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주석

사무엘하 제1장 주석(요약자; 인내로 결실하는 자)

손진길 2023. 9. 2. 04:19

사무엘하 제1장 주석(요약자; 인내로 결실하는 자

 

=====1:1

 사울의 죽은 후라 - 사무엘상 . 하를  연결해  주는  의미  있는  구절이다(Cahen,

Wordsworth). 랑게(Lange)는 이 문구가 2장에 나온 용례처럼(2:1, 그 후에) 단순히 내

용의 흐름을 바꾸어 주는 보편적 형식으로서 사무엘상. 하와 구분점이 되는 것만은 아

니라고 한다. 그러나 구약 역사서 중 상당수가 '...가 죽은 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

음을 보아( 1:1; 1:1;왕하 1:1) 이 문구를 사무엘상 .하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음은 적절하다. 더욱이 이 문구에 의해 내용면에서 폭군 사울 왕의 시대와 성군  

윗 왕의 시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을 보아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사무엘상. 하가 히

브리 성경에서는 한권으로 되었을지라도 이 문구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은 매우 적절하

며 또한 그 의미가 깊다.

   다윗이...도륙하고 - 삼상 30:16-20의 사건을 가리킨다. 즉 앞서 다윗은  아기스와

함께 출전(出戰)하느라 잠시 시글락을 비워 둔 적이 있다. 그때 아말렉족이  시글락을

침입, 다윗의 백성을 약탈하였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다윗은 그 뒤를 추격, 아말렉

족을 격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였던 것이다.

   시글락 - 브엘세바 북서쪽 19.2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원래 시므온  지파에게

배당 되었으나( 19:5;대상 4:30) 사울 시대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편 가

드의 아기스 왕은 다윗이 사울에게 뒤쫓기고 있을 때 시글락(Ziklag)을 다윗에게 주어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꾀하기도 했었다(삼상 27:6;대상 12:1,20). 즉 사울

에게 쫓기던 다윗이 가드로 도망와 아기스 왕과 군사적 관계를 맺고 이 곳을 얻었던것

이다. 덕분에 다윗은 지금까지 이곳을 그의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며 은

거할수 있었다(삼상 27:8,9;30:26-30).

 

=====1:2

 제 삼 일에 - 다윗이 아말렉 족을 추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삼상 30:16-20) 제 사흘째 되던 날을 가리킨다.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 사울과 그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레셋군을 맞이하

여 교전(交戰)하던  격전지(삼상 31:1-7)에서부터 도망쳐 나온 것을 가리킨다.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 이는 그 당시 근동 지방사람들이 자기의

극한 슬픔을 표시하던 한 방법이다( 7:6;삼상 4:12). 특히 그중에서도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는 극도의 고통이나 번뇌에 사로잡혔을 때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나타내던 한

표현법이다. 한편 그밖에도 고대 근동인들은 금식, 굵은 베옷을 입는것,  허리에 굵은

베를 띠는 것 따위에 의해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곤 하였다( 37:34;삼상  31:13;왕상

21:27; 35:13). 그러나 본절에 나오는 이 사람의 행위는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위증

(僞證)에 비추어볼 때(5-10) 전적으로 거짓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에게...엎드려 절하매 - 이는 곧 다윗을 자신의 주()로 인정하는 경외와  

종의 자세이다. 즉 이는 이제 죽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위에  오를

자가 곧 다윗임을 인정하는 행위에 다름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땅에 두  활과  무릎이

닿을 정도로 부복(俯伏)하는 행위는 당시 백성들이 자신의 군주나 지도자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던 자세이기 때문이다(  14:4;19:18;  42:6;삼상  24:8;왕상  18:7;왕하

2:15).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인간적으로 씁쓸한 감정을 떨칠 수 없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도 사울 휘하에서 충성을 다하던 자가 사울이 죽자(1) 얼른  다윗에게로

도망쳐 와 이처럼 새로운 충성을 표하니 그의  약삭빠름과 간특(奸慝)함을 엿볼 수 있

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p.447).

