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주석

사사기 제11장 주석(요약자; 인내로 결실하는 자)

손진길 2023. 7. 15. 01:37

 

사사기 제11장 주석(요약자; 인내로 결실하는 자)


=====11:1-3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  (1)  버네이
(C.F. Burney)는 말하기를, "여기서 지방 이름("길르앗")이 입다의  아버지로  인격화
(人格化) 되어 나온 것을 보면, 1절 하반에서 2절까지는 후대인의 삽입구이고  본래의
원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Here the district is personified as  father
of Jephtha-a mark of late for vv. I -2, which can have formed  no  part  of  the
original narrative.-The Book of  Judges,  with  Introduction  and  Notes,  1970,
p.308). 그러나 버네이의 이와 같은 추측은 합당치 않다. 사람의 이름이 지방  이름과
같은 실례는 역사상에 많이 있다. 특별히 민 26:29, 32:40을 참조하라.
   그러면 "입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1) 기생의 아들이요(1),  (2)  이복
(異腹) 형제들에게서 축출된 자요(2), (3)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하류배(下流輩)
와 함께 사는 자였다(3).
   ""(*      )이란 땅은 요단강 동쪽에 있는 곳이다. 삼하 10:6, 8 참조. "잡류"
(*                     )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
. 여기서는 이 말이 생활 안정을 얻지 못하고 유리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리킨다.
들의 실정이 입다의 처지와 같기 때문에 그들이 그와 동조했을 것이다.  삼상  22:1-2
참조.


=====11:4-9


  당신이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 (6절 끝) 암몬 족속의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길르앗 장로들" "입다"를 그들의 "장관"(*        ), 곧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여기 이른 바 "장로"는 인도자를 가리켰을 것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 (9절 하반) 입다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
도하는 진실한 신자였다(11절 하반). 진실한 신자가 사람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고
고독한 중에 신앙을 지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시는 한 때가  오는  법이
. 그를 박대하던 자들이 그에게 절하게도 된다. 7:7-8; 3:9 참조. 요셉을  
방인들에게 팔아버린 그 형들은 마침내 그에게 찾아와서 그에게 은혜를 구히기 위하여
무릎을 꿇었다( 37:27-28, 42:6).
   입다는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였다. (1) 그는 길르앗 장로들의 약속을 신중히 취급
하며 그들의 진실성을 검토하였음.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
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란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
느냐"라고 하였다(7). 그 장로들은 길르앗의 정치적  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찌기 입다의 형제들이 그를 내어쫓는 불의한 처사를 알고도 그대로 방임, 혹은 찬동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
었다. 이 책임을 추궁하는 입다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입다를
저희의 최고 지도자로 삼겠다고 다시 약속한 것이다(8). 그들은 변동  없이  끝까지
입다를 최고 지도자로 삼을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다(10). (2) 그는
   "  용사"였으나 자기힘으로 승리할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였음
. 그는 믿음으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이라고 강력히 주장하
였다(9  하반). 이 말은, 그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믿은 증거이다.
17:47  참조. (3) 그는 암몬 족속과 전쟁 할 책임을 지고 하나님께 그의 사정을 고
하며 기도하였음. 그는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4)
는 암몬  자손을 반격하기 전에  먼저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하여 암몬  왕에게
사신(使臣)을보냈다(12-27).  그러므로 봉크(C. Vonk)는 말하기를, "입다는 신앙이 진
실할 뿐  아니라  지혜롭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었다."라고  하였다(Jefta  niet
alleen  eengelooig - man was--maar ook een wijs en voorzichtig man.-De Voorzei
de Leer, Deel I, De Heilige Schrift, Inleiding op De Profeten, Jdzua, 1973, p.5
63).


=====11:12-28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전쟁 없이 외교(外交)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
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암몬 왕은
   "아르논에서 부터 얍복과 요단까지"의 영토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고 하면서 그
땅을 반환하라고 주장하였다(13).  그 때에 입다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셨기 때문이라고 길게 변론하였다.  (1) 이스라엘은 언제나
다른 민족들을 침략한 적이 없다고 함(16-18). 이스라엘이 일찌기 광야를 통과하던 때
에도 에돔에게나 모압에게나 화평스럽게 행했다고 하였다. 20:14-22; 2:9 참조
. (2)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왕  시혼"과도  이스라엘은전쟁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그가선
제공격(先制攻擊)으로 이스라엘을 침해하였다는  (19-22). 그때 전쟁의 책임은 헤스
본 왕 시혼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하여 시혼왕의
(아르논에서 얍복, 요단까지)을 취하도록 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니 결국 그 땅은암
몬 족속의 소유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유라고  설명하였다(23-27).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가하냐 - (23절 하반) 여기 "네가"란 말(*       )
은 역설체(力設體)인데 암몬 왕을 힘있게 지적하는 것이다. 이말은, 하나님이  이스라
엘에게 주신 땅을 암몬 왕 "네가" 차지할 권리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 (24절 상반)  "그모
"(*        )는 모압 신()인데( 21:29; 왕상 11:7, 33; 48:7, 13,  46),  
때의 암몬 왕이 혹시 모압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암몬  족속의   "밀곰"(*
)(왕상 11:5)을 관설하지 않고, 모압의 신"그모스"(*        )를 관설한 듯하다.
   여기서 입다가 그모스 신을 믿을 만한 신이라고 간주하는 뜻에서 관설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모스에 대한 그의 관설에 있어서 그의 중심에는 그것을 헛된 것으로 판단하
면서도 다만 이론을 위하여 그것을 관설한 것 뿐이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
와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27).


