 애굽의 극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살아남을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恩寵)때문이었으며 그에게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몽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본절에서는 바로가 요셉을 치리자로 세운 것으로 언급되지만 궁극적으로 그를 치리자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이렇게 예비하시고 섭리하셨다.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는 방향으로 일을 몰아간 결과를 낳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요셉을 통하여 계속 이루어 나가셨다.

 

=====7: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凶年(흉년) 들어 큰 患難(환난)이 있을새 우리 祖上(조상)들이 糧食(량식)이 없는지라

온 땅에 흉년들어...양식이 없는지라 - 이 구절은 창 41:54, 56;42:5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 흉년이란 당시 팔레스틴 뿐 아니라 애굽 전 지역을 휩쓴 기근을 말한다. 여기서 '양식'의 뜻으로 사용된 '코르타스마타' '건초'를 뜻하는 '코르토스'에서 파생된 단어로 70인역(LXX)의 창 24:25, 32에서는 '사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창 24:25, 32의 개역 성경 번역과 같이 '보리'의 의미보다 '사료'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먹는 것'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사람에게 적용될때는 '양식'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흉년'이라는 말은 곧 '양식이 없다'는 말과 연결이 됨으로 본절에서는 '양식'으로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는 보다 확장된 의미로는 흉년으로인해 가축의 사료 역시 바닥이 났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본절의'코르타스마타'는 사람의 '양식'과 가축의 '사료'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7:12

야곱이 애굽에 穀食(곡식)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祖上(조상)들을 보내고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 이는 창 42:1,2와 병행 구절로서 계속되는 기근 가운데 있던 팔레스틴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본래 애굽은 홍수 때 나일 강이 범람하여 주변이 옥토로 변해 곡창 지대가 많았다. 특히 풍부한 나일 강의 물은 애굽의 젖줄 역할을 하여 로마의 통치를 받을 때 로마 양식의 공급자 역할을 했다. 그런데 사실 당시 애굽에도 기근이 찾아왔으나 요셉의 해몽을 믿은 애굽 왕에 의해 7년의 심각한 기근 가운데서도애굽 지역은 양식 걱정을 별로 하지 않았다.

 

=====7:13

또 再次(재차) 보내매 요셉이 自己(자기) 兄弟(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親族(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7:14

요셉이 보내어 그 父親(부친야곱과 온 親族(친족일흔 다섯 사람을 請()하였더니

 

요셉이...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 개역 성경이 따르고 있는 맛소라 본문(MT)의 창 46:27에는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의 가족이 모두 70명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70인역(LXX) 75명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로 보아 스데반은 70인역을 인용한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수자상의 차이에 대해 비평주의 학자들은 두 가지 구전을 전제하기도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 차이는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즉 맛소라 본문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만 포함시켰으나 70인역은 그의 다섯 손자까지 포함시켰다( 26:28-37; 대상 7:14-21). 70인역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은 애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수에 들어갔으나 손자들이 생략된 것을 고려해서 75명으로 수정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차이는 표현상에 의한 것일 뿐 내용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7: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自己(자기)와 우리 祖上(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야곱이...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 이는 신 10:22과 출 1:6의 내용을 합한 것으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스데반이, 조상들이 애굽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은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이 받았으나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못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7:16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子孫(자손)에게서 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葬事(장사)되니라

 

세검으로 옮기워...무덤에 장사되니라 -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값 주고 산 무덤의 위치에 관하여 해석상 약간의 문제가 발생된다. 23:3-20;49:29-35;50:13에 따르면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산 헤브론의 막벧라 동굴에 묻혔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본구절에서스데반은 야곱과12족장들이 모두 아브라함이 최초로 정착했던 세겜( 12:6,7)에 장사되었다고 한다. 이는 수 24:32의 진술 곧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서 값주고 산 무덤이 있어서 그 곳에 요셉과 그 자손들이 묻혔다는 것과 혼동된 진술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 각기 조금씩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1)스데반이 그 당시 긴장된 상황 속에서 잠시 착오를 일으켰다(Calvin, Meyer). (2) 모든 조상들이 사마리아의세겜에묻혔다는 사마리아 전설을 따른 것이다(Jerome,Knowling). (3) 스데반이 그때 죽음 직전의 급박한 압력을 은연중에 받았으므로 아마 야곱이 세겜 땅을 산 것과 요셉이 그 땅에 장사되어진 비슷한 두 사건을 요약 단축해서 말한것이다(Bengel). 그런데 본 구절은 본서 저자인 누가의 실수일 가능성도 있다. 즉 스데반의 설교 내용이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을 누가가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창세기의 기록과 여호수아서의 기록을 혼동하여 잘못 기술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어떤 견해를 취하더라도 본문의 불일치는 해결되기 어려운 난제임에 틀림없다.