 

=====1:3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 이와 같은 보고를 올리고 있는 이 아말렉 사

람은 아마도 이스라엘 군대에 고용된 용병(傭兵)이었을 것이다(8,13). 그러기에  

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하고 사울마저 위기에 처하자(4-10;삼상 31:1-6)  진영을

이탈, 잽싸게 도망쳐 나왔을 것이다.

 

=====1:4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 아말렉 사람의 보고에 대하여 다윗이 좀더 구체적인  전황

(戰況)을 묻고 있는 장면이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군이 어떠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기에

아말렉 용병이 다 도망쳐 나올 정도였는지 무척 궁금해한 것이다(Keil &  Delitzsch).

한편 이 같은 다윗의 물음은 과거 아벡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엘리 제사장이  초조한

심정으로 묻던 질문과 꼭같다(삼상 4:16). 더군다나 이 두 경우 모두 1)이스라엘의 대

전국(對戰國)이 블레셋이며 2)이스라엘군이 참패를 당한 점  3)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

엘에 새로운 지도자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처럼 과거 아벡 전

투결과, 엘리에서 사무엘로 통치권의 전황이 이루어졌듯(삼상 4, 7) 이제 길보아 전

(삼상 31) 결과, 사울에서 다윗에게로 통치권이 전환되게  된 사실(2:1-4)은 배후

에서  역동적(dynamic)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새

삼 느끼게 해 준다.  즉 비록 인간의 역사는 실패로 끝나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가운데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성취시켜 나가고 계시는

것이다.

   군사가...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 이미 삼상 31:1-7에서 자세히  

급된 상황이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대패(大敗)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울에게 주셨던

예언(삼상 13:14;15:23,26,28;28:19)의 성취라는 의의를 지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1:5

 사울과...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였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다윗의 심정이 역설적으로 드러나있는 반문이다. 즉 다윗은 아말렉 사

람에게 "네가 직접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목격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어찌 감히  

가 함부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고 하느냐?"는 의미로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서도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지금껏 자신을 박해하

던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쉬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그 아들 요나단이 전사한데 대하여 충격과 당혹감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1:6

 소년 - 이에 해당하는 '나아르'(*      )는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 소녀, 청년, 처녀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용병(mercenary)

로 전투에 참여한 점으로 보아 여기서는 20세 전후의 청년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

. 그러기에 공동번역 및 대부분의 영역본(KJV, NIV, RSV)들은 이를  '젊은이'(young

man)로 번역하고 있다.

   내가 우연히...올라 보니 - 아말렉 소년의 거짓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고  

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사무엘상 마지막 장에 의하면 사울의 죽음을 목격한 자는 그의

'병기 든 자'로서 처음부터 사울과 함께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것으로 나와 있기 때

문이다(삼상 31:1-6).

   길보아산 - 이스르엘 골짜기(the valley of Jezreel)에 위치한 해발 497m의 석회암

구릉이다. 삼상 31:1 주석 참조.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 혹자(Clericus)는 이를 사울이 창을 사용,  자살을

시도하려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의지하다'  해당하

'솨안'(*      ) '기대다', '쉬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극도로 지친 사울이 땅에 꽂힌 자신의 창을 의지한 채 힘들게 겨우 서 있는 것을 의미

하는 말로 봄이 낫다(Lange). 이는 당시 역경 중에  처해 있던 사울의 비참한  지경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병거와 기병은 저를...따르는데 - 다시 한번 아말렉 소년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병거(chariots)는 평지에서나 사용 가능한 도구이지 산에서는

그 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군이  블레셋군을 피해  길보아 산으로

도망친 이유도 저들이  병거를 타고서  추격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삼상

31:1). 그러자 그때 블레셋군은 병거나 기병대신 '활쏘는 자들'을 동원  이스라엘군을

추격했었다(삼상 31:3).