=====11:29-32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 (31) 이것은 입다가 서원(誓願)하는 말이다.  그는  암몬
족속과 전쟁하기에 앞서 여호와께 이와 같은 서원을 올렸다. 여호와께서 이번  전쟁에
승리케 해주시면 집에 돌아가서 가장 먼저 영접 나온 자를 하나님께 "번제"  드리겠
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 자 "번제"(*        )는 반드시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기서는 그저 바쳐 올리우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한  
이다.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율법에  엄금되었다(  18:21,
20:2-5; 12:31, 18:10). 입다는 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암몬 족속
이 몰록 우상(혹은"밀곰"이라고도 함, 왕상 11:5,33)을 섬겼는데(왕상 11:7), 저희 자
녀를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다. 그 때에 입다가  
몬을 대적하면서 저런 미신도 미워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11:35,36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나이로다 - (35) 입다가 승전하고 집으로 돌와왔을 때에 그의  외딸("무남독녀")
누구부다도 먼저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했다. 이 때에 입다는 그의 서원한    때문에
걱정하였다. 여기 이른 바 "슬프다"란 감탄사(感歎詞)는 히브리어로 "아하"(*       )
인데 그저 염려를 나타내는 말이다. "슬프다"는 말은 너무 심각한 불행을  표현하므로
여기서 적당한 번역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말(*
          )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 "너는 나를 당황케 만드는구나"라고. 우리 한
역의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번역은 역시 너무 심각한 불행에 대한 표현이다.  35
상반의 히브리어를 보면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죽임이 될 지경의 불행을  염두에  
것이 아닌 것 같다.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성전  봉사에
평생 바침이 되어 그(입다)의 기업이 계승되지 못하게 됨을 그 중점으로 하였을  것이
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
대로 내게 행하소서 - (36) 입다의 딸은 이 말로써 그 자신의 인격을 보여  주었다.
(1)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며, (2)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효도를 행하였고, (3)  의리
(義理)를 위하여는 자신이 희생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11:37-39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입다의 딸이 죽어 번제물이 되었는가 함이다. 37  하반과
38절 하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란 말(*                ), 실상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
"라고 번역되어야 하며, 39절 하반의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한 말(*                       ), "그녀가남
자를 알지 못하니라"라고  번역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님께 "올려 바침"
되었다는 것(31절의 "번제"라고  번역된*        ), 그녀가 평생도록 결혼하지 못하
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이 된 것을 가리킨다. 38:8참조.
   중세대(15세기) 이전에는 입다의 서원 실행이 그 딸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  것이라
고 해석하였으나, 중세대 이후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녀로 하여금  평생도
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
는 다음과 같다. (1) 입다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할 인물이
아닌 까닭이다. 그는 자기를 등용하려고 찾아 온 길르앗 장로들의 청원도 신중히 검토
한 후에 받아 들였었다(7). 9절 참조. (2) 입다가 암몬 왕에게 전한 말(15-26)을 미
루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적(事蹟)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 만큼, 그가 구
약 율법에 대하여 무식한 인물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까닭이다. 구약 율법에 자녀를 불
로 태워 바치는 것은 극악한 죄로 규정되어 있다( 18:21, 20:2-5). (3) 입다는 여호
와를 두려워하며 신뢰하는 인물이었으니 만큼(9절 끝, 11절 끝), 그가 하나님이  금하
시는 죄악을 범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일 입다가 하나님이 엄금하시는  죄를
범하였다면 그는 레 20:2-5의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사사(士師)로서 6년 간이나 역사하고 죽었다(12:7). (4)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이 입다를 신앙 인물로 칭찬하기 때문이다( 11:32).
   우리는 입다의 행적에서 배울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대로
용감하게 실행한 그의 진실성과 및 그의 신앙 용단이다(35절 하반, 39절 하반).  그리
고 그의 실행력(實行力)의 모본을 따라서 그의 딸도 경건의 법에 잘 순종한 사실이다
(36절 상반). 15:4 참조.


=====11:40


  나흘씩 애곡하더라 - 델리취(Delitzsch)는 여기 이른 바 "애곡하더라"란 말의 히브
리어(*     ) "찬송하더라"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하였다. 버네이(Burney),  이스
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한 것은, 신화적(神話的)  
거에 의하여 지켜진 축제(祝祭)였다고 한다(The Book of  judges  wiht  Introduction
and Notes, 1970, pp.332-224).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구약 성경의 역사성(歷史性)
을 그대로 받지 않는 잘못된 학설이다.