 

=====7: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約束(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百姓(백성)이 애굽에서 蕃盛(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약속하신 때...애굽에서 번성하여 - 야곱의 자손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그의 자손수는 모두 70명에 불과했다(46:27). 그러나 그 자손은 그곳에서 '생육이 중다(衆多)하고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어'( 1:7) 출애굽 당시 보행(步行)하는 장정의 수가 60만에 달했다( 12:37,38). 이는 분명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 12:1, 2)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7: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王位(왕위)에 오르매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 여기언급된 '새 임금'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두가지 견해가 있다. (1) 힉소스 왕조의 첫왕 : 이 왕조가 애굽에 진출하여 애굽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는 B.C. 1700년이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간 시기는 B.C.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므로 요셉을 아는 왕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약 150년 이상 평안히 애굽에 거했다. 그런데이 150여년 동안 불어난 야곱의 후손이 출애굽 당시 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므로 출1:9, 10에 비추어 볼 때 이 견해는 그렇게 타당하지 않다. (2) 애굽 18왕조의 첫 왕 :이 시기는 B.C. 1584년으로, 아모스(Ahmose)가 애굽을 다스렸다. 이 때는 야곱의 자손들이 번창했을 당시이므로 새 왕조의 첫 왕이 그 사람들을 당연히 견제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난당하기 시작한 시점을 힉소스 왕조 때로 보면 출애굽 시점까지 너무나 긴 시간적 격차가 있으므로 (2)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무난하다.

 

=====7:19

그가 우리 族屬(족속)에게 詭計(궤계)를 써서 祖上(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궤계를 써서...어린아이들을 내어버려 - 이는 출 1:10-22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애굽 왕 바로의 박해는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것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박해의 상황은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자 헤롯이 이스라엘의 유아를 살해하라고 하였던 것과 유사하다( 2:16). 또한 이러한 박해와 고난은 6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기도 하다.

 

=====7: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父親(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아름다운지라 - '아름다운지라'로 번역된 '아스테이오스'는 출 2:2의 히브리어'토브'에 대한 70인역(LXX)의 번역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 '토브'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아름답다' 또는 '좋다'라는 한 면만 지닌 용어가 아니라 피조물의 완벽한 모습을 나타낸다. 본절에서 '아스테이오스'도 그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모세의 아름다운 외모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거의 완벽한 모습을 지녔음을 암시한다.

 

=====7:21

버리운 ()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自己(자기아들로 기르매

 

바로의 딸이...아들로 기르매 - 2:5-10에 기록된 내용이다. 여기서 '자기 아들로 기르매'라는 뜻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 아이를 아들로 양육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그녀가 모세를 단순히 호기심이나 연민에 의해 키운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양육시켰음을 암시한다. 그녀가 애굽의 모든 학술을 모세로 하여금 익히도록 했던 것도 이 사실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승(傳承)에 따르면 공주의 아버지 바로가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공주는 바로의 뒤를 이어 모세를 왕위에 앉히려고 계획했었다고 한다.

 

=====7: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學術(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行事(행사)가 能()하더라

 

모세가...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 4:10-16에 따르면 모세는 '말에 능치 못한 자'(* 이스크노포노스 ; LXX)였으므로 그의 대변자로서 아론이 지명되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를 말에 능한 사람으로 묘사했으며 애굽의 제사장들이 과학, 수학, 천문학, 의학 등에 정통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모세가 애굽 왕실 가족으로서 이러한 모든 학문을 습득했음을 알 수 있다. 1세기 유대인 사상가요 저술가인 필로(Philo)는 모세가 음악, 기하학, 수학, 과학, 예술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모세가 자신을 '말에 능치 못한 자'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辯明)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세는 애굽 왕궁에기거하면서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아 광야의 오랜 세월을 통해 연단받았던 것이다.