 

=====1:7,8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 사울의 죽음과 관련된 아말렉 소년의  보고(6-10)

완전히 날조된 거짓 보고임을 드러내 주는 결정적 단서이다. 왜냐하면 할례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사울(삼상 31:4)이 스스로의  신분을  '아말렉

사람'이라고 밝힌 소년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9)은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9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 직역하면 '고통이 나를 붙잡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

'에 해당하는 '솨바츠'(*     )는 간혹 경련, 어지러움증, 현기증 따위를  의미하기

도 한다(De Wette, Hesenius, 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전후  

맥을 보아 여기서는 뒤쫓아오는 적들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느낀데서 온 '공포'

'두려움'을 가리키는 듯하다(Matthew Henry). 이처럼 심령의 평안을 잃어 버리고 죽음

의 공포나 인간적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는 일반적 현상이다.

 

=====1:10

  엎드러진 후에는 - 여기서  '엎드러지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분명치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팔'(*      ) '쓰러지다'는 뜻이다.  따라서 혹자는  

를 사울이   창에  엎드리어  자살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Matthew

Henry).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이를 사울이 블레셋에게  '패배하는 것'  의미한다

고 본다(Lange, 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그 곁에 서서 죽이고 - 이처럼 아말렉 소년은 자신이  사울의  부탁을 받고서  

울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상 31: 3, 4에는 사울이 블레셋군이 쏜 화살에  

아 중상을 입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이같은 차이점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 1) 성경은 성령의 영감(靈感)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여러 자료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편집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는 견해(Ewald). 2)사무엘

.하의 저자가 동일인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라는 견해(Wordsworth). 3)아말

렉 소년이 다윗으로부터 상급을 받기  위해  사울이  자결한 사실을 숨긴     거짓

증거했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라는 견해(Lange) 등이다. 이 중 첫번째 견해는 성경

영감설 자체를 부인하는 자유주의적  견해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두번째 견해는 사무엘상.하의 저자가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서로 달리 진술할 수 없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번째 견해는 지금껏 우리가 살펴온 바와 일치한다. 즉 사울의 죽음에  관한  아말렉

소년의 보고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일관된  위증(僞證)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도  세번째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Brown,   Fausset,   Jamieson,   Rust,

R.H.Pfeiffer).

   면류관 - 원어 '네제르'(*      )는 일반적으로 '왕관'(crown)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사울이 이러한 왕관을 착용했을리는  만무하다.  아마

이는 사울의 투구에 둘러 쳐져 있던 좁다란 금띠로서 왕권을 상징하던 것인 듯하다.

   팔에 있는 고리 - 사울이 팔에  차고 있던 고리는 고대 근동의 군지휘관들이  

 지니고 있던 장신구 중의 하나이다( 31:50). 오늘날 발굴된 앗수르의 조각물들

에도 보면 손목과 팔에 고리를 찬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Lavard, Wycliffe).

 

=====1:11

  자기 옷을...찢으매 - 2절 주석 참조.

 

=====1:12

  울며 금식하니라 - 금식 역시 극한 슬픔을 나타내던 한 방법이다. 2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슬픔은 지극히 신앙적인 것이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윗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슬퍼했기 때문이다. 1)그의 동포들이 살육당했기 때문이

. 2)그 중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 요나단도 있었기 때문이다. 3)그러나 그보다 더 중

요한 이유로서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짐승 같은 이방인에게 짓밟혔기 때문

이다. 4)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기름부음 받은 왕 사울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거 사울은 하나님의 성호(聖號)로 기름 부음 받은,  

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신정 국가의 왕이었다(삼상 10:17-24). 따라서 그가  블레셋

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은 것은 곧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1)하나님의 언약

이 파기됨. 2)사울과 그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권위가 떠남.  이러한  까닭에

다윗은 사울에 대한 그의 사사로운 감정을 초월하여 진정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였

. 즉 다윗은 사울 왕국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아 이방인들에게서 조차

능욕(凌辱)당한 사실을 못내 안타까와하며 슬퍼하였던 것이다.