 

=====7:23

나이 四十(사십)이 되매 그 兄弟(형제이스라엘 子孫(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나이 사십이 되매...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 여기서 '돌아보다'는 뜻의 헬라어는 '에피스켜토마이'로서 ' 방문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가시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 7:16) 방문하는 자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확인하여 돕고자 하는 뜻에서 찾아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 모세도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사실을 미리 알고 그들을 도울 방도를 찾고자 동족들이 고통당하는현장을방문했을 것이다.

 

=====7:24

한 사람의 寃痛(원통)한 일 當()함을 보고 保護(보호)하여 壓制(압제)받는 者()를 爲()하여 怨讐(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 압제받고 고통당하는 자신의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그의 마음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인간적인 면에서 모세의 행동은 의와 사랑의 행위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지시도 없이 행동함으로써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는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일은 모두 그 정한 시기가 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야 비로소 그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7:25

저는 그 兄弟(형제)들이 하나님께서 自己(자기)의 손을 빌어 救援(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깨닫지 못하였더라 - 스데반의 이러한 진술에 따르면 모세는 스스로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로서 자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출애굽기에 이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당시 애굽의 노예 감독관은 매우 잔인하고 포악했었다. 그래서 필로(Philo)는 당시의 애굽 노예 감독관들을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이라고 묘사했다. 모세의 살인은 압제 세력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하려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의협심있는행동으로 변호될수가 있을 것이다. 본절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실제로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봄이 무난하다.

 

=====7: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和睦(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兄弟(형제)라 어찌 서로 ()하느냐 하니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 모세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스스로 인식했으므로 히브리 민족 사이에 화해자 또는 중재자로 나섰으나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모세의 중재는 설득력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바로 궁에서 호의 호식(好衣好食)하는 동안 자신들은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모세를 지도자나 중재자로 결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너희는 형제'라는 모세의 말은 고난 당하고 있는 히브리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응집시키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7:27,28

그 동무를 害()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官員(관원)과 裁判長(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나를 죽이려느냐 - 싸우고 있는 이 두 사람을 집단적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싸움은 곧 애굽 내 이스라엘 민족의 갈등과 분열을 나타내는 것이다. 애굽 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노예 생활을 통하여 민족성 자체가 이기적으로 변해 서로에 대한 불만과 갈등이 심화되어 극단적 분열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애굽 당국이 정책적으로 조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모세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답은 노예 생활로 인해 관원을 꺼리게 된 그들의 민감한 반응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에 대해 강하게 배척함을 시사한다.

 

=====7:29

모세가 이 말을 因()하여 逃走(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모세가...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 2:15에 따르면 모세는 바로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형식상 본절의 진술과 어긋난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그렇게 문제시 될 것이 없다. 즉 모세는 자기의 살인에 대해 동족들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그 사실이 바로에게 알려지기 전에 도망했을 것이며 이 사실이 바로에게 알려지기 전에 도망했을 것이며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바로가 그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미디안 광야로의 도망은 그를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에 대해 로이지(Loisy)는 모세의 이 미디안 광야로의 도망을 매우 풍류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의 도망은 이방 세계로의 복음 전파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아들 둘을 낳은 것은 이방 세계에서 복음전파 후 얻은 결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설교하고 있는 스데반이나 본서의 저자 누가는 이 이야기를 그같은 의도에서 전개시키고 있지 않다. 출애굽기나 본문에서는 모세의 광야 생활이 하나님의 섭리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이방 선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나 그 앞 구절들이 모세의 선교에 대해 암시했어야 옳다.

 

=====7:30

四十年(사십년)이 차매 天使(천사) 시내山(曠野(광야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사십 년이 차매 -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2:23-25) 본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본 구절의 표현은 모세의 미디안 생활이 하나님의 섭리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천사가...그에게 보이거늘 -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생활은 모세를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로서 성숙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여러 모양으로 단련하신 후 비로소 부르셨다. 3:1에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이 '호렙 산'이라고 언급되고 있으나 본 구절에서는 '시내 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를 별개의 장소라고 생각 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호렙'은 그 산맥의 이름이고 '시내'는 그 산맥 중 어느 특정한 산꼭대기의 명칭이었을 것이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그 반대로 '호렙' '시내'를 바꾸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두 산이 별개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한편 '가시 나무떨기 불꽃'으로 약간 달리 번역되어있으나 70인역과 본절의 표현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상 차이는 없다. 이 나무는 땔감으로나목재로서 별로 소용이 없는 나무로 당시 학대받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 같다.

 

=====7:31

모세가 이 光景(광경)을 보고 奇異(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主()의 소리 있어

 

모세가...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 3:2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로 묘사되었고 30절에서는 단순히 '천사'로만 언급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 모세에게 나타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지만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단순히 '사자' '천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18:1-21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7:32

는 네 祖上(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히 알아 보지 못하더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 3:6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본 구절의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1) 하나님 자신은 과거와 같이 현재에도 변함없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즉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 신실하게 지켜오셨고 지금도 그 약속을 시행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102:27; 3:6). (2) 하나님은 영원토록 불변하시리라는 뜻이다.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며 모세가 죽더라도 그 하나님의 신실성은 변함없으리라는 뜻이다( 1:12;13:8; 1:17).

 

=====7:33

()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거룩한 땅 - 3:5을 인용한 구절이다. 본 구절은 시내 산 자체가 거룩한 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시내 산 광야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곳을 거룩한땅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이면 어디든 그 장소는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중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로 구분한 성막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7:34

내 百姓(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丁寧(정녕)히 보고 그 歎息(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救援(구원)하려고 내려 왔노니 時方(시방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를 구원하려고...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한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임했다. 이 부르심은 40년 전 모세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생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 부르심에 의해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구원하려'의 헬라어 '여셀레스다이' '직접 끌어내기 위하여'라는 뜻으로 애굽에서 고통받고 압박받는 백성들을 해방시키겠다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출애굽 사건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실것임을 가리킨다.

 

=====7: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官員(관원)과 裁判長(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拒絶(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天使(천사)의 손을 依託(의탁)하여 官員(관원)과 贖良(속량)하는 者()로 보내셨으니

 

관원과 재판장으로...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 여기서부터는 문체가 전환되고 있다. 평온하게 사실적인 설명처럼 이어지던 설교는 이제 그의 청중들을 향한 논박(論駁)으로 바뀌었다. 이 설교의 요지는 모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와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가 동일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구속자인 모세를 거부했듯이 구세주이시며 생명주로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 예수도 거부했다.

 

=====7:36

 사람이 百姓(백성) 引導(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紅海(홍해) 曠野(광야)에서 四十年間(사십년간奇事(기사) 標蹟(표적) ()하였느니라

 

백성을 인도하여...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 스데반은 출 7:3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는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에서 성취되었음을 강조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애굽의 바로 앞에서 많은 표적과 이적을 행하셨으며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방랑 때에도 그 백성 가운데 임하셔서 수많은 능력을 행하셨다.

 

=====7:37

이스라엘 子孫(자손)을 對()하여 하나님이 너희 兄弟(형제가운데서 나와 같은 先知者(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者()가 곧 이 모세라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 이는 신 18:15에 언급된 말씀이다. A.D. 1세기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메시야를 기대하면서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를 기다렸다. 그들은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같은 구속자'라고 말하였는데 그들은 쿰란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 같은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 18:15, 18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후기 랍비 자료들에서는 신 18:15-18 '사무엘'에게 적용시키는가 하면 혹은 '예레미야'에게 또는 예언자들의 전체에 적용시키기도 하여 기독교적 해석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무드의 많은 구절들에서는 이스라엘의 첫번째 구속자 모세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오실 메시야를 평행적으로 언급하며 신 18:15, 18을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신 18:15, 18의 예언에 근거를 둔 스데반의 주장은 당시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종말론적 소망과 일치한다.