 

=====1:13

 나는...아들이니이다 - 이와 관련 매튜 헨리(Natthew Henry)는 한  유대인  전설을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곧 이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마부였던 도엑(Doeg)의 아들이었

다는 전설이다. 그에 따르면 사울은 자결하기 전에 자신의 면류관과 팔고리를 이 청년

에게 건네 주면서 다윗에게 바치라고 명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그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외국인 -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    )는 이스라엘에 임시로 체류하는 타국인

(*   , 노크리)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그 사회에 동화(同和)된 이방인을

의미한다( 22:21;23:9). 이들은 유대 후기에 완전한 시민들처럼 대우를 받았으며(

47:22), 3의 십일조를 분배받는 특권을 누렸다( 14:29). 또한 이들은 여호와  

교로 개종할 경우 이스라엘인과 다름없이 율법에 대한 책임이 있었으며, 동시에  율법

의 보호를 받았다( 12:48,49; 16:29; 17:8,15; 18:26; 19:34; 24:22; 25:6; 1

:16; 10:18; 16:11). 뿐만 아니라, 이들은 법소송에서 위대하신 영주, 곧 하나님께 직

접 호소할 수 있었다( 24:22).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인과 같이 땅을 소유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분명 외국인이 갖는 불이익이었다. 때문에 아말렉 소년은 이러한 불리

한 입지 조건으로 인해 다윗에게 아첨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Rust).

 

=====1:14,15

 저를 죽이라 - 이처럼 다윗이 아말렉 소년을 죽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정치적인 차

원에서 사울을 죽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1)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여호와

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죽인 것은 여호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으며(

24:11;31:4), 또한 신정 국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는 자의 왕권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2)아말렉 소년은 이스라엘에 귀화(歸化)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법도를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주석 참조. 즉 그는 적어도 이스라엘 사회가 귀화한 외국

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전심 전력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

서 그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도 이스라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며 또한 그 왕에게 충성

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사울을 살해하였으니 은혜를 악으로 갚은

셈이다.  따라서 다윗이 그를 처단한 것은 하나님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는  행위인

동시에, 여호와의 권위에 대적한 악을 제거한 공의로운 행위였다고 할 수있다.  

는 이와 같이 공의로운 처단을 함으로써 은연중 신정 국가의 왕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1:16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영혼

이 깃든 처소로까지 묘사되어 있다( 9:4; 3:17;17:11,14). 그러나 여기에서  피는

최고의 형벌, 또는 죄에 대한 책임 등 처벌을 의미한다. 그리고 머리는 개인의 인격과

육체, 생명 따위를 의미하는 대표 개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피를 흘린 그 책임이 바

로 네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9:6)라는 원리에 따라 다윗은 사울을 살해한 피의 대가를 아말렉 소년에게

서 찾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1:17

 슬픈 노래 - 원어 '키나'(*       )  '(장례 때에) 소리내어 울다'  뜻의 ''

(*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곧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를 가리키는 바

'애가', '비가' 또는 '조가'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다윗이 아브

넬의 죽음 앞에서(3:33,34),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죽음 앞에서(대하 35:25) 지은 시들

은 모두 이러한 '키나'이다.

 

=====1:18

 활 노래라 -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오직 '케쉐트'(*     ),  ''이라고

만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애가' ''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사울이 죽게 된 이유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

을 맞은 때문이다(삼상 31:3). 2)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

문이다(삼상 20:17-42). 3)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활쏘는자들로  유명했

었기 때문이다(대상 8:40;12:2). 4)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2).

   야살의 책 - 여기서 '야살'(*      ) '의로운 자'(righteous one)란 뜻이다.  