 

=====7:38

시내山()에서 말하던 그 天使(천사)와 및 우리 祖上(조상)들과 함께 曠野(광야敎會(교회)에 있었고 또 生命(생명) () 받아 우리에게 주던 者() 이 사람이라

 

광야 교회에 있었고...이 사람이라 - 여기서 스데반이 모세의 율법을 경시한다거나 뜯어 고치려고 했다는 고소 내용이 근거없는 사실임이 입증된다. 이 구절은 모세를 지극히 칭송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광야 교호'라 함은 문자적으로 '광야에 모인 회중' '율법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교회'란 표현을 사용한 스데반의 의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의해 다시 생기게 된 '교회'와 대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마을 단위의 집회(19:32, 39, 41). (2)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성도들 즉 보편적인 교회( 1:18). (3)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모인 지역적 집단, 지역 교회. 본 구절의 '교회'는 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킴과 동시에 신약 시대의 교회를 예표(豫表)한다. 한편 '생명의 도'는 율법을 가리키는데 혹자는 누가가 '생명'이라는 표현을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Haenchen). 그러나 신 32:47에서 율법이 생명을 주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에 스데반은 율법을 과소 평가하지 않기 위해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스데반은 자신이 전하는 도가 그 '생명의 도'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7:39

우리 祖上(조상)들이 모세에게 服從(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拒絶(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行()하여

조상들이...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 이 구절은 민 14:3에서 인용한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철저한 노예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몸은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었지만 마음과 생각은 애굽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출애굽시킨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애굽에서 당했던 노예 생활이 잠시 당하는 광야의 생활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스데반은 여기서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하고 과거에 집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앞절에서 언급된 '생명의 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리고 하나님께 배은 망덕의 죄를 범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7: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引導(인도) ()들을 우리를 ()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引導(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만들라 - 이는 출 32:1의 인용 구절이다. 백성들의 완악함은 극에 달해 그들을 애굽의 압제의 그늘에서 기적과 능력으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을 인도할 우상들을 요구하였다. 특히 '우리를 인도할'이라는 말은 곧 자신들을 이 거칠고 고된 광야길에서 애굽의 길로 인도할'이라는 말로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조그마한 시험도 견디지 못하고 예수를 믿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스데반 당시의 사람들도 '생명의 주'이신 예수를 죽일 만큼 완악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7:41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偶像(우상앞에 祭祀(제사)하며 自己(자기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송아지를 만들어...기뻐하더니 - 탈무드(Talmud)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 지은 최초이자 마지막의 가장 가증한 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랍비들이나 회당 예배에서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려할 뿐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떤 랍비는 금송아지사건에서 모세에 대한 백성들의 반역은 언급하지 않고 그 사건으로 인해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렸음을 강조하여 모세란 인물 자체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스데반은 탈무드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구속자들을 반역한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지적함으로써 스데반은 당시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행위와 예수에 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 사이에 공통점을 끌어내 그들의 패역함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7: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軍隊(군대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先知者(선지자)의 冊()에 記錄(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四十年(사십년)을 曠野(광야)에서 너희가 犧牲(희생)과 祭物(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 하나님께서는 자신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민족을 외면하셨다. 사도 바울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계속 범죄하는 사람들은 더 깊은 죄악의 길에 들어설지라도 하나님께서 버려두신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스데반도 바울과 같은 맥락에서 본절의 표현을 사용했다( 1:24, 26, 28). 그런데 여기서 '하늘의 군대' '일월 성신'(日月星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우상 숭배를 대표한다. 일월 성신 숭배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 가운데서 계속 존속되어 왔기 때문에 ( 4:19;17:3;왕하 21:3, 5; 8:2;19:13; 1:5) 스데반은 이 우상 숭배를 지적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다시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 하늘의 군대'란 표현이 41절에 언급된 송아지 우상과 동일시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스데반은 송아지 우상이라는 특수한 진술에서 하늘의 군대라는 일반 진술로 단순히 논리를 비약했을 뿐 동일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송아지 우상은 애굽의 우상이었으며 일월 성신은 주로 고대 근동의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일월 성신 자체에 대한 내용은 다음 도표를 참조하라.