러므로 '야살의 책' '의로운 자의  '으로  번역될    있다(Keil  &  Delitzsch,

Lange). 이 책은 이곳외에 수 10:13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이  

소한 여호수아와 사무엘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해지

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기원이나 그 정확한 내용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이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건을 노래한 서사시를 수록했던  

대 문서였을 것이다(Glodschmidt, Keil).

 

=====1:19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 여기서 '' '길보아 산'(mount Gi-

lboa)을 가리킨다(삼상 31:1). 그런데 '너의 영광'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사울 및 요나단 그리

고 모든 이스라엘의 용사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Ephrem).  그리고 다른 하나는 '

스라엘의 영광'을 대표하는 사울과 요나단만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

ary). 이 중 보다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견해는 후자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여 지은 애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절내에서 '너의 영

' '두 용사'란 말과 서로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영광'에 해당하

는 원어 '체비'(*       ) '광채', '영광'이란 뜻 외에도 '가젤 영양'이란  뜻을 지

니고 있다. 그러므로 수리아 역본(the Syriac Peshitta)은 이를 '가젤 영양'으로 번역

하기 있기도 하다. 아마 이는 사울과 요나단의 민첩성 및 그 용모, 즉 가젤 영양과 같

이 재빠르고 아름다운 용모를 염두에 둔 번역일 것이다(삼상 9:2; 10:23).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 25, 27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구절로 본 애가의

후렴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슬픔이 얼마나 극

심한 것이었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1:20

 가드...아스글론  - 블레셋의  5  성읍중  가장   대표적인  성읍들로서(삼상

5:8,10;6:17) 그 땅 전체를 두 성읍으로 나타내는 시적 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가드

에 고하지 말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재난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서 이는 훗날

하나의 격언이 되었다( 1:10).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이스라엘의 비극을 원수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금한 이유는 원수의 기쁨이 하나님의 백성의 슬픔을 배가 시키는 것

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p.290).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 여인들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용사들

을 기쁨으로 맞이하며 춤과 노래로써 축하하는 것은 근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습

( 15:20;삼상 18:6)이다(Keil, 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다윗은  거민

들과 수치와 슬픔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조시키는 가운데  더욱 애잔한  심정으

로 애가를 읊고 있는 것이다.

   할례 받지 못한자 - 특히 이 말은 블레셋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  되었는데(삼상

14:6;17:26;31:4) '  같은자'라는 의미를 지닌 경멸어이다(Pulpit Commentary).  

마도 이는 이스라엘의 선민(選民) 사상에서  기인된 것으로 오직  할례받은 자만이 하

나님 안에서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의식(意識)  반영일  것이다( 17:9-14).

 

=====1:21

 길보아 산들이...없을지어다  -  이는 자연에 대한 실제적 저주라기 보다는 길보아

산도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함께 애도해야 한다는 시적 표현이다.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 여기서 '제물'(*           , 트루마)은 거제를 의미한

( 7:14, 32). 그런데 이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 떡'  드리는 것이니( 15:20)

'제물 낼 밭'이란 곧 풍성한 첫 열매를 내는 비옥한 땅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그리고

본 절에서 다윗은 길보아 산이 메말라 박토가 되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함께 애도

해 주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  -  옛날에는 적의 무기가 잘

미끄러져 빗나가도록 하기 위해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것( 21:5)이 보토이었다(Lan-

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그런데 이제 '사울의 방패가 기름칠도 않은 채 버

려졌다'(공동 번역)는 것은 곧 사울은 전사하고 그의 방패는 피묻은 채 나뒹구는 비극

적 상황을 의미한다(Keil & Delitzsch). 이와관련 랑게(Lange)는 논평하기를 "이는 하

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현상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였다.

 

=====1:22

과거 사울과 요나단의 무용(武勇)을 회상하며 찬양하고 있는 구절이다. 개역  성경

의 표현은 다소 그 뜻이 애매 모호한데 다음과 같이 공동 번역은 "요나단이 한번 활을

쏘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살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

는데"라고 표현하여 그 뜻이 비교적 명쾌하다.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 '화살은 피에 취하고 칼은  육체를  삼킨다'

( 32:42)는 것과 같은 시적(詩的) 표현이다. 즉 이는 과거 사울이 '천천'이나  되는

(삼상 18:7) 많은 적들을 살육하였음을 회상하고 있는 구절이다.  

 

=====1:23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 - 이 말은 다윗의 친구 요나단 뿐만 아니라 초기에 유능한

지도자의 미덕을 보여 주어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사울(삼상 11:12,13)에게도  해당되

는 말이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정적(政敵) 사울의 단점은  숨기고  

, 곧 존경할 만한 점들만을 이 애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성격상  

노래가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빼놓을 수  

는 것은 다윗의 성품이 매우 관대한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장차  

정 국가의 왕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의 고귀한 신앙 인격을 드러

내 준다.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 자식으로서 끝까지 아비를 버리지 아니하

였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신하로서 충성을 다한 요나단의 효심과 충정을 기억케  해주

는 구절이다. 즉 과거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으로 인해 아비 사울로부터 죽음의 위협

을 당하기까지 하였다(삼상 20:30-34). 그러나 요나단은 결코 그러한  사울을  배반치

아니하고 조국을 수호하다가 사울과 함께 한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삼상

31:1-6).

   독수리보다...사자보다 강하였도다 - 전쟁에 능하였던 위대한 용사나 영웅들을  

리킬 때 흔히 사용되던 개념이다. 즉 독수리 같은 날쌤( 9:26; 23:5;  1:8)

사자와 같은 힘쌤, 용감함( 33:22; 104:21; 13:8)은 고대의 용사들에게서  

아 볼수 있던 특징이다(Lange, Keil & Delitzch Commentary).

 

=====1:24

 붉은 옷...금 노리개 - 아마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져온 전리품(戰利品)들일

것이다. 사울 생전에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러한 전리품을 하사받아  자신들을  치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는 사울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안정

과 번영을 시사해 준다(

 

=====1:25

 오호라 두 용사가...엎드러졌다 - 19절 주석 참조.

 

=====1:26

 내 형 요나단 - 여기서 ''에 해당하는 원어 '아흐'(*     )는 단순히 연령적으로

손위에 있는 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이는 마치 친형제와도 같이 친근한 관계에

있는 자를 가리킬 때가 많다. 다윗이 요나단을 가리켜 '내 형'이라고 칭하고 있는  

도 바로 후자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  NIV는 이를 '그대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다'(you

were very dear to me), RSV '그대는 나에게 심히 기쁨이 되었다'(very pleasant

have you been to me)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생전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베풀

어 주었던 은혜가 지극하였음을 의미한다.  사실 과거에 요나단은 사울의 왕권이 다윗

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도 개의치 않고 그를 자기 목숨처럼 위하며 사랑했었다(삼상 20

:12-17).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  '기이하다'에 해당하는  '파라'(*     ) '경이롭다',

'불가사의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표현할때

사용되었다( 15:11; 5:9; 9:10; 17:7; 78:4; 139:14; 29:14; 8:6).  

런데 여기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것은 실제로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경이로울

만치 자기 희생적이었으며 영원 불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최상급으로 표현한 말이다.

남녀의 결혼은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이 아니라  영혼의 결합도  의미한다( 2:24,25;

5:22-33). 따라서 남녀의 영적 결합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과 요

나단의 사랑은 이보다 승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저들의 마음이 통하고 그들사이에 아무

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극찬의 말이 아닐 수 없다(삼상 18:1).

 

=====1:27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 여기서 병기는 칼이나 창, 화살 또는 병거와 같은  

제적 병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이는 '싸우는 군인', 즉 사울과 요나단 더 나아가

서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블레셋과의 싸움에 스스로를 병기처럼 내던

졌으나 불행히도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삼상 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