 

천체 - 태양 : 태양 숭배는 애굽에서 널리 행해졌으나 앗수르와 바벧론에서도 많이 행해졌으며 가나안 지역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달 : 주로 가부장제 사회의 영향권에 속해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숭배되었으나 가나안 지역에서도일찍이숭배되었다. 금성 : 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아스도렛(Ashtoreth)으로 섬겼던 것 같다. 토성 : 5:26에서 언급된 앗수르의 별신 '식굿''기윤'이 토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천사 - '하늘의 군대'란 표현이 대부분 일월 성신 곧 천체와 관련된 표현이지만 왕상 22:19;대하 18:18; 2:13에서는 '천사'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나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7:43

몰록의 帳幕(장막)과 神(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形像(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함과 같으니라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 여기서 '몰록'이란 말에 대해 혹자는 '너희들의 왕'이란 뜻의 히브리어 '말렉크켐' 70인역(LXX)이 잘못 번역한 것을 누가가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 주장한다(Haenchen). 그러나 본 구절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이방신의 이름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아람의 주()신인 '몰록'으로 번역되는 것이 무난하다. 이 우상은 놋쇠로 만들어져 있으며 황소 머리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형태를 지녔다. 사람들은 우상의팔 가운데 제물로 바칠 어린아이를 산 제물로 바친 후 밑에서 불을놓아 어린아이를태워 죽였다(왕하 23:10). 한편 여기서 '레판'이란 말은 70인역(LXX) 5:26에서 인용된 것이며 맛소라 사본(MT)에서는 '키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42절의 도표중 '토성'을 참조하라. 그런데 '레판'에 대한 명칭이 70인역 본문과 히브리 원문에 어떻게 해서 서로 다르게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에서 토성이 '렘판'(Remphan)으로 불려지기 때문에 '키윤' 대신에 '레판'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데반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여 '생명의 도'(38)를 받은 백성이 우상 숭배를 통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했는지를 설명했다. 이는 예수를 통한 '생명의 도'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당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7:44

曠野(광야)에서 우리 祖上(조상)들에게 證據(증거)의 帳幕(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命()하사 저가 본 그 式()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증거의 장막 - 벤트(Wendt)는 이 '증거의 장막'이란 원래 하늘에 있는 장막의 실제 모형이며 성전은 그것을 본뜬 모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히 8:5은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증거의 장막'이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새긴 두 개의 돌판을 그 장막 안에 보관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9:15). 그 장막(帳幕)의 실체가 하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장막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투영(投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셔서 택한 백성과 교제를 나누셨기 때문에 '회막'(會幕)으로도 불리었다.

 

=====7:45

우리 祖上(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異邦人(이방인)의 땅을 占領(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사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때까지 이르니라 -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 역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그 장막을 가지고 다녔다. 이 장막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앙에 위치해 항상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여기서 '받아'라는 뜻의 헬라어 '이아뎌사메노이' '물려받다', '상속으로 계승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는 그 장막의 계승이 여호수아 세대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초기부터 다윗 시대까지 계속해서 이어졌음을 나타내 준다.

 

=====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恩惠(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爲()하여 하나님의 處所(처소)를 準備(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다윗이...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 혹자는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려고 한 것은 '장막'의 처소이지 어떤 견고한 건물을 지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Haenchen). 그리고 그 근거로 '처소'란 뜻의 헬라어 '스케노마가 '천막', '초막', '오두막 집' 등의 의미임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분명 너무 지나친 자구적(字句的) 해석이다. 오히려여기서의 처소란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집으로 볼 수 있다(삼하7:5-16). 렌스키(Lenski)는 이 '스케노마'가 여기서 '시적 표현'으로 사용 되었다고 하여 다윗이 건물 성전을 구상했음을 암시한다. 특히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함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여러가지를 준비해 두었다. 이는 그가 건물 성전을 염두에 두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처소'란 곧 ''이나 ''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7:47

솔로몬이 그를 爲()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솔로몬이 집을 지었느니라 - 이제 여기서는 앞서 언급된 '증거의 장막'과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 비교되고 있다. 헨헨(Haenchen)은 스데반이 여기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여호와 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면서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며 수많은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견고한 성전 안에서 번제나 희생제를 받으시는 정적인 하나님으로 가두어 놓았다는 사실은 여호와 신앙의 정체(停滯) 내지는 후퇴로 규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서만 예배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냉소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건물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의미로 바뀌었음을 진술하기 위해 그 성전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성전이나 스룹바벧의 성전은 구약 시대에서는 그 자체로서 그림자적 의의를 지니면서 존속해야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7:48

그러나 至極(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先知者(선지자)의 말한 바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 실제로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 거하시면서 제한을 받으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성호'(聖號)나 그의 '임재하심'은 성전 안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스데반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전하는 요지는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를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가 운명하실 때 성소가 찢어진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27:51; 15:38). 본 구절의 진술을 통해 비록 자세하지는 않으나 스데반은 무소 부재(omni-present)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보이면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제한되어 성도를 만나지 않으심을 역설한다.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이'를 나타내는 헬라어 '휴시스토스'는 히브리어 '엘레욘'에 상응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호칭중하나이다. 벤트(Wendt)나 바우에른파인트(Bauernfeint)는 이 표현을 초월적인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했으나 이 용어는 인간이 범접(犯接)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표현이므로 단순히 초월성만 나타내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7:49,50

()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寶座(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爲()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安息(안식)할 處所(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하늘은 나의 보좌요...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 이 구절은 사 66:1, 2을 인용한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창조물 안에 거하실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 역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으로서 그분이 거하실 처소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수많은 이방 세계의 신전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들의 신을 위한 거처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그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통박(痛駁) 내지는 후퇴로 규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서만 예배 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냉소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건물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의미로 바뀌었음을 진술하기 위해 그 성전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성전이나 스룹바벧의 성전은 구약 시대에서는 그 자체로서 그림자적 의의를 지니면서 존속해야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割禮(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恒常(항상聖靈(성령)을 거스려 너희 祖上(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 지금까지 스데반은 청중들의 마음을 자극시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본절에서 자극시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극적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그는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에 대해 즐겨 사용된 구약적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써( 33:5;26:41; 9:13;10:16; 4:4;9:26)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도 그들과 같은 부류에 포함시켰다. 즉 이 말씀은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배교했던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 성령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내려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7:52

너희 祖上(조상)들은 先知者(선지자()에 누구를 逼迫(핍박)지 아니하였느냐 義人(의인)이 오시리라 豫告(예고)한 者()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義人(의인)을 잡아준 者()요 殺人(살인)한 者()가 되나니

 

의인이 오시리라 - 여기서 '의인'이란 표현은 '무죄한 자'라는 의미에 가깝다(I. H. Marshall). 이는예수가 무죄한 자로서 십자가를 진 사실과 연관짓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의인'을 메시야이신 예수로 보는데에는 학자들 간에 별 이견이 없다. 왜냐하면 '오시리라'는 표현이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것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 블라쓰(Blab)는 스데반이 50절 다음에 설교를 잠시 중단했다가 51절의 말씀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Haenchen). 그러나 설교의 내용이나 어투가 달라졌다고 설교가 중단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특히 성령이 충만하여 거침없이 설교하던 스데반이 뚜렷한 이유없이 설교를 중단 했을리 없다. 그리고 특히 스데반의 설교가 중단되었다면 누가는 그 사실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 그의 설교를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Haenchen). 한편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비일 비재하다(대하 36:15, 16; 9:26; 2:30). 그리고 이렇게 선지자들이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주제는 유대 문학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유대 사회에서 높은 학식을 갖추고 있는 공회원들은 구약성경과 유대 문학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러한 내용들을 수없이 접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 메시야까지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그래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던 것 같이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를 살해한 무리임을 폭로하였던 것이다.

 

=====7:53

희가 天使(천사) () 律法(률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천사의 전한 율법을...지키지 아니하였도다 - '천사의 전한 율법'이란 천사의 중보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율법( 3:19)을 말한다. 33:2 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율법 전수 과정에서 천사들이 중보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보편화된 것으로 짐작된다( 2:2). 아마 바울이나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이 복음보다 계시의 차원에서 열등하다는 의미로 율법 수여에 있어서 천사의 중보개념을수용했을 것이다(W. Neil).

 

=====7: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向()하여 이를 갈거늘

 

이를 갈거늘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극심한 분노를 나타낼 때 머리에 재를 뿌리거나 옷을 찢는 행위와 유사한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16:9; 35:16;112:10). 이는 그들이 스데반의 질타를 듣고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7:55

스데반이 聖靈(성령)이 充滿(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注目(주목)하여 하나님의 榮光(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右便(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성령이 충만하여 -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6:3, 5, 8, 15) 이 표현은 분노한 청중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스데반의 모습을 부각시켜 준다. 즉 스데반의 권고적 설교에도 불구하고 완악함을 버리지 않은 청중들과는 반대로 성령의 성품조차 변화된 스데반의 모습을 누가는 간략하게 보여주었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이 말에 대하여 주석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예수는 죽는 순간 천국에 들어올 자신의 순교 제자인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하여 일어서셨다(Bengel). (2) 그는 지상에서 자신의 메시야적인 직무를 이행하시기 위해 서 계셨다(Bauernfeind). (4) 법정에서 증인이 재판장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예수는 하나님 앞에 서서 스데반을 시인하고 계신다(F.F.Bruce). 그런데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의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언급된 것은 앞에서 진술된 예수의 죽으심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즉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서 계신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간접적 표현임과 동시에 스데반 자신의 증거가 신적(神的) 권위를지녔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예수가 서 계신 모습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人子(인자)가 하나님 右便(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인자가...보노라 - 예수를 '인자'라는 명칭으로 사용한 경우는 복음서들 외에는 본 구절과 계1:13;14:14 뿐이다. 예수께서는 이 명칭을 ''라는 대명사에 대한 하나의 관용어법으로 사용하셨고 또 단 7:13-28의 용례를 반영하는 명칭의 하나로 사용하셨다. 인자에 대해서는 요 8:21-59의 주제 강해 '인자의 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一心(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큰 소리를 지르며...달려들어 - 공회의 스데반에 대한 사형 집행은 불법이었다. 이들은 당시 로마법에 따른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정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여기서 그들이 큰소리를 지른 것은 스데반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감정이 얼마나 고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7:58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證人(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靑年(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성밖에 내치고...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 유대인의 죄인 처형 방법은 먼저 죄인을 3.5m 정도 사형 집행 장소에서 아래로 떨어뜨린 후 그가 죽지 않았을 경우에는 크고 무거운 돌들을 그 죄인에게 던져 죽게 하였다고 전한다(Mishna). 그리고 죄인에게 돌을 던질 때 증인들이 먼저 던진 후 주위의 사람들이 던졌다. 그런데 스데반의 청중들은 자신들이 모두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다는 의미에서는 증인들이었으나 공식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은 불법이었다. 특히 그들은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제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발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의 사형 집행 과정에서와 유사하게 그들의 종교적 편견과 독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편 증인들이 옷을 벗었다는 사실은 피고가 옷을 벗었다고 기록한 미수나(Mishna)와 다르다. 어떤 이유로 증인들이 사울 앞에 옷을 벗어놓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이 주도적으로 동참했음을 보여주고자 그 표현을 사용한 것 같다. 이는 22:20에서 기록된 바울 자신의 회고(回顧)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主(예수여 내 靈魂(령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돌로 스데반을 치니...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여기서 영혼을 부탁하는 스데반의 기도는 눅 23:34, 46의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혹자는, 저자 누가가 스데반의 처형 사건을 두고 예수의 위대한 최초의 순교 행위의 재현인 것처럼 나타내려고 의도했다고 주장한다(C.H.tabent). 그러나 이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누가가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스데반의 순교를 동일시했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누가는 여기서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특징지웠던 용서와 책임의 정신이 예수의 초기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났었음을 보여주고자 했으리라고는 짐작될 수 있다.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여 이 罪()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무릎을 꿇고...자니라 - 렌스키(Lenski)는 스데반이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공회원들에게 너무 심하게 돌을 맞았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무릎을 끓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59절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1차적으로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절에서 그가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끓었다고 보기 힘드나 돌에 맞는 과정에서 그가 쓰러져 있던중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해 그리고 곧 대면하게 될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무릎을 끓었다고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편 이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박해의 시발점이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교회는 팔레스틴 각지와 아시아 지역까지 흩어지게 되었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박해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여 선교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결국 스데반의 순교의 피는 초기 기독교 확산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